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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성숙한 어른 (21/51)


21화. 성숙한 어른
2023.03.13.


강한 끌림엔 그만한 충돌이 있기 마련.

그러나 제 속에 쌓인 불만의 원인이 사랑인 줄 모르는 서준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그만하기로 했다.

차 없이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이곳에서 콜택시를 부르든, 시내가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걸어가든, 엄소연이 뭐를 어떻게 하든 제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굳이 숲으로 들어가는 그녀 모습을 창문으로 내려다보기 전까지는.

잘 닦인 길을 놔두고 왜 하필 그쪽으로 가는 건지. 큰 차도로 나가는 지름길을 택한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그녀가 향한 곳은 깎아진 절벽에 둘러싸인 산속이었다.

식탁 의자에 제가 준 가방이 그대로인 것까지 확인한 서준은 어느 틈에 어둡고 험한 산속에서 헤매는 엄소연의 뒤를 밟고 있었다.

얼마 후 넘어질 뻔한 소연이 몸을 반으로 접은 채 한숨짓자 서준은 지켜보는 것을 이만 끝내고 그녀 쪽으로 움직였다.

그 인기척에 빽 소리치며 주저앉은 소연은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되지도 않는 말을 어찌나 열심히 외치던지, 서준은 웃음보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원체 아름다운 여자라 액색해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새 파리해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소연의 손을 부드럽게 고쳐잡은 서준이 말했다.


“그냥 맞아줄 걸 그랬나.”

“이사님인 줄 몰랐다니까요!”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제 발로 뛰쳐나와 길을 잃었다. 겁에 질려 남자에게 손찌검까지 하려 했다. 그 꼴이 얼마나 우습고 한심해 보였을까. 더 초라해지기 싫은 소연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게 왜 따라와서 사람 놀라게 하냐고요.”

“같이 왔으니 같이 가야지.”

그러나 서준은 그녀의 손을 다시 힘주어 잡았다. 두 번 다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꽉.


 


“일단 별장으로 돌아가자.”

“…….”

얼굴을 붉힌 소연은 도톰한 입술을 쭈뼛거렸다.

어차피 돈도 없고 길도 모르는 처지에 답은 하나였다. 그의 말대로 별장으로 돌아가는 것. 가방을 두고 왔다는 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벌벌 떨며 별짓 다 하는 걸 전부 보았을 텐데 그것까지 털어놓으면 바보인증을 스스로 하는 셈이니까.


“언제 갈 건데요.”

“내일 갈까 해. 내가 범법자나 악덕 고용주는 아니라서.”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별채로 들어간 봉 실장과 박성호도 식사와 반주를 했다, 등등. 서준은 다소 긴 부연 설명을 했다.

그의 말인즉슨 굳이 오늘 가야 한다면 누가 됐든 음주운전을 해야 하고, 만일 그 일이 발각되면 그 즉시 바람직하지 않은 기사가 연예 뉴스 전면을 장식할 거란 뜻이었다.


“그렇지만…….”

커다란 손에 감싸인 작은 손이 꼼지락거렸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아기의 그것처럼 기분 좋은 서준은 그녀가 무엇 때문에 말 못 하고 주저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지켜온 선.

허물어질 듯한데 아직은 건재한, 어쩌면 엄소연의 보호막일 수도 있는 우리 사이의 벽이 무너지는 게 두려운 거겠지.

소연의 망설이는 표정에서 그것을 읽어낸 서준은 짙은 눈썹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안 잡아먹을 테니 걱정하지 마. 다른 뜻은 없으니까. 나도 엄소연 씨도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건 오랜만이잖아. 그러니 오늘은 별장에서 푹 쉬고 내일 가자.”

별장 안에서의 행동과 사뭇 다른 그의 태도는 더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마치 말썽 피운 어린아이를 달래듯 온화한 말씨와 간혹 미소가 지어지는 표정은 친오빠처럼 다감하기까지 했다.

아니, 애초에 그는 특별한 의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예전에 못 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약간의 물고를 텄을 뿐인지도. 그것에 지레 겁먹고 괜히 과민하게 발끈한 건 저 아닌가.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 사단으로 키운 사고뭉치는 바로 저였다.


“누가 뭐랬나. 그보다 죄송했어요.”

“뭐가.”

“아까요. 이사님께 함부로 말한 것도 그렇고, 제 감정에 치우쳐 뛰쳐나오기까지 했잖아요. 제가 경솔했어요.”

반성을 모르면 발전도 없다.

그 이치를 부모님을 통해 일찍이 배운 소연은 제 잘못을 들여다볼 줄 알았다. 더구나 이젠 한 아이의 엄마로서 더 성숙한 어른이 돼야 하니까.


“사과할 줄도 알고. 의외네.”

“……!”

으잇! 이 쓰담쓰담은 뭘까.

머리를 쓰다듬는 서준의 손길에 소연의 눈살이 살긋 찌푸려졌다. 마치 어른에게 칭찬받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만 갈까.”

서준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의 손과 큰 보폭에 딸려가는 그녀의 다리가 바삐 종종걸음을 치나 싶은 그때였다.


“핫!”

아까 덜렁거렸던 굽이 구두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삐끗한 발목은…….

상태를 확인하고자 서준이 그녀의 오른발에 손을 짚어 조금 움직거리니 소연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툭 튀어나왔다. 그것도 그렇지만 망가진 구두 때문이라도 당장 걷기엔 무리가 따랐다.


“접질렸네. 업혀.”

서준은 서슴지 않고 허리와 무릎을 굽혀 큰 키를 낮추었다.


“아, 아니, 어, 어!”

넓고 판판한 등에 소연이 덥석 올라탄 건 순식간이었다.

서준이 사양할 틈도 안 주고 소연의 팔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

그의 따스한 온기가 좋긴 했으나 다 큰 성인 여자가 남자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 어색함을 어쩌지 못해 소연은 주저리주저리 떠들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별장 정원에 다다라 있었다.

서준은 잔디밭을 느리게 걷다 구름다리로 위로 올라섰다.

아담한 연못의 고풍스러운 다리 밑으로 업고 업힌 두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됐다.

그에게 심장의 두근거림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서준에게 업혀 오는 내내 소연의 가슴은 더욱더 요란하게 달그락거렸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님 힘드시겠다. 어서 내려줘요.”

“발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다 왔잖아요.”

“…….”

보채는 아이처럼 소연이 발끝을 동동 굴리자 서준이 다물린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좀 더 이렇게 있고 싶어 천천히 걸었다. 또 이곳에 도착해선 별장 주위를 쓸데없이 배회했다.

콩콩 울리는 심장 소리.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목덜미를 바짝 조이는 귀여운 움직임. 귓전을 간지럽히는 깃털 같은 숨. 달콤한 향기까지.

그녀에게서 전해져오는 모든 것에 심취했던 자신이 웃기지도 않아서였다.


“여기에 앉아도 되죠?”

“물론.”

구름다리 한편에 소연을 앉힌 서준은 긴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옆에 앉았다.

은은한 달빛이 어른거리는 물 위. 그리고 연인처럼 나란히 앉은 남녀의 투 샷. 소연은 자신의 로망을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에 실었다.


“참 좋다. 예전부터 이런 거 해보고 싶었는데…….”

“엄소연 취향인가.”

“제가 좀 구식이긴 하죠.”

“그렇다고 얌전하진 않던데. 되게 사납던데. 호랑이 어쩌고 하지를 않나, 다 물어버리겠다고 엄포까지 놨던가.”

“나 놀리려고 따라왔던 거죠?”

새초롬한 눈길이 잘생긴 얼굴에 닿았다.


“어. 되게 재미있더라고. 안 따라갔으면 아까워서 어쨌나 싶을 만큼.”

“이사님이라도 재밌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저는 딱 죽지 않을 만큼 무서웠는데. 이사님은 원래 그런 성격이셨어요? 사사건건 사람 약 올리고 놀리는 거. 아, 전에도 이사님이…….”

소연이 종알종알 떠드는 동안 뭔가 못마땅한 서준의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전부터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치해지는 자신이 싫어 참았었다. 하지만 더는 안 되겠는지 서준은 불만스러운 시선을 소연에게 꽂으며 말했다.


“내가 왜 이사님이지?”

서준의 까칠한 어조에도 이미 시동이 걸려버린 소연의 입술은 쉬지 않았다.


“그럼 뭐라 할까요. 선생님? 선배님? 아니면 대스타 태 배우님? 뭘 원하시는데요?”

“…….”

“거봐, 다 맘에 안 들어서 대꾸도 안 하시는 거잖아요. 매번 이렇죠. 놀리거나 화내거나 무시하거나. 이사님이니까 이사님이라고 부른 건데, 제가 뭘 잘못했다고…….”

빨리 말하느라 호흡이 가빠진 소연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할 때였다. 갸름한 턱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잡은 서준이 그녀의 시선을 제게 끌어왔다.


“원하면 다 해주나?”

“그야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도록 성가시고 짜증 났다.

온종일 이 여자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꽉 차오르는 게.

오늘만 해도 그랬다. 엄한 산속을 맴도는 엄소연을 지켜보며 가다 서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그녀의 이름을 부를까 말까를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이런 내 꼴이 실로 기가 막히고 몹시 맘에 안 들어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날 알기나 하는 건지.

나답지 않은 나.

얼마나 더 이래야 할까.

엄소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더.

소연의 얼굴에 정지된 그의 시선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했고, 그녀의 턱을 붙잡은 손가락엔 부지불식 힘이 실렸다.

달빛의 고운 결을 머금은 깨끗한 얼굴이 밤에 피는 야생화 같았다. 그 얼굴을 새까만 눈동자에 총총히 박은 채 얼마간 침묵하던 서준이 말했다.


“이름 불러 봐.”

“네? 누구를…….”

“내 이름. 단둘이 있을 땐 무조건.”

“단둘이?”

“그래. 너, 나, 우리 두 사람.”

이름에 특별한 뜻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심장 어딘가가 간질거리기 시작한 소연은 커다래진 눈을 갸웃거렸다.


“태, 서, 준……. 이렇게요?”

“다시 해 봐.”

소연이 띄엄띄엄 이나마 그의 이름을 말하자 서준은 한 번 더 요구했다.


“태서준…… 씨?”

그녀의 목소리로 불리는 제 이름이 듣기에 좋았는지 그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

소연은 그를 놓치지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태서준과 가깝게 마주하고 있으니 시간이 정지된 듯도 싶고, 이 세상에 둘뿐인 것도 같았다. 이 묘하고도 설레는 감정을 소연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이제 좀 조용하네.”

“……제가요?”

“그래, 아닌 것 같이 생겨선 은근 말도 많지.”

“아닌데. 저 말 안 많은데. 나 그런 소리 첨 듣는데…….”

“이 봐. 또 많아지잖아.”

“…….”

그가 또 뭐라 할까, 짐짓 입술을 앙다문 소연이 둥근 눈매를 새초롬하게 만들었다.


“예뻐서 봐준다.”

“…….”

예쁘다는데 싫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소연의 입꼬리가 사뿐하게 올라붙었다. 서준은 그 탐스러운 입술을 엄지로 천천히 매만지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돼?”

시선을 빨아당기는 그의 얼굴, 얕게 내려앉는 속눈썹이 키스 그 이상을 원하는 것처럼 무척 그윽했다.


“…….”

소연은 저도 모르게 서준의 뺨에 손끝을 살며시 대었다.

다정한 태서준이 꿈은 아닌가 하여.

이것이 꿈이라면 늦게, 아주 늦게 잠에서 깨어났으면 하여.

하지만 마음과 달리 소연의 손은 서준의 얼굴에서 화들짝 거두어졌다. 황급히 돌려진 시선마저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별장을 뛰쳐나올 때만 해도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려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 문제 앞에선 뒷걸음칠 수밖에 없는 죄인. 태서준 앞에선 당당할 수 없는, 그를 반듯이 바라볼 자격도 없는 저라는 걸 모르지 않아서였다.

눈길을 연못에 퐁당 빠뜨린 소연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꾸만 꼼지락대는 손을 둥글게 말아쥐었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서.

무방비하게 내어준 그 얼굴을 다시 만지고 싶어서.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이르고 타이르는 중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될 걸 왜…….”

서준이 갸름한 턱을 부드럽게 잡아 그녀의 시선을 제게 끌어왔다.


“…….”

그를 다시 바라보게 된 소연의 눈망울이 잘게 떨렸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느덧 찬 바람이 불지 않는 계절, 완연한 봄이 돌아왔다. 겨울 말고도 이 남자를 기억할 수 있는 계절이 하나 더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소연의 심장은 매우 벅차올랐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 무리가 어둠을 뚫고 영롱하게 반짝인다. 숲의 싱그러운 내음을 싣고 불어온 바람이 보송한 목화솜처럼 포근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밤이었다.

첫사랑과 떨리는 입맞춤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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