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작은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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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작은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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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작은 불씨
2023.02.20.
조인하는 엄소연을 몰아세우는 것도 부족해 마구 다그쳤다. 생각이 많고 매사 조심스러운 그녀의 신중한 성격을 융통성 없는 사회 부적응자처럼 매도했다.
그런데도 엄소연은 묵묵히 참고만 있다?
저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줄곧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오가는 대화를 듣고만 있던 서준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소연을 보고 있자니 가슴 언저리가 욱신욱신 불편했다.
관심 없던 엄소연의 연기 연습 따위에 태서준이 불쑥 끼어든 건 불쾌한 감정의 연장선이었다.
“알만한 분들이 왜 이러실까.”
길게 내쉬는 한숨에 낮은 음성을 섞은 서준은 연이어서 말했다.
“대본 유출은 금지사항이고, 엄소연 씨는 그게 신경 쓰이는 모양인데 그만들 합시다.”
“픽…….”
본능적으로 태서준이 껄끄러운 인하가 아무도 모르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여도순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저, 씨……!
“맞아요, 지킬 건 지켜야죠! 이사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
도순은 잠깐의 정적을 틈타 태서준 쪽에 한 표를 행사했다. 다시 말해 ‘태서준, 화이팅! 조인하, 꺼져!’였다.
편파적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친구로서, 팬으로서 소연에게 또 찝쩍대려는 게 분명하거니와 태서준에게까지 비아냥대는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으니까.
“드라마 촬영은 이미 시작했지만, 엄소연 씨 촬영은 작품 중반부터이니 아직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더 좋은 방향은 얼마든지 있지 싶은데.”
이어 말하는 서준을 보며 원후가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태 이사가 웬일?”
태서준이 어디 남의 일에 섣불리 참견할 위인인가. 하지만 생각 없이 끼어들 녀석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구원후의 눈빛엔 약간의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사전에 조인하 씨와 무슨 작당을 했는진 모르지만, 구 대표가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는 뜻이지.”
“!”
작당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펀치가 급소를 강타하듯 훅 들어오자 인하의 이맛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사실 도순처럼 눈으로 본 건 아니더라도 서준은 미세한 콧바람 소릴 들었다. 그것에 대한 소소한 답례랄까. 그로 인해 서준과 인하 사이에 날카로운 전류가 흘렀다.
“그럼, 태 이사가 해주든가!”
양쪽의 두 남자를 번갈아 일별한 구원후가 왜들 이러냐는 듯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를 새로운 제안으로 덮었다.
“태 이사가 극 중 실제 상대역이니 엄소연 씨 연습 파트너를 해준다면야 이보다 더 좋은 안성맞춤도 없잖아. 대본 유출 우려도 없고, 미리 입 맞춰 보는 일이니, 태 이사도 나쁘진 않을 거고.”
태서준은 타 배우에게 제 시간을 할애한 적이 결코 없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자신에게 철저하고 타인에게 인색한 태서준을 너무도 잘 아는 원후는 99%의 농담에 1%의 진심을 얹은 것뿐이었다.
소연 역시 그런 일은 설마, 하며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더구나 태서준이 제 입장을 대변해 주니 그 감동은 몇 배나 더 컸다. 하지만 지금도 찬바람이 쌩 부는 이 남자가 그것까지 해준다고 나설 리는 없을 것이기에.
그런데 이건 무슨 반전일까.
“어때, 태 이사가 해줄 테야?”
“…….”
한 번 더 떠보듯 구 대표가 물으니 서준은 대꾸 없이 빽빽해서 더 짙은 눈썹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
원후는 그 표정이 긍정적인 신호인 걸 모르지 않았다.
“진짜? 정말 가능하겠어?”
“못 할 것도 없지.”
“……!”
쐐기를 박는 듯한 서준의 목소리에 순간 놀라 맥이 탁 풀려버린 소연의 시선이 서준을 향했다. 그리고 그마저 거절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려는 찰나에 원후가 소연의 말문을 가로챘다.
“엄소연 씨도 들었다시피 태 이사와 차후 연습 시간을 따로 조율하면 될 듯합니다만…….”
별일이긴 하지만 서준의 결정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원후는 제 의사를 힘껏 밀어붙였고, 그 물 샐 틈 없는 입심에 소연은 더는 마다할 여지가 없는 곳까지 떠밀렸다.
이로써 엄소연의 연습 파트너 문제를 깔끔히 마무리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버린 조인하는 불퉁한 음성부터 시큰둥한 표정까지, 불만을 한껏 표출했다.
“태 이사님은 드라마 촬영 들어가신 거 아닙니까? 주연이 한가하게 조연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은 없으실 텐데요.”
“글쎄. 그건 엄연히 내 일인데 그쪽이 왈가왈부할 이유가 있을까.”
서준은 절로 나오는 피식거림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조인하 씨야말로 시간 있으면 본인 일에 더 신경 써야 할 듯싶던데. 족족 어설픈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허접한 안목도 문제겠지만, 명색이 충무로 히든카드라면서 밑바닥 시청률이나 손익분기점에 못 미치는 초라한 성적을 자신의 인기만 믿고 남 탓으로 돌리면 어디 되겠습니까.”
조금 전 엄소연을 무시한 조인하의 무례함이 적지 않게 못마땅했다. 그러나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엄소연의 태도가 더욱 신경을 바짝 긁었다.
서준은 그에 대한 일침과 더불어 적당히 비웃어주는 마무리도 잊지 않았다.
“그것도 천성이겠지만.”
“!”
마지막 말에 인하의 미간이 와지끈 구겨졌다.
신랄한 비판에 이어 제 입으로 내뱉은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허를 제대로 찌른 거였다. 하지만 인하는 반박은커녕 그 어떠한 말도 내놓지 못했다.
제아무리 곱씹어 봐도 마땅히 틀린 얘기가 없는 탓이었다.
***
띠링.
차 한잔하자는 서준의 메시지를 받은 건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도순을 배웅하고 이제 막 연습실 앞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이사실로 오라는 글귀를 읽은 소연은 가슴이 덜컥했다.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갈까 말까를 수도 없이 망설였다.
식당에서부터 울렁울렁 묘하게 떨리던 심장이 이젠 고장 난 듯 서버린 듯도 했다.
그러나 제 것 같지 않은 다리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어느새 이사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똑똑.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선 소연은 회전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태서준과 눈이 딱 마주쳤다.
서릿발이 선 듯한 눈길을 마주한 소연은 절로 경직돼 좁아지는 양어깨를 간신히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첫 입술을 뗐다.
“저 왔는…….”
“밤이고 낮이고 내가 부를 때 나와야겠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왠지 화난 사람 같더라니, 말허리를 끊는 것도 그렇고 앉으라는 말도 없이 사람을 세워둔 채 용건부터 꺼내는 것부터가 단순히 차 한잔하자고 부른 게 아닌 것 같았다.
“네……?”
“두 번 말해야 아나. 엄소연 씨가 내 시간에 맞추라는 뜻입니다.”
그에게 연습 시간을 맞추는 거야 당연했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갔으니 없는 시간을 내는 것부터가 부담스러울 테니까. 그가 물어보면 그렇게 하려고 은연중 생각한 것도 같다.
그런데 난 무엇에 이리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걸까.
지난주처럼 온화하게 대해주지 않아서?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미미한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그것 이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두룩한 이유가 소연의 입을 무겁게 했다.
‘그 얼굴로 아무 데서나 울진 맙시다.’
‘제 얼굴이 왜요?’
‘예쁘니까?’
함박눈이 내리던 그 겨울밤, 상처받은 마음을 감싸주던 다감한 목소리와 따스한 손길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소연도 알고 있었다.
태서준은 감히 욕심낼 수 없는, 저와 아주 먼 세상 사람이라는 걸.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의 다정함은 그날 한정이었다는 걸. 이젠 그날의 그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아니, 애초에 그 남자는 이 세상에 없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대답은 안 해도 됩니다.”
서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등에서 배어나는 철저한 무심함은 원래부터 차디찬 사람임을 입증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엄소연 씨는 무조건 내 뜻을 따라야 하는 ‘을’이니까.”
“…….”
어련하시겠어요. 당신은 ‘갑’이고 난 ‘을’도 과분한 처지인데. 하지만 그걸 굳이 강조하는 당신이 좀 유치해 보이는 건 아나요?
물기가 고인 눈시울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휘몰아친 설움에 두 주먹을 꽉 말아쥔 소연이 북받치는 숨을 천천히 내쉬는 그때였다.
창가에서 돌아선 서준이 소연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 싸늘한 기운에 정신이 확 차려진 소연은 잘게 떨리는 연갈색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
“…….”
서준은 아련함을 맑게 내비치는 커다란 눈망울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이 슬픈 눈은 뭘까.
그 재수 없는 새끼를 내가 단번에 찍어 눌러 속상한 거야? 그게 그렇게나 안쓰러워 눈물 바람인 거냐고!
그것도 감히, 내 앞에서……!
식당에서 인하에게 아무런 반박도 없이 앉아 있던 엄소연은 지금과 똑같은 눈빛을 띠고 있었다. 조인하의 시건방진 태도 역시 이 여자를 향한 깊은 감정에서 비롯됐음을 모를 수 없는 그였다.
그 때문이었다.
심장에서 타닥타닥 불꽃이 튀었다.
뜨거운 불길이 전신의 혈관을 휘돌아 탄내가 나도록 가슴을 불사르는 듯했다.
극렬한 질투였다.
그러나 평생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생소한 감정이기에 서준은 그저 불쾌할 따름이었다. 혼탁한 마음을 차가운 실소로 덮어버린 그가 물었다.
“뭔가 불만스러운 모양인데, 조인하 때문인가.”
“…….”
제 눈물의 의미를 극구 해명하고 싶지 않은 소연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위기상 어쩔 수 없이 저를 떠맡았으니 기분이 별로인 건 이해하지만, 조인하까지 들먹이며 삐딱하게 구는 이 남자의 태도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저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소연의 투명한 얼굴엔 이곳에 들어서기 전까지 끌고 왔던 막연한 설렘이나 기대감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괜히 들떠 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자책감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럼, 뭘까. 설마 나 때문인가.”
“네. 맞아요. 이렇게 화내실 거면서 왜 나서신 건지, 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서준이 집요하게 묻자 가슴에 담긴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주먹에 힘을 실었다.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가 따로 없던데. 그래서 조금 도와준 게 그렇게 불편했습니까. 우리가 그 정도도 못 할 사이냐고.”
“이사님과 제 사이에 뭐가 있긴 한가요? 아니, 있었나요?”
긴장감으로 바들거리는 작은 주먹을 힐긋 내려다본 짙은 눈매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왜 없어.”
“!”
와락, 덤비듯 서준이 고개를 내리자 등줄기가 빳빳해진 소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내 앞에서 자꾸 경직하는 넌 뭔데. 난 그게 몹시 거슬리고. 이래도 너와 내가 아무것도 없어?”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눈앞에 바짝 다가선 그의 입술은 우리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조목조목 우기고 있었다.
“…….”
소연은 한 톨의 오점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불같은 화를 억누르는 그의 표정은 한기가 서릴 만큼 차디찼지만, 저를 응시한 까만 눈동자는 강한 열기를 내뿜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도 했다.
그게 무얼까. 무얼 갈구하는 걸까. 설마, 나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바람이 빠지다 못해 꼬깃꼬깃해진 기대감을 어느새 한껏 부풀렸다. 다 죽어가는 작은 불씨가 다시 발화하듯 말이다.
그리고 그 불똥은 엄한 방향으로 튀었다.
“그, 그런데 왜 자꾸 반말이세요! 이랬다저랬다, 정신이 하나 없다고요!”
“…….”
서준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동그란 눈매로 반격하는 표정은 무척 진지한데, 그녀는 정작 엉뚱한 걸 따져 묻고 있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쓸데없는 전투력과 말 돌리는 솜씨가 탁월한 여자였다.
“그것도 불만이었나.”
“통일해주시면 어떨까요.”
“뭘 또 통일까지. 억울하면 엄소연 씨도 반말합시다.”
“허……!”
이봐, 이봐, 순 제 맘대로잖아!
소연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삐죽거리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어찌 되었건 심각한 상황은 모면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