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파격 (22/51)


22화. 파격
2023.03.17.


금요일 오후.

뷰티숍 안은 오늘따라 분주했다. 샵의 규모가 커 듬성듬성 같아 보이지만 자신이 가장 돋보일 수 있게 치장하는 연예인의 수는 평소보다 꽤 많았다.

메이크업을 마친 엄소연 역시 드레스 피팅실에 들어가기에 앞서 메인 소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엘스텔라 호텔에서 거행되는 사교 파티는 매년 봄철마다 크게 열리는 상류층 행사로, 각계 셀럽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다.

대작 드라마 <태양의 주인>에서 조연 그 이상의 존재감이 기대되는 신인배우 엄소연. CN 엔터테인먼트의 야심 찬 히든카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녀를 사람들은 매우 궁금해했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들의 관심에 부응하는 것도 엄연히 그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구원후 대표는 그 파티에 함께 갈 파트너로 엄소연을 지목했다. 소연 역시 회사 대표의 의중을 일기에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큰 자리에 나서는 게 처음인 소연은 어제 낮부터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이거라도 마셔 봐.”

때마침 약국에 다녀온 도순이 뚜껑을 제거한 액상 청심환을 소연에게 건넸다.


“나 쓴 거 싫은데.”

“이건 먹을 만해. 일단 잡숴 보라니까.”

약이라면 무조건 질색하는 소연이지만 청심환만큼은 마다할 수 없었다. 이거라도 먹어야 얼어 있는 표정을 조금이나마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


“옳지, 쭉! 어때, 맛 괜찮지?”

“써.”

말은 쓰다고 하면서 생글거리는 표정은 또 뭔지. 피식, 웃어버린 도순은 어제 끝난 얘기를 또다시 들먹였다.


“네가 고집한다면 피해 갈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천륜이란 것이 숨기고 말고 할 일이 아님에도 매니저로서 걱정이 앞서는 건 당연했으니까.

어제 낮 두 시경, 서준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소연이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별일은 없었다.

친구처럼 편안한 대화를 나누다 시간이 늦어 별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하고 각자 다른 방에서 취침했을 뿐이다. 다음 날 다소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준은 집 앞까지 소연을 고이 데려다주었다.

서준의 태도는 꽤 신사적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소연은 가능성을 엿보았다. 이처럼만 하면 드라마 작업을 하는 기간만이라도 태서준과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겠다는 희망 말이다.

그래서 온종일 기분이 좋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생긴 건 어제저녁이었다.

소연은 엄마와 긴 전화 통화를 했다.


‘현우가 요즘 말이 부쩍 늘더니 엄마를 자주 찾아.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애한테도, 핏덩이를 두고 떠난 너한테도, 내가 못 할 짓을 하긴 했지. 이제라도 모자가 같이 사는 게 맞는 것 같아. 다만, 넌 일을 해야 하니, 보모는 계속 현우 곁에 놔둬야겠다. 애가 한국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만 나도 같이 있으려고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엄마의 물음이 있자마자 소연은 입을 틀어막고 엉엉 울었다. 그 흐느끼는 소리만으로도 딸의 대답은 충분했기에 조연희 여사는 다음 달에 현우와 귀국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정리해야 할 게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연락을 받고 소연의 집으로 건너간 도순이 맞닥뜨린 건 꺾을 수 없는 소연의 굳은 의지였다.

< CN 엔터테인먼트 >와 전속 계약할 당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 못 했던 게 가장 후회된다는 소연은 어떤 불이익이 발생하더라도 더 늦기 전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밝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엄현우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하더니, 하루 사이에 그 마음이 더욱 굳건해진 듯 소연은 서슴없이 말했다.


“진작 말해야 했던 거고, 내 욕심 때문에 회사나 윤 감독님 작품에 피해가 가면 안 되잖아.”

“내가 대신 말해줄까?”

어쩌면 회사와의 전속계약이 해지될지도 모른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 출연 계획이 틀어지고 손해배상까지 해야 할 상황과 직면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는 소연이 걱정될 수밖에 없는 도순은 차라리 제가 회사와 담판 짓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소연은 그조차 자신이 한다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야.”

“대표님이 뭐라 할지 내 심장이 다 쫄린다. 그런데, 다음 달이라고 했지? 어머니가 네 껌딱지랑 한국에 들어오시는 거.”

“응. 이제 현우랑 안 떨어져도 돼.”

“그렇게 좋아?”

도순의 질문에 아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은 소연이 시큰해진 콧잔등을 찡긋했다.


“어. 너무너무.”

“그래, 네가 좋으면 나도.”

엄마가 아이와 같이 살겠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도순은 조용히 소연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고마워, 도순아…….”

소연은 매니저 그 이상의 의미인 도순이 있어 너무도 든든했다.


“엄소연 님, 이쪽으로 오시죠.”

“네.”

마침 나타난 샵 직원이 소연을 드레스 피팅실로 안내했다.


 

***

오늘 같은 날 세 형제가 <엘스텔라 호텔> 후계자로 사람들 앞에 나란히 서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매번 아들 하나를 없는 셈 쳐야 하는 마음이 영 찜찜하기 그지없는 여진의 눈길이 석호의 단정한 눈매에 걸렸다.


“용준이, 이준이는 부부동반으로 전면에 잘도 나서는데, 서준이는 아직 제 짝도 없는 데다가 내 아들인 것도 쉬쉬해야 하니 제가 답답해서 하는 소리 아닙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평생 배우만 할 녀석이 아닌 건 임자가 더 잘 알지 않소. 또 우리 아니면 그 녀석을 누가 믿어준단 말이오.”

“그렇긴 하죠.”

차여진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아무렴 자식 일인데, 나라고 왜 조바심이 안 나겠소. 하지만 다 때가 있는 법이라오.”

태서준은 지독한 왼손잡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양 손잡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오른손을 왼손 버금가게 사용하고 있다.

유독 빼어난 마스크와 신체 조건처럼 완벽만을 추구하는 서준의 독한 기질은 선천적인 것으로, 유순한 성품을 지닌 두 형과 단 한 번도 고분고분한 적 없는 막내아들은 밑바탕의 결부터 매우 다르다.

태석호 회장의 이야기를 다시 요약하자면, 반려자와 함께하는 가족을 일구고 지키는 일이 인생에서 얼마나 멋지고 값진 일인지 막내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는 얘기였다.


“하여튼 내 말은 통 듣질 않으니 당신이 잘 구슬려 봐요.”

“서준이는 내가 늘 예의주시하고 있지 않소. 임자는 염려 말고 어서 연회장으로 내려가 보시구려.”

“어련하시겠어요.”

파티 시작 전에 남편을 잠깐 보려고 회장실에 들른 것인데 푸념이 다소 길어졌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난 여진이 남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물었다.


“그래서, 서준이는 지금 어디 있대요? 곧 촬영차 해외로 나간다던데, 그 전에 얼굴은 봐야죠.”

“등잔 밑이 어둡단 말이 있지. 한데, 말 안 듣는 아들만 찾지 말고 나 좀 챙겨주지 그러오.”

“당연한 걸 말씀하시네.”

쪽!


“다녀올게요.”

가벼운 입맞춤과 아리따운 미소를 남편에게 건넨 여진이 서둘러 회장실을 나갔다.


“후훗…….”

아내의 온기가 다녀간 뺨을 느리게 매만지며 피식거리던 석호가 직속비서실과 연결된 인터폰을 지그시 눌렀다.


-네, 회장님.

“일전에 내가 부탁한 그거 말일세. 어떻게 됐나.”

-베니토아이트는 워낙 희귀 보석인지라 알아보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언제.”

-다음 주 수요일이면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예상보다 빨라 좋군. 잘 알았네. 수고했어.”

한 쌍의 원앙.

금실 좋은 부부의 모습이 이러하려나.

태석호는 서른여섯 번째 프러포즈와 함께 아내에게 줄 선물을 야심 차게 준비하며 곧 돌아올 결혼기념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



“어쩜……!”

소연을 진득이 바라본 숍 마스터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엄소연의 모습이 무척 감탄스러워서였다.

이제껏 배우 모델 할 것 없이 유명연예인이라면 대부분 이 뷰티숍을 거쳐 갔지만, 이토록 자체발광하는 투명한 피부와 빼어난 미모를 접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과하지 않은 메이크업과 반업스타일 헤어는 사랑스럽기 그지없고, 마른 듯 굴곡진 몸을 감싼 로즈골드 드레스는 시스루 원단에 알알이 박힌 반짝임과 어우러져 소연의 우아한 자태를 몇 배로 증폭시켰다.

잘록한 허리와 탄력 있게 올라붙은 엉덩이 핏이 약간 덜름했다. 그 부분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보정한 숍 마스터는 소연을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자, 어때요?”

제 손이 한 일이지만 엄소연의 완성된 스타일은 최고의 미사여구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탓에 숍 마스터는 진한 아이라인 눈매를 크게 둥글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제껏 스타일링을 받아 본 중에 지금이 가장 맘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눈에 담은 소연이 진심을 전하니, 성글게 땋아 올린 머리에 티아라 장식을 달아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한 숍 마스터가 만족스럽게 입매를 당겨 올렸다.


“소연 씨는 얼굴에 칼 하나 안 댔네요. 딱 봐도 알겠어. 피부도 어쩜 이리도 곱고 깨끗한지. 말해 뭐 해. 예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려야겠어요.”

“어후, 과찬이세요.”

“겸손할 필요 없어요. 구 대표님이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따로 할 것도 없을 만큼 미모를 타고나셨으니까요.”

“…….”

계속되는 찬사가 부끄럽고 민망할 따름인 소연이 얼굴을 붉혔다.


“그거 아세요? 이곳에 있는 연예인들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분위기든 외모든 엄소연 씨를 못 이기는 거.”

피팅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소연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내린 숍 마스터가 속삭이듯 말했다.


“설마요.”

“전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오늘 파티에서도 분명히 엄소연 씨가 제일 눈에 띌 거예요. 그러니 긴장하지 말고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맘껏 즐겨요. 그래도 되실 분이니까. 당당하고 도도하면 더 좋겠죠. 자신감이 소연 씨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

소연은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직업상 입에 담는 빈말이겠지만, 중년 여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용기를 불어넣어 준 탓일까.

자신감을 얻은 연갈색 눈동자에 오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

높은 천장의 샹들리에 불빛이 너른 연회 홀을 환히 내리비췄다.

고급스러운 형색으로 장내에 들어선 귀빈들은 그야말로 화려했고, 소위 상위 1%에 속한다는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듯 탄산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저와 같은 부류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이제 막 엘스텔라 호텔에 도착한 엄소연은 구원후 대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으리으리한 호텔 본관 로비로 들어섰다.

찰칵찰칵…….

바리케이드 라인에 쭉 늘어선 기자들이 소연과 원후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에 잠시 주춤했으나 포토존에 다다른 소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았다.


“구원후 대표님, 엄소연 씨와 자연스럽게 팔짱 한번 껴 주시죠!”

“데뷔하는 첫 작품부터 비중 있는 배역을 맡으셨는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으나 소연과 원후는 커플처럼 손을 흔들며 그럴싸한 포즈는 취하되 말은 아꼈다.

인터뷰에 응하는 자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대화를 나눈 후라 두 사람의 입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엄소연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 순간 원후는 머릿속이 쥐가 난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농담이라기엔 소연의 표정이 무척이나 비장했고, 진담으로 받아들이자니 그것이야말로 충격 그 이상으로 쉬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진짜입니까?’


‘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원후는 몇 번이고 다시 물었고 그때마다 소연의 흔들림 없는 대답은 되풀이되었다.


‘우리만 알고 넘어갈 일은 아니니 드라마 제작사와 논의를 해봅시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CN 홍보팀이 지금보다 더 열일을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구원후의 결론은 역시 그답게 정면 돌파를 하자는 거였다.

원후와 소연이 자세를 바꾸며 기자들 쪽을 바라볼 때였다.


“저, 저기!”

“헉!”

“우왓!”

존재감이 뚜렷한 태서준이 포토존으로 성큼 들어서니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그의 깜짝 등장은 원후와 소연은 물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 그라서 더욱 부산스러워진 기자들은 엄소연을 중심으로 두 남자가 양쪽에 서 줄 것을 부탁하며 앞다투어 취재에 열을 올렸다.

기자의 요구대로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자 기자들의 반응은 한층 더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태 이사가 여긴 웬일이야?”

“그냥. 심심해서 한번 와봤지.”

“네 옷 꼴은 뭔데?”

“홀딱 벗고 온 것도 아닌데 새삼.”

턱시도가 아닌 하얀 셔츠에 검정 슬랙스. 서준의 옷차림은 격식에 전혀 맞지 않은 파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파티에 관심 없는 차림새에도 수려한 마스크와 무얼 입어도 완벽히 소화해내는 피지컬이 한몫했달까. 오늘 포토존을 스쳐 간 인물 중에 제일 눈부신 사람을 한 명만 꼽자면 단연코 태서준일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하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

이, 이게 무슨……!

전봇대 같은 두 남자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던 소연은 한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서준이 등 뒤쪽으로 제 손을 움켜잡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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