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분명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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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분명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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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분명 연인이었다
2023.04.03.
태서준은 어떠한 위협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느른한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유려하고 건장한 신체에서 뿜어지는 분위기 역시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소연에게 꽂히는 시선만큼은 뭐든 얼리고 삼켜버릴 만큼 차고 강렬했다.
한겨울도 아닌 봄이건만, 더욱이 여긴 실내이지 않은가. 그러니 분명했다. 촉각에 감겨오는 이 한기는 이 남자 때문이다.
덫에 걸려 잡아먹힐 처지에 놓인 어린 짐승이 이러하려나. 압도하는 그의 눈빛에 온몸이 마비된 것 같은 소연은 목까지 차오른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사랑은 싹트고 진창에도 꽃은 피는 법. 소연의 복잡한 심경이 딱 그러했다. 가슴팍이 찢길 것처럼 두근대는데, 그 심장을 더 날뛰게 하는 건 지독한 설렘이었으니까.
정신 차려, 엄소연!
한동안 혼란스러워하던 소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다리를 곧게 폈다.
“생각은 해볼게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성의 끈을 가까스로 붙잡은 소연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객실 현관 쪽으로 발을 내뻗었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태서준에게서 최대한 멀리, 아주 멀리 도망쳐야 한다.
유혹하는 태서준보다 그에게 사정없이 빨려드는 내가 더 위험하니까.
그 생각뿐인 소연은 바삐 움직이는 다리보다 마음이 더 조급했다. 그리고 일은 한순간에 벌어졌다.
철퍼덕!
“앗!”
몇 발짝 가지도 못한 소연의 몸이 일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좀 길다 싶은 드레스 아랫단이 계속 발치에 걸리더라니, 하필 다급한 이 순간 사달이 난 거였다.
“저런!”
예상치 못한 전개에 서준이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소연에게 다가왔다.
“…….”
후, 미친다, 진짜!
소연은 벌떡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카펫 덕에 다치진 않으나 낙하하는 충격에 드레스 등이 찢어져 툭 터져버렸다. 넘어질 때 소파 쪽으로 날아간 한쪽 구두는 덤이었다. 혼자 난리 치다 이 꼴을 보인 거니 그 창피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구두를 어느 틈에 집어 온 서준의 시선이 그녀의 등에 닿아 있었다.
“조심 좀 하지. 누가 잡아먹는대?”
서준의 손에 소연은 간단히 일으켜졌다.
휙…….
“내놔요, 빨리!”
한 손으로 드레스 가슴선을 움켜쥔 소연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손에 들린 구두를 냉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긴 팔을 위로 올린 서준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이건 누가 보아도 물에 빠진 걸 건져준 사람에게 보따리를 내놓으라 하는 격 아닌가.
삐딱해진 미소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서준은 그녀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능력껏 가져가 보시든가. 애처럼 떼만 쓰지 말고.”
“……!”
이 심각한 상황에 장난이라니!
놓으면 흘러내릴 것 같은 옷의 가슴께를 꽉 부여잡은 여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약이 바짝 오른 거였다.
“이, 이리 줘요! 어서!”
손을 번쩍 들어 구두를 잡아보려 했지만, 역시 상당한 키 차이가 걸림돌이었다. 그는 높은 곳, 저는 낮은 곳에 있는 현실처럼 말이다. 그 때문에 기를 쓰고 깡충대며 발돋움하던 그녀의 중심이 삽시간에 앞으로 쏠렸다.
“……!”
그 찰나에 재빠르게 움직인 서준의 팔이 소연의 가는 허리를 힘껏 감아 당겼다.
“이것까지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나쁘진 않네.”
또 넘어지려는 그녀를 별생각 없이 잡아 준 것뿐이다. 불순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냘픈 몸에 닿은 서준의 손은 무척 뜨거웠다.
굳이 머리를 빌리지 않아도 몸이 아는 남자의 본능.
이 여자를 더 깊이 안고 싶은 열망에 체온이 급상승한 거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품은 열기가 제 허리로 고스란히 스며든 소연은 괜스레 겁이 났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되뇌어졌다.
“진짜 왜 이래요? 내가 그렇게 미워요?”
“내가 말했을 텐데. 좋아한다고.”
“그 말을 저보고 믿으라고요? 이렇게 저를 괴롭히는 이사님인데요? 대체 제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이러…….”
왜 잘못한 게 없을까.
소연은 한순간 입을 닫아버렸다.
태서준의 아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심지어 아이 아빠가 죽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아이 존재를 아는 모두에게. 사실 자신은 엄청난 거짓말쟁이였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그건 모두 이로워지자고 한 일. 눈물을 머금고 해야만 했던 하얀 거짓말이기에 죄책감 따윈 과거에 묻기로 했다.
“설사 오래전에 제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이사님이 화났다 치더라도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인들 남았겠어요? 단 하룻밤이었어요! 이미 수년이 지난 일이고요! 이사님과 저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고요!”
“…….”
소연이 답답한 심정을 구구절절 토로하는 동안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서준은 몸을 낮춰 자그마한 발에 구두를 신겼다.
“……!”
뜻하지 않은 서준의 행동에 일순 소연의 몸이 빳빳이 굳었다.
“…….”
과연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을까? 내가 괜히 엄소연에게 이러는 걸까?
‘이 발로 어떻게 걸어 다니는 겁니까.’
‘잘 다니는 거 봤으면서. 히힛, 하지 마요!’
까르르 웃던 네 맑은 목소리……그 밤, 우리는 분명 연인이었다. 너와 내가 함께 웃었던 그 순간만큼은.
서준은 그때를 떠올리며 그러쥔 소연의 발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아니, 왜…….”
방금까지 저를 냉정하게 몰아붙이던 사람답지 않은 자상한 손길이었다.
그의 따스한 움직임에 기분이 이상해진 소연은 그 자리에 붙박여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긴 다리를 곧게 펴 일어난 서준이 소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줄까.”
“뭘요.”
소연이 얕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준은 고요한 눈빛을 그녀의 찰랑이는 시선에 얽으며 말했다.
“예뻐서. 엄소연이 정말 예뻐 보여서.”
네가 어떤 여자든,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라면 무엇이든 다…….
“다른 남자가 널 바라보는 것도 싫은 만큼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 그런 말을……그런 말을 막, 아무렇지 않게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럼, 울면서 할까?”
“하……그 얘기가 아니라…….”
난 어떡하냔 말이죠. 안 그래도 당신에게 자꾸 다가가고 싶고, 기대고 싶은 나는 대체 어쩌라고요! 지금 당장 아플 만큼 쿵쾅쿵쾅 뛰어대는 내 심장은, 터져버릴 것 같은 내 가슴은 어쩔 거냐고요!
그 말들을 슬픈 눈동자로 쏟아내자 서준은 눈시울이 발그레한 소연의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왜. 이제야 좀 옛날 생각이 떠올라?”
“먼지 한 톨 만한 추억일 텐데요.”
“또 잡아떼네.”
“…….”
그러니까, 왜……. 왜 자꾸 흔드는 건데요.
당신과 내가 흘려보낸 그 시간이 얼마인데…….
속눈썹이 떨리긴 했으나 그것까지 신경 쓸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서준의 얼굴을 촘촘히 살피는 갈색 눈동자의 결이 아련함을 한껏 내비쳤다. 마음속 깊숙이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그 무엇을 간절히 바라듯이.
우주의 별을 담은 듯한 커다란 주위가 장밋빛이었다.
넘어지면서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이 하얀 목선과 어깨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을 귀 뒤로 넘겨주는 서준의 손끝이 사뭇 애틋하게 느껴진 소연의 얼굴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으로 기울었다.
차디차게, 짓궂게, 따사롭게,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모습 중 하나부터 열까지 어떤 게 진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남자의 속마음을 안다 한들 소연에겐 무의미했다.
그에게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현재와 무관할 수 없는 과거와 말할 수도, 들어서도 안 될 일 앞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그녀였으니.
“갈게요.”
서준의 팔에서 벗어난 소연이 힘없는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였다.
“가지 마.”
“!”
돌아선 소연의 등을 서준이 와락 껴안았다.
그래도 가야 하는 소연이 제 몸을 감싼 서준을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가슴께를 단단히 옭아맨 남자의 힘은 쉬이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가지 말라고.”
“…….”
뒤로 돌아선 소연의 두 뺨 위로 갑자기 차오른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서준은 더 깊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고 가. 같이 있자.”
“저 아직 대답 안 했는데, 벌써 흔들기인가요?”
“그럴지도.”
“오늘은 안 돼요. 이사님 제안, 내일까지 답하라면서요. 생각할 시간은 주셔야죠.”
소연이 딱 잘라 말하자 서준이 피식, 웃었다.
말하는 입술 모양이 귀여워서. 애수에 찬 눈빛은 그게 아니면서 좌우로 도리질하는 게 여간 앙큼한 게 아니어서. 이 여자한테만큼은 독하게 굴 수 없는 자신이 저 같진 않지만, 그게 썩 나쁘지 않아서였다.
“모르는 모양인데, 이 꼴로 여길 나가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훑어내린 서준의 눈길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엄소연도 곤란하겠지만, 난 뭐가 될까.”
“정 거슬리면 외투 하나만 빌려주시든가요.”
소연도 알긴 했다. 사람들이 찢어진 드레스와 흐트러진 제 모습을 보면 험한 일을 당한 것으로 여길 소지가 다분하다는 걸.
“그러지 말고 그냥 있어. 약속해. 절대 안 건드려.”
“손만 잡고 잔다고도 해보시죠, 왜.”
“그러면 다시 말할게. 안는 것까진 하고 싶을 것 같아.”
“…….”
하, 내가 못 살아…….
악마의 유혹이 이러할까. 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낮게 속삭이니 소연은 맥없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도톰한 입술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입 모양을 화난 걸로 해석한 서준은 다시 고쳐 말했다.
“그래도 손만 잡고 잘게.”
“그렇게 한들 제 기분이 좋겠어요? 나도 여잔데, 남자한테 무시당하는 거잖……!”
웁,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솔직한 마음이 부지불식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한번 내뱉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제 맘대로 움직인 입술을 얼른 말아 문 소연은 낯빛을 붉혔다.
“무시가 아니라 참는 거야.”
피식, 웃어버린 입매로 서준이 말하자 소연은 제 실수를 만회하듯 따져 물었다.
“태서준 씨! 당신은 누군가요? 제가 알던 그분은 어디로 갔을까요?”
“여태 이사님만 찾더니 이제야 제대로 된 호칭을 쓰네.”
“기분 나빠서 이름을 불렀다는 건 생각 못 하시죠?”
“그러면 계속 기분 나쁘게 해야겠네. 고마워. 좋은 방법 알려줘서.”
“아, 진짜……!”
입씨름 같은 두 사람의 대화는 한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고 물리는 두 시선은 한치에 물러섬이 없었다.
소연이 눈꼬리를 휘며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현우도 이처럼 막무가내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른인 태서준이 자꾸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니 두 부자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진 소연은 순하디순한 현우가 제 아빠처럼 굴면 정말 당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삐이…….
실내를 경쾌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소연의 눈이 객실 문 쪽으로 황급히 돌려졌다.
“누구, 올 사람 있었어요?”
“없는데.”
한쪽 눈썹을 둥글게 말아 올린 서준은 곧장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어머니네.”
“이, 이사님 어, 어머니요?”
“이모님도 같이 오셨어.”
태서준도 벅찬데 그의 어머니와 이모님까지 맞닥뜨리게 생겼다.
서준과 더불어 그의 어머니 앞에선 저는 어쩔 수 없는 죄인 아닌가.
뜨끔한 심장이 지하까지 곤두박질친 소연은 갑작스러운 당혹감에 사로잡혀 허둥지둥 숨을 곳부터 찾았다.
“나, 어떡하죠?”
“기다려 봐.”
서준은 우선 드레스룸에서 가져온 자신의 겉옷으로 소연의 몸을 폭 덮으며 망가진 드레스를 가려주었다. 아이가 아빠 옷을 뒤집어쓴 것처럼 그녀에겐 너무도 큰 코트였다. 그러나 서준의 입꼬리는 피식거리며 시원하게 올라붙었다.
“나름 괜찮네.”
모습이야 어떻든 제 옷을 걸친 엄소연이 이제껏 본 중 가장 마음에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