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금지된 것
(19/51)
19화. 금지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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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금지된 것
2023.03.06.
“저…….”
이만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대표실을 나가려던 정화가 오도카니 선 채 원후를 응시했다.
햇수로는 4년.
계절이 열세 번 바뀌었으면 그의 실망감, 혹은 배신감도 얼추 희석됐을 터. 그러길 바라며 태서준이 전역하길 손꼽아 기다렸던 정화는 새빨간 입술로 태연하게 그의 안부를 물었다.
“전역하고 그새 광고도 몇 개 했던데, 안 하던 드라마까지. 서준 씨는 요즘 눈코 틀 새 없이 바쁘겠네요?”
“…….”
알면서 왜 묻냐는 듯 원후는 너른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대표님, 제가 왜 이러는지 뻔히 아시면서 정말 이러시기예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이곳에 온 것부터가 냄새가 나더라니, 역시 그거였다.
알면서 모르겠다고 딱 잡아떼는 구 대표의 밝은 표정은 비즈니스 미소였다.
유정화를 보낸 즉시 엘리베이터에 오른 원후가 막간을 이용해 봉 실장에게 연락했다. 태서준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수족에게 전화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고 익숙해서였다.
“태 이사 어디 있습니까.”
-차 뒷좌석에 계십니다. 대표님께 연락드리라고 할까요?
“아니. 지금 부탁합니다.”
-네.
스피커폰이 바로 연결됐는지 이내 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나야.
“유정화가 회사로 찾아왔더라고. CN과 전속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기에 거절했다.”
-그래서.
“그 여자 행동거지가 아직도 너를 제 남자로 여기는 것 같아. 넌 아니지?”
-…….
서준은 짧은 대답도 아닌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튼, 알고나 있으라고. 이만 끊는다.”
-그래.
지하 1층 주차장엔 시동을 건 고급세단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원후가 그 차에 서둘러 몸을 싣자 운전 기사에게 속히 출발할 것을 지시한 비서가 1초도 지체할 수 없는 사정을 대표에게 이야기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 놓칠 수도 있겠는데요, 대표님.”
“그럴 순 없지요.”
원후가 가지런한 치아를 씩 내보이며 대꾸하자 운전대를 잡은 수행인은 요령껏 차의 속도를 높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노련한 운전기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할 터.
이제야 한숨 돌린 원후는 비서에게 홍콩에서 사인하게 될 월드 투어 계약서를 읽게 했다. 뻔한 내용이지만 그럴수록 만전을 기울여야 실수가 없는 법이니까.
“주식회사 < CN 엔터테인먼트 >는 ‘갑’으로써 월드 투어 전 일정과 공연 행사권 모두를 ‘을’인 <퓨쳐드림>에 일임한다. 행사가 중단될 일이 발생할 시 그에 대한 배상은 무조건 ‘갑’이 해야 하며…….”
“잠깐. 갑이라면서 ‘무조건’이라니. 배상하는 쪽을 중단에 대한 ‘책임이 있는 당사자’로 정정해 진행하세요.”
“대표님, 그건 투어에 참여하는 다른 기획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래서 우리도 그들처럼 끌려가야 한다? 어쩌나, 난 그럴 수가 없는데.”
“그럼 어쩌시려고요.”
“그 콘서트에 우리 애들 빼면 어디 그 커다란 경기장 좌석이 반이나 차겠습니까?”
저쪽에서 그 내용을 수정하지 않으면 손잡기는커녕 같은 지역에서 같은 날 CN 단독으로 콘서트를 열겠다는 뜻을 원후가 내비치자 비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건 상도덕에…….”
뼛속까지 사업가인 구원후는 호락호락한 성정이 아니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단 5년 만에 회사를 가파르게 성장시킨 장본인으로서, 업계에선 구 대표 얘기만 나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타고난 장사꾼, 혹은 비즈니스에 특화된 짐승이라고.
“먼저 상도덕에 어긋나는 계약서를 들이민 게 누군데. 할 얘기만 하고 우리는 가만히 지켜봅시다.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말인즉슨 ‘갑’답게 상대방이 애걸할 때까지 기다리다 적선하듯 계약서에 사인만 해주면 된다는 얘기였다.
CN 패밀리가 작은 유랑극단도 아니고, 충분히 승산 있는 카드임은 분명했다.
***
구 대표가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다면 저 역시 아쉬울 건 없다.
눈 한번 딱 감고 원하는 대로 비위만 맞춰줘도 재벌들은 돈주머니를 마구 벌릴 테니까. 그깟 짓이야 일도 아닌 거니까.
다만, 정화가 속이 쓰린 건 태서준을 되찾는 계획 일부가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짜증스러운 건 그 같지도 않은 계집애가 CN 소속 배우인 것도 부족해 태서준과 동일 작품에 출연한다는 거였다.
감히 내 남자를 또 넘봐?
만 3년이 훨씬 지난 오래전 전 그날, 엘스텔라 호텔의 그 하루가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는 걸 정화는 알고 있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엄소연의 뒤를 밟아 알아낸 것이긴 하지만 그 결과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호텔에서 마주친 그날은 자신과 태서준이 헤어진 지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니, 끽해야 고작 한 달 사귀다 그에게 헌신짝처럼 버려진 것일 테니까. 살려고 발악하다 한순간 내쳐진 나처럼.
하지만 한번 거슬리면 끝까지 쫓아가 밟아 죽이는 것도 유정화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였다.
극적인 만남이라도 바랐을까. 다소 위험스럽고 은밀한 약속을 엘스텔라 호텔 레스토랑으로 잡은 건 혹시나 태서준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기대 때문이었다.
챙 넓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그 위로 후드티 모자까지 푹 덮어쓴 정화는 케이크 상자를 앞에 있는 남자에게 건넸다.
“이거…….”
“날짜가 하루 지나서 입이 근질근질해지려던 참이었는데 말입니다.”
느물느물한 말투를 입에 올린 남자는 상자 안에서 봉투만 빼내 열어 보곤 비식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 올라간 입꼬리가 얼마간 내려오지 않는 건 봉투 안에 든 액수가 나름 만족스러운 거였다.
선글라스 위로 꺼낸 눈동자를 쓱 굴린 정화가 테이블 너머로 작게 말했다.
“요즘 별다른 조짐은 없던가요?”
“누구 말입니까.”
“추 기자님, 정말 이러시기예요? 매달 드리는 돈에 꾸준히 더 얹어 드리는 이유가 따로 있을 텐데요.”
“아, 그거?”
귓구멍을 후비적거린 새끼손가락에 입김을 후, 불며 거드름을 피운 남자가 앞쪽으로 머리를 얕게 기울였다.
“태서준은 차종이 자주 바뀌는 데다 눈치까지 빨라서 미행 자체가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엄소연은 3개월 전인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촬영장이나 회사에 있는 게 전부라 캘 것도 없다고. 더구나 유명인도 아닌 무명 배우의 따분한 고군분투가 내게 무슨 영양가가 있겠냐고. 그래서 이만 손 뗀다고 했는데 기억 못 하시나?”
연예부 기자라는 사람이 근성이 이것밖에 안 됐다. 운 좋게 알아낸 남의 과거로 협박할 줄만 알았지, 제힘으로 쓰는 기사는 한 줄도 없다. 복사하고 붙여넣기만 하면서 기자랍시고 설치는 게 한심했다.
“기억이 있을 리 없죠. 추 기자가 내게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무슨 소립니까. 분명 말했는데.”
“하, 이제야 알겠네. 계속 돈 더 받아먹으려고 날 속인 거잖아! 아무튼 그 봉투 도로 내놔요.”
“그건 또 왜…….”
“처음 약속한 돈만 주면 되잖아.”
“허허, 대단한 여배우님께서 쪼잔하게 이러면 쓰나!”
“시끄럽고 이리 내놔!”
약이 오른 유정화가 기자의 손에 있는 종이봉투를 가로채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때였다.
레스토랑 룸 밖으로 나온 두 여자가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어서 들어가지 않고 뭐 해?”
“어후, 싫은데욧.”
“네 언니처럼 고분고분하면 좀 좋아?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러니!”
“엄마 생각이 정 그러시면 아빠처럼 딸 하나 없는 셈 치세욧. 난 맞선 같은 거 질색이니까.”
“후회하지 말고 엄마 말 들어! 정말 놓치기 아까운 집안 자제란 말이다!”
“엄마야말로 그만 해요. 뻔한 거짓말로 불러내는 것도 이제 그만하시고.”
“너, 정말 이대로 가면 호적에서 빼버릴 테니까 각오해!”
“뭐, 그러시든가.”
도순은 다신 안 볼 것처럼 지 여사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렇게 레스토랑 홀을 씩씩거리며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테이블 밖으로 삐죽 나온 누군가의 발에 걸린 도순의 몸이 휘청했다.
“엇!”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도순이 눈앞에 가까이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
“……!”
졸지에 마주친 세 사람의 눈이 커다래진 건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 밤중에 실내에서마저 모자와 선글라스 아이템을 고집하는 건 연예인의 기본 습성일 터. 찬찬히 살펴보니 자주는 아니지만 잊힐 만하면 한 번씩 촬영장에서 대면하게 되는, 보기만 해도 께름칙한 그 사람이었다.
“유정화 씨?”
그리고 남자는 소연이 머리를 다쳤을 당시 병실까지 숨어들어와 기웃대던, 그 전후로도 엄소연 주변을 캐묻고 다니다 제게 몇 번 덜미를 잡히고. 그러고도 3개월 전까지 끈질기고도 수상쩍게 눈에 띄던 그 기자 새끼 아닌가 말이야.
그런데, 이곳에서 단둘이 무얼…….
스스로 눈썰미 있다고 자부하는 도순은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관계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재수 없는 것들은 끼리끼리 논다더니 호텔 레스토랑에서 오붓한 식사와 케이크를, 누가 보건 말건 꽉 움켜잡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틀림없었다.
“오호라, 두 분 사귀는 사이셨구나!”
“!”
“!”
***
태서준과 비교하면 한참 멀었지만, 조인하가 메소드연기로 인지도가 높은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기 못잖은 높은 콧대와 다혈질적인 태도 때문에 그를 대놓고 보이콧하는 감독도 적지 않았다.
서준 역시 조인하에게서 썩 좋지 않은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전에 회사식당에서 날을 세운 것도 그렇고 마치 제 여자처럼 엄소연을 쳐다보는 눈빛이 심히 어둡고 끈적했으니까.
그리고 어젯밤.
비상구로 도주하는 그놈을 그냥 보내주었다. 훤칠한 키의 뒤태만으로도 확실히 누군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인하는 왜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도망쳤을까.
그렇게 엄소연 주변을 배회하는 까닭은 무엇이고.
정말 거슬리는 놈이란 말이지.
그런데 엄소연은 조인하가 서성거렸다는 말에 다른 일이 있었을 거라며 그를 두둔하기 바빴다. 그게 더 미치게 짜증 나는 건 뭔지. 그 때문에 발동한 집착이 그녀를 불러냈는지도 모르겠다.
약속 없이 찾아간 것이라 만나지 못 할지언정.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아주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기에.
해외 로케를 앞둔 탓에 금일까지 강행군했던 드라마 촬영이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촬영장에서 돌아온 서준은 가볍고도 세련된 옷차림과 무엇도 바르지 않은 헤어스타일로 자택을 나섰다.
도곡동에서 소연을 픽업해 양평 별장으로 향하는 지금은 오후 6시.
-집 앞입니다. 태 이사님께서 엄소연 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봉 실장 목소리를 빌린 서준의 연락은 일방적이고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늘 마지막 같은 소연은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회사가 아닌, 서울도 아닌 외진 곳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는 그의 목적이 단발적이고 속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고요한 정적 속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소연과 겹쳐 보이는 서준의 시야에 들어온 주황빛 노을은 그럭저럭 괜찮은 장관을 창공에 그려내고 있었다.
-그 여자 행동거지가 아직도 너를 제 남자로 여기는 것 같아. 넌 아니지?
서준과 한 공간이 같이 있는 터라 소연은 본의 아니게 두 남자의 통화를 들어버렸다.
대화의 주된 내용은 유정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태서준의 과거 연인이었던 그녀와의 관계가 현재진행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에 퍼뜩 스친 건 서준의 꽉 다물린 입술이 구 대표의 물음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아서였다.
부드러웠던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가는 걸 보면서 소연의 가슴은 아프게 무너졌다. 유정화란 암초에 덜컥 부딪힌 심장은 하염없이 떠밀려갈 뿐이었다.
처음부터 연인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저질러버린 단 한 번의 미친 짓.
그 일로 독단적인 선택을 했던 나.
그 과정에서 파생된 비밀과 책임이 태서준의 것이 아니란 것쯤은 소연도 알고 있었다. 감히 욕심낼 수 없는 남자에게 자꾸 무언가를 바라면 안 된다는 것도.
그러나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 말간 눈동자는 저절로 한 곳을 향했다.
금지된 것이라 겁도 나지만 그래서 더 열망할 수밖에 없는 태서준을.
“저…….”
“…….”
소연이 입매를 달싹이자 서준이 말해보라는 듯 눈매를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갑자기 만나자고 한 이유, 아직 말씀해 주시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별장은 왜 가는 건데요?”
“단순히 식사하자는 건데, 꼭 특별한 이유를 붙여야 하나.”
“아…….”
단순히.
단순히 밥만 먹자는 거구나.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난 아무 의미 없는 부름에 두근두근 마냥 설렜구나.
그랬구나…….
이 실망감은 뭘까. 괜한 걸 물었나 싶은 소연의 입술이 삐친 듯 꼭 다물렸다.
“…….”
서준의 입술도 한일자로 딱 붙어버렸다. 제 대답이 대화 단절 신공이었음을 그녀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으나 뒤늦게 수습하기도 좀 어색해서였다.
다시 이어진 차 안의 정적은 죽을 만큼 숨 막혔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소연은 시한폭탄처럼 곧 터질듯한 가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려야 했다.
이윽고 별장에 도착한 서준은 봉 실장과 박성호를 별채로 먼저 들여보내고 보닛을 돌아 차 문을 열었다.
“내립시다, 엄소연 씨.”
“…….”
서준이 내민 손을 가볍게 붙잡고 두 발로 땅을 디딘 소연은 어딜 봐도 숲뿐인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따라오라는 듯 서준이 앞장서 걷자 그를 뒤따르는 소연이 물었다.
“이 별장, 이사님 건가요?”
“설마 빌렸을까.”
“여긴 너무 조용하고 깊숙한 곳 같아요.”
“겁나? 내가 납치라도 했을까 봐.”
“훗, 그건 아니고요.”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춘 소연이 말간 웃음을 터트리며 먼 숲과 하늘을 동시에 우러러보았다. 그녀와 나란히 선 서준도 자연스러운 눈길로 소연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어두운 밤이 서서히 찾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