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하나도 안 무섭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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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하나도 안 무섭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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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하나도 안 무섭거든?
2023.03.10.
더는 미소 짓지 않는 얼굴이 지독히도 고요했다.
서준은 한 곳만을 주시했다.
식탁을 정리한 메이드가 와인과 어울리는 과일과 치즈를 세팅하고 물러갈 때까지. 어떤 의미로든 제 심장을 세차게 뛰게 하는 유일한 여자, 미치도록 얄미운데 절대 미워할 수도 없는 엄소연을.
서준은 이 상황을 머릿속에 수도 없이 그렸었다.
너와 나.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외딴 이곳.
잘 찾지 않는 양평 별장에 엄소연을 데려온 건 무슨 짓을 벌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거라는 치밀한 계산과 더는 견딜 수 없는 소유욕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녀의 마음을 떠볼 차례였다.
“잘 못 먹던데. 음식이 맘에 안 들었나.”
단둘뿐인 별장 안은 물 삼키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조용했고, 낮게 가라앉는 그의 음성은 이 밤처럼 차분했다.
“기분이 이상해서요.”
“뭐가.”
“이사님이 계속 말 놓으시는 거요.”
“그럼 계속 이상해야겠네. 난 지금 존대할 기분이 아니거든.”
포도주잔을 천천히 가져와 붉은 액체를 입 안에 머금은 서준은 너른 식탁 너머로 젖은 목소리를 건넸다.
“우리가 처음 마셨던 게 이 와인이었는데. 엄소연 씨는 기억 못 하겠지?”
샤토 라피트 로칠드.
왜 모르겠나. 금제 포크에 고급스럽게 박힌 호텔 이니셜은 물론 어쩌다 한번 내쉬는 그의 나직한 숨소리마저 평생 잊을 수 없는, 죽어서도 곱게 간직할 그 밤이었는데.
‘삼나무와 포도즙이 긴 세월 동안 잘 어우러져 독특한 향과 진한 빛깔을 내는 매력적인 와인입니다. 그런데 그거 압니까. 엄소연 씨는 이 와인과 정반대인 거. 첫인상은 여린데 볼수록 강하고 묘한 구석이 느껴지거든.’
소연은 함박눈이 내리던 밤 그가 했던 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껏 가만히 있다가 이곳에서 그때 일을 소환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급히 치솟은 긴장감이 목 끝까지 차오른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날 일을 외면하는 것뿐이었다.
“글쎄요. 오래된 일이잖아요.”
고른 음성으로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식탁 아래로 모은 여린 두 손은 어느새 흥건해진 식은땀을 잔뜩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그날에 대해서 심도 있는 대화를 해야겠군.”
“무, 무슨 얘기를…….”
순간 소연의 낯빛이 차게 식었다.
회사 옥상에서 태서준을 우연히 만났던 그 순간 소연은 놀란 것보다 울컥했다.
그가 제 이름을 잊지 않고 불러주어서. 그게 너무도 고맙고 좋아서. 혼자 남모르게 그리워했던 시간이 서러워서.
그러나 더 큰 두려움이 그 모든 감정을 덮어버렸다. 아이의 존재를 그가 알 리 없을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설마’ 하는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한 거였다.
그때보다 몇 배 더한 초조감에 입 안이 바싹 마른 소연은 물 몇 모금을 식도로 넘긴 후 다소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낼 필요가 있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부터 가짜였으니까요.”
미친 혀가 제 맘대로 움직였다면 바로 이 순간일 거다. 말하는 장본인도 제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지 미처 몰랐으니까.
하지만 얼마쯤은 사실이고, 엎질러진 물이라 소연은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가짜?”
그 단어가 무척 거슬린 서준이 진한 눈썹을 단박에 구겼다.
“그래요. 가짜. 이사님과 저, 그날 있었던 일 전부 다요.”
“네 말대로라면 침대에서 우리가 했던 짓도 가짜였겠네?”
“……!”
갈 곳을 잃은 갈색 눈동자가 출렁거렸다. 서준의 직설적인 표현이 그녀 안에 잠재해 있던 수치심과 자책감을 일깨운 거였다.
아래로 떨어진 시선이 매끄러운 식탁 겉면에 부딪혔다.
격한 감정에 치우쳐 모든 것을 부인해버렸다. 태서준이 가짜일 수 없는 건 그녀가 더 잘 알았다.
무엇보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었다. 이것밖에 안 되는 자신이 그저 한심하게 느껴진 소연은 입술을 앙다문 채 황망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태서준의 밑바닥 본성을 날카롭게 할퀴었을까. 평정심을 간신히 유지하느라 억눌린 음성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나와 몇 번이고 했으면서 엄소연은 그 하룻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만큼 그렇게 끔찍했나? 말도 없이 사라질 만큼 내가 싫었던 거냐고!”
노골적인 이야기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뱉어낸 서준의 얼굴을 일직선으로 바라본 소연이 치맛자락을 불끈 움켜쥐며 목청을 높였다.
“생각나는 게 없다니까요!”
그게 아니라고.
마치 제 살처럼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길, 예쁘다며 괜찮다며 달래주던 자상한 목소리, 친밀한 접촉에서 빚어진 떨림과 흥분감, 넓고 단단한 단신 품속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아 한순간 없는 마음마저 생겨버렸다고.
그 말도 안 되는 욕심이 더 커져 버릴까, 그게 겁나서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떠났을 뿐이라고.
그 솔직한 고백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소연은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적막한 이곳은 별장을 부러 찾지 않는 한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 같았다. 그는 정말 밥만 먹자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니, 겁도 없이 따라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나?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다 말해버려?
아니, 아니지. 그럴 순 없다. 이제 와 뭘 어쩌겠다고. 구구절절 구차하게 변명하고 설명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말지.
흔들리는 마음을 꽉 붙들어 맨 소연은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들킬까 얼른 감쳐물었다.
하지만 숨긴다고 못 볼 그가 아니었다.
“전혀 기억에 없다더니 얼굴은 왜 그러실까.”
서준은 비웃기라도 하듯 가늘게 뜬 눈으로 소연을 바라봤다. 여유롭게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지극히 거만한 자태로 그녀의 숨통을 조이듯이.
“그래요. 기억해요. 하지만 이사님도 아시잖아요. 거래였을 뿐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거. 거짓으로 시작한 일에 진짜가 존재할 리 없죠. 제가 자초한 거지만, 이사님이 저를 안은 건 그 여자 대신이었잖아요.”
“대신?”
“저도 그쯤은 안다고요. 그때도 유정화 씨를 못 잊어 괴로워하시더니 아직도…….”
목소리를 낼수록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조바심이 턱밑까지 차오른 소연이 잠시 하던 말을 멈추자 서준이 대뜸 말허리를 가로챘다.
“무슨 근거로. 설마, 아까 구 대표의 물음에 대꾸 안 한 것 때문에?”
“…….”
구차하게 그 얘기는 왜 꺼냈을까. 오늘따라 실수 연발인 소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건 대꾸할 가치도 없었어.”
“의미 있는 말만 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글쎄, 대부분 쓸모 있는…….”
“그럼 ‘누가 될진 몰라도 속 좀 타겠네.’ 그 얘기도 의미가 있었겠네요? 예전에 제가 만날 사람을 이사님이 심각하게 걱정하셨잖아요.”
서준의 말허리를 분지른 소연은 급기야 가슴에 깊이 박혀 응어리가 된 그것을 순식간에 쏟아냈다.
“하…….”
서준의 잇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일을 전혀 기억 못 한다는 사람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제가 한 말을 그대로 읊어대니 절로 터져버린 실소였다.
“거봐, 말 못 하겠죠? 제가 대신해드릴까요? 이사님은 그 말로 제게 선 긋고 못 박으셨어요. 하룻밤 이상의 인연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하고 싶었던 거죠.”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보였나.”
“그래요. 딱 거기까지인 사람!”
“하, 그래?”
“……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소연이 식탁에서 멀어진 건 대답과 동시였다.
내가 망쳐버렸다.
이 소중한 시간을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지 못해 결국, 이렇게 돼버렸다.
더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1초라도 빨리 먼지가 되어 자취 없이 사라지고 싶을 뿐. 혼란스러움과 자괴감에 휩싸인 소연은 별장 밖으로 나와 숲 쪽으로 난 오솔길로 무작정 뛰어갔다.
두 다리가 움직이는 방향이 막다른 길인지도 모른 채.
***
정신없이 뛰던 다리가 멈춰 섰다.
“아, 어떡하지…….”
소연은 순간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갑과 핸드폰이 든 가방을 별장에 두고 나왔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거였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멀리 와버려 거기가 어딘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소연은 실로 난감했다.
여기가 어딜까.
불빛 하나 없는 주위는 어둑하다 못해 깜깜했다. 그나마 만월에 가까운 둥근 달빛이 어두운 시야를 밝혀주어 다행이긴 했지만, 켜켜이 우거진 덤불과 나무만 보이는 야산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가면 갈수록 왠지 같은 곳이 반복되는 기분까지.
그렇지만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숲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건 스스로가 자초한 셈 아닌가. 소연은 어두운 수풀 사이를 씩씩하게 걸었다. 꿋꿋한 자력으로 헤쳐나가야 할 인생처럼.
그러나 한참을 가도 길 같은 건 없었다.
제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봐도 보이는 거라곤 풀과 마른 가지, 흙과 자갈로 뒤덮인 거친 땅이 전부였다.
그런 맹지를 하염없이 걷자니 치마는 자꾸 무언가에 걸리고 구두를 신은 발은 위태롭게 삐끗거렸다. 그러더니 결국 오른발 구두 뒷굽이 반쯤 떨어져 나가는 동시에 주춤한 종아리가 나뭇가지에 확 긁혔다.
“아얏! 스읍, 아파…….”
다리를 살펴보니 올이 풀린 스타킹 위로 금세 피가 비쳤다. 그러나 이제 상처라면 우습지도 않은 듯 소연은 한숨을 내쉬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굽힌 등허리를 폈다.
그 순간이었다.
“꺅!”
자지러지듯 기겁한 소연이 뒷걸음질 치며 맨땅에 주저앉았다.
바스락거리는 기척이 청각에 가까이 닿아 놀란 탓도 있지만, 어둠에 묻혀 명확지 않은 시야가 극한 공포심을 불러들인 거였다.
본능적으로 주먹을 불끈 쥔 소연은 스산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설치류? 고라니? 뭐 끽해야 그 정도겠지만, 소연의 이마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호랑이가 나와 봐라! 하나도 안 무섭거든? 어디 나타나기만 해 봐, 내가 싹 다 물어버릴 테니까!”
허풍이라도 내지르니 좀 견딜 만했다.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찐 순간 일어서는 방법을 잊어버린 두 다리에 다시 힘을 실은 그녀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그때였다.
“꺄아악!”
고개를 드는 동시에 눈앞에 바짝 다가온 큼지막한 형체를 발견한 소연이 곧 죽을 것처럼 크게 소리쳤다.
찰나의 순간 사람이란 걸 인지했으나 들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그녀의 주먹은 꽤 순발력 있고 야무졌다.
휙!
탁!
하지만 남자의 움직임이 더 재빨랐다.
“무모한 줄은 알았지만, 벌처럼 톡 쏠 줄은 몰랐네.”
공중에서 소연의 손목을 낚아채 움켜쥔 서준이 씩 웃었다. 빛나는 남자의 얼굴은 그 위로 새하얀 달빛이 부서져 더욱 눈부셨다.
“이, 이사님?”
저를 겁먹게 만든 사람이 태서준이란 걸 알자마자 소연은 깨달은 게 있었다.
유난히 광채 나는 이 얼굴, 이 중저음 목소리가 그새 미치게 그리웠다는 걸. 걷는 내내 이 남자를 떠올리느라 어둡고 선뜩한 숲길도 그나마 덜 무서웠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