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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처음부터 다시 (17/51)


17화. 처음부터 다시
2023.02.27.


미친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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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세요.”

광기 어린 잔혹함을 부드러운 듯 절도 있는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건 태서준이기에 가능했다. 정결한 표정마저 갖춰 입은 청색 정복만큼이나 차가웠다.

이처럼 우아하고 견고한 기품은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드는 서준에게 매 순간 호흡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수려한 갈기를 지닌 튼실한 말은 얼핏 멀쩡해 보였으나 왼쪽 앞발의 말굽이 땅을 온전히 디디지 못하고 뽀얀 흙먼지를 일으켰다. 치명적인 관절 손상이 분명했다.

다친 말을 애처로이 바라보던 수의사가 고개 숙여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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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지만 낫지 못할 상처는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기회만 주신다면 쇤네가 최선을 다해 치료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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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사냥터에서 다리를 잃은 말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안타까울 것도 없을 법한 차분한 미소가 붉은 입술에 그려졌다. 갸름한 턱선과 깨끗한 피부에 또렷이 대비되는 냉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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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미쳐 날뛰는 개에 물린 녀석에게 살 기회조차 없앤다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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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처리하세요. 저 미친 사냥개도 같이.”

계속되는 청을 단칼에 거절한 서준이 반듯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까만 머리칼이 밝은 햇살에 부딪혀 눈부신 빛을 반사했다.

단호하고도 한결같은 주군의 태도에 수의사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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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돌아갑니다.”

꼿꼿한 검은 눈빛이 저를 따르는 시종들을 한눈에 쓱 아울렀다. 이내 말머리를 돌린 서준과 귀족들의 행렬이 사냥터를 벗어날 즈음이었다.

탕!

그리고 간발의 차로 들리는 두 번째 총성이 우거진 숲과 드넓은 들녘을 날카로움으로 찢었다.

이로써 주군의 명은 완벽히 이행되었다.

짝짝짝짝짝…….

원샷으로 진행된 촬영이 종료되자 야외 곳곳에 포진된 스태프들이 팔을 높이 쳐들어 손뼉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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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NG 한 번도 없이 한 큐에 끝났는데요? 감독님이 원테이크를 고집하셨지만 전 몇 번 끊어 갈 줄 알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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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서준이 그런 사람이지. 제 역할을 완벽히 이해하고 정확히 해내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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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굵직한 감독님들이 캐스팅 0순위로 태서준을 꼽는 게 괜히는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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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그걸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네.”

조감독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윤지완 감독은 이만 철수하자는 뜻을 현장 사람들에게 수신호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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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후.

오늘 촬영분을 끝낸 서준은 산기슭 주차장에 세워진 제 차로 가려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한 곳을 바라봤다.

주차된 차량 가운데 유독 고급스러운 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몸의 방향을 바꿔 그 차로 다가간 서준은 날쌘 동작으로 뒷좌석에 덥석 올라타 누가 볼 새라 차 문을 재빠르게 닫았다. 마치 은밀하게 이어온 관계를 뭇사람들에게 들킬 수 없다는 듯이.

수상쩍은 만남에 걸맞게 차 안에는 깊은 눈빛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서준을 한참 기다린 듯 다소 새침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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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역도 참 너답더라. 차가운 분위기는 입대 전이나 후나 어쩜 변하질 않니. 그래서 어디 연애는 하겠어?”

낮고도 품위 있는 목소리 끝엔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포근한 미소가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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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리 하신다. 또 이러실까 봐 오시지 말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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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계속 바쁘다는 핑계를 대니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그래도 네 덕에 봄꽃 구경도 하고 이 공기 좋은 곳에 와 보는구나.”

여인의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지는 동안 다소 까칠한 시선이 앞쪽 룸미러에 닿았다. 운전석의 수행인과 눈이 마주친 서준은 그에게 농담조를 섞어 가볍게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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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따로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차 여사님이 이쪽으로 가자고 안달하시거든 좀 말려주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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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사님 명령을 당해낼 도리가 없는 건 도련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수행인이 쩔쩔매자 차 여사가 그리 아프지 않게 서준의 팔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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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 충직한 사람을 왜 뭐라 해? 너나 내 말 좀 들으면 여한이 없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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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맞선 얘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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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어렵더라도 내 이 자리에서 약속은 받으련다. 여태껏 네 뜻대로 했으니 지금 하는 작품 끝나면 형들처럼 호텔로 들어와 일해. 이제 결혼을 생각할 나이도 됐잖니.”

인간미 없는 태서준. 속마음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아들의 성품을 잘 아는 차 여사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좋게 이야기할 때 잘 생각해보란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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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정갈한 말투지만 꽤 강한 압력이 실려 있음을 모를 수 없는 서준이 눈썹을 구기는 것으로 그리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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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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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섭섭하시면 한 번 했다 이혼한 거로 생각하세요. 전 결혼 같은 건 관심 없습니다.”

한쪽이 돌아서면 끝인 연애. 해도 끝까지 가리란 보장이 없는 결혼생활. 완벽하지 못한 것은 제게 가치가 없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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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업에 끼어드는 것도 그래요. 제가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가면 형들이 참이나 좋아하겠습니다. 손에 쥔 게 많은 사람일수록 막대한 재물 앞에 인면수심인 거 어머니도 모르시진 않잖아요. 저 역시 경쟁에 불붙으면 다를 바 없을 텐데 그런 일은 최선을 다해 피해야지요.”

지금이야 대놓고 으르렁대진 않지만 결국 제 밥그릇을 지키는 일엔 양보가 없다는 얘기였다. 제아무리 우애 깊은 형제지간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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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여진은 딱 부러진 서준의 답변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아들의 냉철한 판단력이 내심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

소연은 과일과 간단한 먹거리가 든 도시락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직장인들 퇴근 시간과 맞물려 기대하지 않았던 빈 좌석 하나를 마침 발견한 소연은 그곳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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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에 봅시다.]

드라마 <태양의 주인> 촬영에 여념 없는 태서준이 두 시간 전 현장에서 보내온 문자였다. 그것을 다시 확인한 소연은 귀에 꽂은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엄소연의 트레이닝 파트너를 자처한 이후 서준은 거의 매일 소연을 회사로 불러냈다. 그 때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시간에 맞춰 삼성동으로 움직인 소연은 지난 보름간 제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늦은 시간 연습을 마치고 귀가할 때마다 굳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서준과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던 소연이 끝내 고집을 내려놓고 그 뜻을 수렴한 거였다.

연일 이어지는 촬영 스케줄로도 무척 바쁜 사람이 하루에 한두 시간을 꼬박꼬박 할애한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나.

더구나 제 부족한 연기력에 온갖 독설을 거침없이 내뱉다가도 긍정적인 시너지를 나눠주는 것도 잊지 않는 그라서 더 고맙고 미안했다.

그 마음을 내색하자니 깊은 곳에 숨겨둔 마음마저 들켜버릴 것 같은 소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태서준의 의사를 묵묵히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래야 그가 보고플 때 떠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라도 더 챙길 수 있을 테니까.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던 소연은 갑자기 진동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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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시간 되나? 드라마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밥 한번 사주고 싶은데.]

조인하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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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을. 밥은 늘 신세만 지는 제가 사드려야죠. 그런데 당분간은 이래저래 여유가 없을 것 같아요. 식사는 스페인 현지 촬영 다녀와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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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시시한 거 말고 근사한 데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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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선배님.]

친절을 친절로만 여길 수 없는 마음의 빚이랄까. 조인하에게도 미안한 게 많아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낸 소연은 한숨을 폭 내쉬며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첫 키스, 첫 남자, 첫사랑…….

이 처음이란 기억에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단 한 사람.

내 몸이 한 줌 먼지가 될 때까지 그와 헤어지진 못할 것이다.

소연은 모르지 않았다.

한 남자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외눈박이. 그 사람이 가시가 되어 제 몸의 안팎을 할퀴고 찌르는데도 놓기는커녕 꽉 껴안는 방법밖에 모르는 바보.

그 아픔을 품고도 작은 신음조차 입 밖으로 낼 줄 모르는 외눈박이 바보가 저라는 걸.

어느덧 삼성동으로 접어든 버스는 < CN 엔터테인먼트 > 사옥 바로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버스정류장에 내려선 작고 갸름한 얼굴에 진한 노을빛이 닿았다. 소연은 눈가에 힘을 실어 삭막한 도시 뒤쪽으로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화려한 빛깔로 사라져 다시 눈부신 여명으로 떠오를 태양.

나도 저 태양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 끝에 살짝 올라붙은 입꼬리가 자신을 향해 충고했다.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된다면 당장 오늘 해야 할 일에 더욱더 열중하라고.

미려한 미소로 이제까지의 상념을 말끔히 씻어버린 소연은 이만 걸음을 재촉했다.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이제 곧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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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번쩍이는 칼날에 내 피를 묻…….”

소연은 기천율을 사랑하는 소여화의 대사를 끝까지 읊지 못했다. 상대역의 얼굴을 만져야 하는 부분이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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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오늘따라 그의 태도가 까칠하게 느껴진 소연은 잔뜩 긴장한 채 대사를 다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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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말해요. 날 죽이려는 게 아니라고. 설마, 당신의 번쩍이는 칼날에 내 피…….”

버퍼링에 걸린 듯 또 말문이 막혀버린 소연이 탁한 숨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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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못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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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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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할 새도 없이 가뿐히 들어 올려진 몸이 책상 위에 앉혀졌다. 서준은 소연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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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엄소연 씨 거로 생각해도 부족할 텐데. 내 손을 만지작대던 그분 아니신가? 반말도 잘하던데, 그 배포는 어디로 갔습니까.”

깊숙이 파고든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핥은 탓이었다. 어깨를 움츠린 소연이 서준의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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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 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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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도 해야 하나 싶어서.”

정수리에서 부드럽게 타고 내려온 서준의 손이 긴 머리칼 끝을 돌돌 말아쥐었다.

남자답게 꽤 큰 손이었으나 길고 곧은 손가락은 여자의 것보다 더 곱고 예뻤다. 평생 아름다운 것만 쥐고 있을 것처럼.

그 손이 제 턱을 그러잡자 소연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살갗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가 제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만큼 머릿속이 아찔했다.

서준은 이제껏 기다렸다.

오래전 그날 왜 말없이 사라진 건지, 그녀 스스로 말해주길.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그동안 저를 잊지 않았다고 말해주길.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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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른 척하지?”

약속 시간이 아닌데도 서준은 잠시 회사에 들러 복도를 서성거린 적도 있었다. 우연인 척, 엄소연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연습할 때도 순간순간 마주치는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마치, 철저하게 무언가를 숨겨놓고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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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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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은 소연은 살며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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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람 무시하는 게 엄소연 씨 주특기였지.”

서준은 작은 턱을 감싼 섬섬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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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사님은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는 게 주특기인가요?”

잘도 되받아치는 여린 목소리에서 떨리는 호흡이 느껴졌다. 경계하는 눈빛은 또 어떻고. 잔뜩 겁먹은 새끼고양이가 따로 없지 않나. 확 물어버리고 싶게.

기분이 썩 좋지 않음을 표현하는 대신 서준은 선명한 입술 끝을 위로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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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특기는 아니지만, 내가 왜 그랬을까.”

나 싫다는 사람에게 치근댄 적 없는 내가. 작은 스침 따위에 연연한 적 없는 내가. 한번 끝난 일은 절대 돌아보지 않는 내가. 이제껏 그래왔던 내가 엄소연 앞에선 왜 자꾸 정반대로 행동하고 싶어지는 걸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왜 엄소연이 나만 바라보길, 나만 생각하길 바라는 걸까.

그냥도 아니고 미치도록.

높은 콧날을 도도하게 세운 얼굴이 천천히 제게 기울어지자 소연은 풍성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태서준의 짙은 욕망을 한 번 겪어봤던 그녀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꼼짝없이 입술을 내주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일순 휩쓸린 소연은 이내 눈을 감고 말았다. 피하지 말라고, 그래도 된다고 허락한 그녀의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섞였다. 멍하니 약간 벌어진 작은 입술에 서준의 입술이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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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준은 숙이고 있던 얼굴을 재빠르게 들어 올렸다.

그의 예민한 촉이 몰래 훔쳐보는 눈길을 재빠르게 감지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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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좁은 간격이 없어지는 그 찰나, 한 박자 늦게 서준의 시선을 따라 연습실 문 쪽을 바라본 소연은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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