14화. 눈부신 초봄의 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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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눈부신 초봄의 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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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눈부신 초봄의 볕
2023.02.17.
서준은 공원 앞에서 차를 세우게 했다.
“회사에 들어가시지 않고, 왜…….”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보고 떼거리로 덤비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뒷좌석을 돌아본 봉 실장과 박성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며칠 사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CN으로 출근하는 것부터가 파격인데, 오늘은 사람 많은 공원을 산책한다며 파격에 파격을 더하듯 따라오지 말라고까지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습니까. 애도 아니고, 조금 걷다 회사로 들어갈 테니 내 걱정은 맙시다.”
이야기를 마친 후 차에서 내린 서준은 정장을 벗어버린 격식 없는 옷차림이었다. 가벼운 로퍼를 신고 디스트로이드진 위에 흰색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캐주얼한 모습임에도 여지없이 클래식한 우아함을 꽉 붙들고 있었다.
손에 든 화이트 코듀로이 재킷을 날개를 펼치듯 등 뒤로 돌려 덧입은 서준이 옷깃을 매만지며 성큼성큼 차에서 멀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봉 실장과 박성호는 결국 차를 몰고 < CN 엔터테인먼트 > 사옥으로 향했다.
서준은 한적한 공원 산책로로 접어들어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여린 바람이 산뜻한 나무 향기로 그를 반겨주는 듯했다.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것을 양손에 쥔, 피나는 노력으로도 가질 수 없는 것까지 고루 다 갖춘 삶. 태생부터 남다른 태서준은 완벽한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또한 더없이 완벽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게 너무 지나쳐 따분했던가. 서준은 가업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생각뿐인 형들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해서, 지금은 그 누구보다 빛나는 길을 후회 없이 가고 있다.
‘너도 이제 결혼해야 하지 않겠니?’
중동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당일 가회동 본가에 들렀던 서준은 어머니의 다그침을 그저 조용히 웃어넘겼다.
비혼주의는 아니지만, 속거나 속이거나 속아주는 관계는 한 번이면 족했다. 더욱이 헤어지는 것조차 진흙탕 싸움이 되기 십상인 결혼 따위를 삶의 중심에 둘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결혼이 싫으면 죽기 전에 어디서 애라도 만들어 오든가. 하나도 좋고 둘이면 더 좋지 않겠냐.’
드물게 근엄을 내려놓은 아버지의 닦달에는 크게 실소했다. 안 그러시던 분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다 하시고. 자식을 앞세워 보낼 뻔한 심정이 오죽했으면 저러실까, 하는 생각에.
그런데 그 자리에서 왜 그녀가 불쑥 떠오른 건지. 하물며 전역하고 얼마 되지도 않은 터라 지척에서 엄소연을 또다시 맞닥뜨릴 줄은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점 아니었나.
며칠 전의 저녁 식사 지리에선 또 어땠나. 그렇게 낯가리는 척하더니 어느 틈에 내 손을, 내 마음을 제 것처럼 가지고 놀지 않았나.
‘엄소연 씨, 혹시 내게 감정이 남았나?’
‘어후, 무슨 말씀이세요. 주, 주사! 그거라고요. 제가 술 마시면 아무나 막 손잡고 그러거든요.’
‘아무나?’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조인하한테도 이랬습니까.’
‘방금 한 말은 알딸딸해서 나온 헛소리고요. 이사님 말곤 이런 적도 없단 말이에요! 오랜만에 마신 술이라 실수한 건데, 좀 봐주면 안 돼요?’
‘봐주기 싫다면?’
‘옹졸하게 이러기예요? 그렇게 안 봤는데 이사님, 그런 남자였어요?’
‘어떻게 봤는데.’
‘그야, 잘생기고 멋지고 젠틀하고 섹시하…… 힝, 내가 지금 뭐래…….’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 고집스럽게 앙다무는 그녀의 입술이 너무도 탐스러웠다. 그녀의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였다. 그대로 끌어안고 마구 키스하고 싶을 만큼.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건대 엄소연에게 미칠 듯이 끌리는 걸 어떻게 참은 건지, 나도 보통 인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엄소연도 내가 싫진 않은 것 같은…… 뭐? 싫진 않아? 정확지도 않은 추측 따위에 나, 태서준이 지금 안도감이 든 거야? 심지어 고작 그 자그마한 여자 하나 때문에?
나날이 저답지 않아지는 것에 짜증도 났지만, 서준은 엄소연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 지독한 집착이 조금이나마 사라질 그때까지만. 그녀를 대할수록 더 흥미로워지는 건 사실이니까.
“…….”
피식, 하며 잔잔한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건 실로 모처럼 만의 일이었다. 느린 걸음마저 멈춘 서준은 고개를 뒤로 젖혀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나무에서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만들어낸 초막을.
그 틈으로 열린 쪽빛 하늘을.
찬란한 빛에 유난히 짙은 눈매가 살긋 찡그려졌다.
날씨가 좋아 더 눈부신 초봄의 볕이었다.
***
사흘 전, 드라마 제작 미팅이 있었다.
감독과 작가, 그리고 출연 배우 모두가 한데 모인 행사는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로를 격려하는 친절한 미소에 끈끈한 동료애까지 섞는 분위기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옥에 티가 있었다면 아마도 대본 리딩할 때 대사를 두 번 절은 엄소연의 실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소연의 기량 부족이 아니었다. 아무도 몰랐지만 태서준이 테이블 밑으로 소연의 다리를 톡톡 건드린 짓궂은 장난이 원흉이었으니까.
품위와 준절함을 갑옷처럼 전신에 장착한 태서준 아닌가. 소연이 더 당혹스러웠던 건 그러한 그가 못된 짓거리를 하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것 말고는 전체 미팅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튿날 발생했다.
누구 입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증되지 않은 엄소연의 연기력이 이번 작품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리딩할 당시의 실수마저 가십거리가 되어 사람들 입에 안 좋게 오르내렸다.
일하기에 앞서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이 허다했던 소연은 매번 기가 죽어 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얘기에 허탈한 실소가 나왔지만, 자신감을 잃진 않았다. 소연은 하루하루를 알뜰히 써가며 제 몫을 열심히 준비할 따름이었다.
운에 집착하거나 쉽게 좌절하는 그녀가 아니기에.
막막한 상황에 부닥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때를 돌아보면 이쯤이야 그냥 견뎌지는 가벼운 시련에 불과했다.
CN 소속 연예인들만 이용하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오전 내내 체력 단련에 힘쓴 소연은 오늘 역시 액터 연습실에서 발음을 연습하고 있었다.
“소연아, 점심 먹자.”
여닫이 유리문을 살짝 연 도순이 얼굴만 빼꼼히 들이밀고 배시시 웃었다.
“언제 왔어? 너, 오늘 회사에 나올 일 없다고 했잖아.”
“스타일 팀에서 네 의상 예쁘게 나왔다고 해서 들러 봤지.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고.”
“그래서, 봤어?”
“어. 장난 아니야. 정말 공주 옷 같더라.”
연습실 안으로 들어온 도순이 책상에 엉덩이를 걸쳐 앉으며 말했다.
“오민정은 안 나타났어? 또 널 갈구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오구, 우리 도순이가 그게 그렇게 걱정됐어? ”
“어디 걱정뿐이겠어? 또 그러면 머리칼을 확 잡아 뜯든 콱 깨물어버리든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려고 그랬지.”
“하여튼, 여도순답지.”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도순을 올려다본 소연은 분홍 립스틱을 바른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오민정 씨 지금 지옥에 있어.”
“그 심보에 천국 갈 리도 없겠지만 설마, 죽었다는 건 아니지?”
주연과 조연은 천지 차이지만, <태양의 주인>에서 임팩트 있는 역할은 소연이 맡은 과거의 소여화였다.
작품 전체로 보면 비교적 적은 분량이지만 엄소연이 소화해내야 하는 장면은 주연보다 더 큰 무게감이 실려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것이 못마땅한 오민정은 심술이라도 부려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지만, 주변인들의 시기와 질투에 굳은살이 배길 대로 배긴 소연은 그다지 개의치 않아 했다.
“그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 비슷할 거야. 격투기 특훈 들어갔거든. 당장 내일부터 무술 신 찍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거야. 스페인 촬영 때 말고는 부딪힐 일이 없다는 얘기지.”
소연이 밝은 낯빛으로 말하자 제일 반가운 소리를 들은 도순이 책상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오, 진짜? 그거 잘됐다!”
“그러니까 우린 편하게 밥이나 먹자! 나도 마침 배가 무척 고팠거든.”
소연은 생긋 미소 지으며 도순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
평일 낮 회사식당은 한산했다.
소연과 도순은 공교롭게 남자 세 명이 식사하는 식탁에 합석하게 되었다. 식판을 들고 다른 곳에 앉으려는 두 여자를 구원후가 스스럼없이 불러 앉힌 거였다.
서준은 밥 생각이 없는지 수저도 건드리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앞쪽에서 앉아 조용히 밥만 먹고 있는 엄소연을. 오물거리는 것에만 열중하는 조그만 입술을.
콜록!
사레가 들린 소연이 기침했다. 억지로 먹은 게 얹힌 것도 같은 데다가 갑자기 목이 막혀 물을 마시는 그 순간 서준이 미팅 때처럼 소연의 발을 건드린 거였다.
“……!”
태서준 씨, 사람 곤란하게 왜 자꾸 이러시는 건데요!
라고 대번 따지고 싶었으나, 소연은 내심 찔리는 게 있어 그만두었다. 소중한 자신의 아이가 삶의 연료가 되어 이제껏 잘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게 자신이 지은 큰 죄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치뜬 눈을 도로 내리뜬 소연은 서준을 한참 응시했다. 그는 재밌다는 듯 저와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피식거리고 있었다.
소연은 시선을 옮겨 나머지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혹여 그와 저의 물고 물렸던 잠깐의 눈싸움을 누군가가 봤을까 하여.
소연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지난주 내내 이사실로 저를 불러 탕비실에서 다친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다. 고작 일주일만에 깨끗이 아물 정도의 상처였지만, 그는 다 나을 때까지 살피겠다던 말을 착실히 지켰고, 저는 그가 부를 때마다 뽀르르 달려갔다.
그때만큼은 다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치료할 필요가 없어진 그다음 날부터 돌연 싸한 태도로 저를 외면했다. 그런데 미팅 날도 그렇고 지금 또 발장난을 치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이런 태서준은 나만 아는 걸까?
생각할수록 기막힐 뿐인 소연은 그가 얄밉기까지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소연의 반응이 꽤 재밌는 모양인지 서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손도 대지 않은 식판을 치우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마침 식사를 끝낸 원후가 소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엄소연 씨에게 제안할 게 있습니다.”
“제안이요?”
“그렇습니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만, 여기 조인하 씨가 소연 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하니 두 사람이 호흡 한번 맞춰 보는 건 어떻습니까.”
구 대표는 1대1 트레이닝을 말하는 거였다.
소연도 그 부분이 절실하긴 했으나 조인하는 안 될 말이었다. 조 선배의 감정을 알고부터 그와 적절한 선에서 불필요한 접촉을 피해왔던 만큼 단둘이 있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다고나 할까.
“아, 전…….”
그러나 소연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냉혹한 연예계 바닥에서 그나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한 명이 조인하였다. 어렵사리 이어온 원만한 관계를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리고 싶지 않은 거였다.
이때 난처한 친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도순이 대차게 나섰다.
“그건 안 될 말씀! 같은 작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소연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지나친 배려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거든요. 같은 맥락으로 조인하 선배님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괜한 신세는 지고 싶지 않을 겁니다. 소연아, 내 말이 맞지?”
소연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으나 그대로 물러날 조인하가 아니었다.
“널 물어뜯는 사람이 꽤 많다고 들었어. 그래서 더 애쓰는 건 알겠는데, 혼자 벽보고 연습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잖아?”
노골적인 호의를 강하게 드러낸 인하가 설득하려 들자 소연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진즉 도움이 필요했으면 CN 아카데미 강사님께라도 요청했을 거예요. 선배님이 좋은 마음으로 배려해주시려는 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귀한 선배님 시간을 뺏을 순 없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조곤조곤한 말투지만 엄소연은 예나 지금이나. 아니, 예전보다 더 높은 벽을 제게 쌓고 있었다. 그걸 긴 시간 모른 척했으나 더는 안 되겠다 싶은 인하는 이번 기회에 그 벽을 허물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마저 거절당하니 평정심을 잃은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연기도 배우 간의 교류인데 엄소연 천성은 그게 잘 안 되잖아? 그래서 네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거고. 가만 있으면 더 신나게 헐뜯는 이 바닥에서 혼자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선배…….”
소연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인하는 공격적인 어조로 소연을 더욱 압박했다.
“어디 그뿐이야? 필요한 걸 적당히 주고받는 것도 못 하는 너라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거 아니야. 하는 일마다 꼬이고 불미스러운 일도 끊이지 않고. 그런 네 처지에, 그 성격으로 뭘 더 할 수 있을까. 이쯤이면 스스로 알아야 하지 않나? 네 인생에서 꽉 막힌 네 사고가 제일 문제인 거.”
“…….”
가까운 사람이 아픈 곳을 찌르니 더 아팠다.
더구나 이 자리엔 태서준도 있지 않은가.
그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민낯이 들춰진 것만 같은 소연은 무너질 것만 같은 시선을 제 손끝으로 떨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