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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나, 설득당했나? (25/51)


25화. 나, 설득당했나?
2023.03.27.


하차하겠다는 엄소연과 계약서대로 하겠다는 태서준.

기존대로 밀고 가자는 윤지완 감독과 이미 세가 기울었음에도 여전히 편향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권은영 작가의 대립.

이 네 명의 팽팽한 기 싸움을 최종 봉합한 건 구원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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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배우 한 사람으로 망하기엔 윤 감독이 쓴 작품 서사가 무척 견고합니다. 권 작가의 시나리오 각본 역시 훌륭 그 자체라 감탄이 끊이지 않던데요. 더구나 태서준을 비롯해 베테랑 배우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해줄 것인데 왜 지레 쪽박을 운운하시는지. 그리고 엄소연 씨는 사실상 이 작품이 데뷔나 마찬가지니, 지금 공개한다고 대중을 속였다는 비판을 받지는 않을 겁니다. 세간에 알려져봤자 작은 이슈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깟 가십거리야 저와 CN 홍보팀이 나서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뭐, 그 이외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서슴지 마시고 말씀해보십시오.”

구 대표의 정리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수긍하는 눈빛을 건넬 뿐이었다.

드라마 방영까지 아직 시간이 있고, 탁월한 언론플레이와 유연한 여론몰이로 어떠한 공분도 잠식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능력자가 구원후 대표라는 건 자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으니까.

제가 쓴 시나리오의 호평에 마음이 동한 것인지, 이제껏 각만 세우던 권 작가도 절로 올라가는 입매를 잡아 물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 입술에서 반대의 목소리는 거둬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 서로 흥하자고 하는 일.

권은영 작가를 설득한 윤지완 감독이 결론을 말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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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우리 드라마 제작팀은 태서준 씨를 절대로 놓칠 수 없고, 엄소연 씨가 맡은 배역 역시 교체는 없습니다. 또한, 오늘 여기에서 오간 대화는 당분간 우리만 아는 거로 합시다.”

최고의 배우와 시한폭탄 같은 신인 배우를 모두 끌어안고 가겠다는 결정을 내린 윤 감독은 이렇다 할 감정 없이 매우 사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의 입술엔 어렴풋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엄소연을 처음 보았던 그때가 새삼 떠오른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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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물러간 룸엔 서준과 소연, 단둘뿐이었다.

슬쩍 올렸다 내리는 시선으로 예전과 똑같은 객실 구조를 찬찬히 엮어 바라본 소연은 긴장감에 자꾸 마르는 입술을 서준이 방금 내어준 따뜻한 차에 적셨다.

서준도 찻잔을 들며 소연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바탕 곤욕을 치른 낯빛이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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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엄소연 씨는 끝까지 안 하시겠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었는데도 소연은 줄곧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 얼굴에 하차할 생각이 역력히 쓰여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다들 이 룸에서 나갈 때 서준이 엄소연만 남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나 그것이 그럴싸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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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아까 제 편을 들어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참견이셨어요. 제 일이잖아요. 따지는 것도 제가 해야 했어요. 이젠 이런 일도 없겠지만, 앞으론 그러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소연은 자신 때문에 괜히 서준까지 안 좋은 소문에 휘말리거나 좋은 이미지가 실추되진 않을까를 걱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는 서준이 제 일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못 박아 말한 거였다.

평소 말수가 적은 여자였다. 제 앞에서 조잘조잘 잘도 말하는 데다가, 따끔한 충고도 서슴지 않는 그녀가 재밌었을까. 소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서준의 눈매가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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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출산하는 건 당연히 축복받아야 할 일이지만 결혼 안 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마땅히 지탄받아야 한다? 헤픈 여자다? 아니, 그게 아니지. 여자니까 그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라고 권 작가의 이상한 논리를 바로잡아 준 것뿐, 난 역성을 든 적이 없는데. 엄소연 씨가 오해했나 보네.”

출산, 결혼, 여자, 아이.

그 단어부터 해서 제 상황을 나열한 구절이 어디 태서준 입에서 나올 법한 것들인가.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 얘기가 전부 저를 위한 말이라는 걸 모를 수 없는 것인데, 이 남자는 전혀 아닌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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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울고 싶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참아내느라 성대가 잠겨버린 소연은 흔들리는 눈동자에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서준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오늘보다 모진 상황에서도 꿋꿋이,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없을 만큼 독하게 버텼지만, 태서준한테는 그게 잘 안 된다. 그 와중에 오기를 꺼낸 소연의 목소리가 격앙된 채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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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감독님 작품에 저를 꽂아준 것도 그래요. 힘써준 이사님께 제가 고개 숙여 깊이 감사라도 드릴 줄 아셨나요? 천만에요! 쉽게 얻는 것일수록 더 큰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걸, 전 그냥도 아니고 아주 뼈저리게 배웠답니다. 그런데 끼워 팔려간 줄도 모르고 전……. 사람 바보 되는 거 한순간이네요.”

아무리 호의라도 값싼 동정심이겠지 따로 뭐가 있을까.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소연은 톡 쏘아붙이듯 서준을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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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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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말라도 아무 물이나 마실 순 없죠. 그 물을 빼앗긴 누군가는 분명 나 때문에 갈증에 허덕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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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을 단정히 다문 서준이 픽 웃었다.

세상의 셈법을 모르는 것인지,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것인지. 아무튼, 이런 반응이 올 것 같아 부러 말하지 않았던 건데, 그 예상이 빗나가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 여자는 이토록 억세졌을까.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어떻든 혼자 낳은 아이를 부모님께 맡겼다면 아이 아빠와 좋게 헤어지진 않았을 텐데, 어떤 쓰레기 같은 개자식이 제 아이와 여자를…….

그래도 굴곡진 시간을 건넌 것치곤 여전히 무구하고 앳된 얼굴이지 않나.

네게 첫 남자는 나였고, 나 역시 첫 여자 같았던 너였다. 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 그렇게나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른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그 명확한 사실 앞에 굳이 다른 이유를 붙이는 건 무의미했다

이제 와 솔직해지건대…….

내 일생에 처음, 첫눈에 반했대도 틀린 소리는 아닐 거다.

호텔 바에서 맨 처음 맞닥뜨린 순간부터 내 본능은 너만을 원했으니까.

그 갈망이 너를 속이고 나조차 속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조심스럽게 반짝이는 네 눈동자는 어찌나 맑고 아름답던지…….

그래서였나 보다.

네게 관심 없는 척하며 내 영역으로 유인한 것도 나. 웃기지도 않을 보상 따위를 입에 담으며 간다는 널 붙잡은 것도 분명 나.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너를 침대로 끌어들인 것마저 나였다.

눈 오던 그 밤, 느닷없는 갈망에 휘둘린 내가 널 꼬신 거란 말이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실연에 고뇌하는 남자의 가면까지 쓰고서 말이야.

그런데 넌 내 속에 들어와 가시라도 되었나. 너만 떠올리면 심장이 간질간질 따끔거리더니 이젠 말도 못 하게 욱신욱신하거든.

잠시 상념에 잠겼던 서준이 흐릿한 실소를 입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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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그랬는지 말해줄까. 무명은 너무 길어도 못 쓰거든. 특히 엄소연 씨는 그냥 썩히기에 아까울 만큼 예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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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가 미쳤다!

그의 목소리가 왜 이리 달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소연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듯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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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하나만 물어볼까? 왜 엄소연은 이 절호의 기회를 버리려고만 하는 거지? 양심에 찔려서? 시작이 깔끔하지 못해서?”

서준의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 잇새에 눌렸던 입술을 스르르 놓은 소연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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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다들 제 의사는 묻지 않고 자신들 뜻대로 밀어붙였어요. 그런데 전 가만있었죠. 말로는 그만둔다면서 욕심까지 버리진 못하겠더라고요. 하지만 이사님이 주신 특혜가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데, 끝까지 제 양심을 속일 순 없잖아요.”

너무 솔직히 말해버린 탓이었다. 새하얬던 소연의 얼굴이 차츰 불그스름해졌다.

꽤 일리 있는 양심선언인 듯도 했으나 서준의 생각은 소연과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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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치 않다? 그러면 내가 비정상이라는 거네. 좋아, 그건 인정하지.”

너로 꽉 찬 머리와 가슴이 이리도 미쳐 날뛰는데 내가 뭔들 정상일까. 서준은 좀 더 깊어진 눈빛으로 소연을 직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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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로 경쟁하는 수많은 배우 중에 몇이나 성공이란 걸 거머쥘 수 있을까? 또, 정상으로 가는 그 길이 일생에 몇 번이나 열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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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소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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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긴 아네. 내가 엄소연 씨한테 말하고 싶은 건 누군가가 떡을 손에 쥐여주게 만드는 것도 본인 능력이라는 거야. 그런데 험한 연예계 바닥에서 행운아나 괜찮은 조력자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그건 엄소연 씨도 잘 알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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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다. 왜 모르겠나.

일일이 대응을 안 해서 그렇지, 작년 한 해만 해도 은밀한 제의를 해오는 이상한 브로커가 부지기수였다. 그분이 모든 편의를 다 봐줄 것이니 꿈을 맘껏 펼쳐보라며 하나 같이 감언이설을 무기처럼 장착하고서 말이다.

그럴싸한 유혹과 꿈을 맞바꾸는 행위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름없음을, 그 끝이 행복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연은 배우로서 자신의 성장이 더디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에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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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연은 가진 걸 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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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버린 적도 없지만 버릴 것도 없어요. 이번 일도 제 것이 아닌 걸 탐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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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소연이 포기하면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는 건데. 아깝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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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탐할 걸 던져 준 사람이 알아서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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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말하나 본데, 그래도 나라서 받아들이기에 조금은 낫지 않나.”

소연은 불현듯 오래전 그것이 떠올랐다. 태서준이 뭐든 다 해주겠다고 말했던 그 거래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을 들추면 저만 불리해질 듯한 예감이 강하게 든 그녀는 짐짓 머리를 갸웃하며 잘 모르겠다는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여우인가 곰인가. 그것이 헷갈렸으나 뭔들 어떨까. 서준은 힘을 뺀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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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온 기회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 왔을 때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 내공이 하나둘 쌓여 자존심은 물론 나와 내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거니까. 굴러들어온 복도 꽉 잡지 않으면 금세 달아나버려. 그런 의미로 엄소연 씨는 가지려는 노력은 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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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안 했을까요.”

이 순간도 단 하나의 보물을 잃을까, 못 지킬까 조마조마해 죽겠는데.

머릿속 생각마저 들킬까 소연이 눈매를 또렷이 하자 픽, 웃어버린 서준이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느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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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노력이라도 해봤으면 이번엔 더 잘할 수 있겠네. 엄소연 씨, 엄마라며. 그렇다면 아이를 위해서라도 뭐든 달려들어야지. 나쁜 짓만 아니면. 프로를 원하는 관객들이 과연 어영부영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싶어 할까? 반면 하잖은 배역이라도 혼신을 쏟아붓는 배우에겐 어김없이 박수를 보내지.”

남이 준 기회는 잡지 않겠다는 소연에게 태서준은 말해주고 싶었다. 시작의 기회는 자신이 준 것일지언정 그 이후는 오로지 소연의 몫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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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기회를 줘도 스스로 잘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거지. 내가 이렇게까지 말해줬으면 이젠 잘해볼 용기가 날 만도 할 텐데. 안 그래?”

천운을 버릴 텐가, 꽉 잡고 위로 올라갈 텐가.

조금 전만 해도 그 두 가지 중 전자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서준의 울림 좋은 목소리와 화려한 언변에 홀려버린 그녀의 마음은 어느 틈에 그가 당기는 쪽으로 확 기울어져 있었다.

소연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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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남자는 말을 잘해도 너무 잘한다.

듣다 보니 잘 해내는 것 말곤 답도 없을 것 같고.

나, 설득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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