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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당신을 이용할지도 (29/51)


29화. 당신을 이용할지도
2023.04.10.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집 안 곳곳이 깔끔했다.

부모님은 캐나다, 일찌감치 독립한 언니 둘은 해외와 제주도에. 그 사실은 오래전 본인에게 들어 서준도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방의 수는 대략 여섯, 오픈된 주방과 거실이 큰 것이 대가족이 살아도 좁지 않을 공간이다.

서준은 이 집을 짧게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엄소연의 생활 환경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아무 일 없는 것 같고…….

그런데 나는 뭐가 급해 정신없이 이 집까지 올라왔을까. 석연치 않은 건 전화로 확인하면 그만인 것을.

서준은 요즘 들어 자꾸만 성급해지는 제 행동이 다소 짜증스러웠다.

태서준의 차가 아파트 단지로 진입할 당시 차 뒷좌석의 서준은 소연의 집 쪽을 올려다보는 한 남자를 발견했고, 바이크 옷차림에 헬멧을 썼지만 서 있는 자세만 봐도 딱 그놈. 분명 조인하였다.

안 그래도 연습실을 기웃거리던 행실이 영 찜찜하던 차였는데, 엄소연 주변을 계속 맴돈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냥 지나칠 게 아니라는 생각에 서준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조인하가 있던 자리에 다시 가 보았지만 이미 그는 없었다.

뭔가 께름칙한 데다 엘리베이터가 위층에 멈춰 도통 내려오지 않자 서준은 전속력으로 15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몇 호인지는 일전에 확인해 두어 그의 빠른 걸음은 더욱 거침없었다.

엄소연 집 앞에 다다른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주먹 하나는 족히 들어갈 정도로 열려 있는 현관문이었다.

외부 도어클로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거지만, 왜 고장 난 건지는.

서준이 의외의 광경을 보게 된 건 현관과 중문을 통과해 거실 초입까지 들어선 순간이었다.

아무리 문이 열렸어도 남의 집에 무턱대고 들어온 것이니 인기척을 내야겠지만 엄소연의 물먹은 목소리가 또렷이 들린 서준은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왜 내 기분이 이상했을까. 명치는 왜 저릿저릿했을까.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아이 음성이 대체 뭐라고, 멀리 있는 아들과 통화하는 엄소연이 울먹이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심장 쿡 아려오는 것이, 뾰족한 무언가가 가슴 깊이 파고들어 단단히 박힌 듯도 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아직도 선명한 서준은 시니컬한 표정에 헛웃음을 덧대며 말했다.


“조인하를 봤어. 이 건물 앞에서 엄소연 씨 집을 올려다보더라고.”

“그럴 리가요.”

주방에서 내온 레몬차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린 소연이 거실 바닥에 다소곳이 앉으며 대꾸했다.

반면 소파를 독차지한 서준은 집주인보다 더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제 옆에 앉지 않는 그녀가 내심 못마땅해 눈매를 잠시 찡그리기도 했지만, 소연은 짐짓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근방에 지인이 사나 보죠. 조 선배는 저의 집을 몰라요. 그런 사람 아니니 괜히 의심하지 말아요.”

소연은 이번에도 조인하를 두둔했다.

그가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주는 것임을, 그의 염려를 몇 마디의 말로 일축해버린 자신의 태도가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면서 말이다.


 
어젯밤 늦게 조인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힐난조로 아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것부터 저를 불행 여자로 취급하며 배신감을 입에 담는 조 선배의 태도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누구에게 들었건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진실이니 그 여파를 감당하는 것 역시 저여야 하겠지만, 조인하에게까지 비난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더 이상의 대화도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소연은 별다른 말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인하는 몇 번이고 다시 전화했고, 소연은 그래서 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화가 나 찾아온 걸 수도 있었다.

소연은 그 일을 태서준에게 선뜻 이야기할 순 없었다. 저와 가깝게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게서 비롯된 문제이니만큼 잘 처리하는 것도 제 몫이니까.

그런 엄소연의 생각을 서준이 왜 모르겠나. 미련할 만큼 유독 고집스러운 그녀를 유심히 지켜봐 온 그인데.


“미리 조심하라는 얘기야.”

서준이 조용히 내쉬는 한숨에 나직한 음성을 섞자 소연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붙었다.


“새겨들을게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지만, 소연의 여린 손끝은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제껏 그에게 보인 태도와 모순되긴 했으나 저를 걱정해주는 태서준이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져서, 그와 마주 보는 이 순간이 그저 행복해서였다.


“그런데…… 아까 다 들었어요?”

“글쎄. 옹알대는 아이 목소리가 무척 귀여웠지. 오로지 자식만을 걱정하시는 어머님 음성은 아주 애틋하시던데, 꿋꿋한 엄소연은 울음을 잘 참더라.”

“…….”

아, 그랬구나. 정말 다 들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소연은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어제 대답하지 못한 것을 이젠 말해야 하는데 아직 그 타이밍을 찾지 못한 눈동자는 서준을 뺀 다른 곳을 한참 맴돌았다.

그런데 소연의 그 맘을 읽기라도 한 건지 서준이 본론을 꺼냈다.


“난 좀 설레던데.”

“뭐가…….”

“엄소연이 무슨 대답을 할지, 어젯밤 내내 무척 궁금했거든.”

“아…….”

이미 마음을 굳혔으나 소연의 머릿속은 또 다른 갈등이 휘몰아쳤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태서준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기는 한가?

하지만 소연은 이미 생겨버린 지독한 욕심을 멈출 수 없었다.


“나, 당신을 이용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돼요?”

“…….”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 백지수표보다 더한 거라도 내놓으라는 뜻인가?

진한 눈썹을 끌어올린 서준이 잘생긴 입술로 피식, 웃었다.

어쩌면 순진한 양의 탈을 쓴, 악녀보다 더 악독한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엄소연 역시 서준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렇게 해. 얼마든지 당해줄 자신 있으니까.”

“그렇다면 좋아요. 이사님 말대로 할게요.”

이용이란 뜻이 나쁘다는 건 안다. 그럼에도 미리 허락을 구한 건 만약을 위한 보증수표였다. 동의는 했으나 한 발 뺄 여지.

혹여 그의 유혹에 흔들린 자신이 잠시 충동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그때 쓸 방패는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일방적인 건 안 돼요. 제가 정말 아니라고 하면 멈춰주실 수 있죠?”

“물론이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즉시 연인이 되거나 끝내자는 조건.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소연이 레몬차를 한 모금 삼켰다

서준은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옷과 머리 장식이 온통 노란빛인 소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 남자 취향도 그쪽인가?”

“네? 남자라니요?”

“엄소연 씨 아들 말이야.”

“…….”

서준이 말하자 소연은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작아도 너무 작은 어린아이를 남자라고 칭하고 취향까지 물으니, 그게 다소 어색해서였다.


“아기 때부터 노란색만 보면 잘 웃더니, 클수록 유난히 이 색에 집착하더라고요.”

“그래? 나도 어릴 적엔 노란색만 보면 그랬는데.”

“!”

헉! 색 좋아하는 것도 유전이었어? 방심하다 허를 찔린 소연은 당황한 기색을 재빨리 감추며 아무 말이나 마구 지껄였다.


“시, 식사는 하셨어요? 점심 말이에요. 그, 그리고 거실에 태산 같은 남자가 떡하니 있으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다음부터는 전화라도 미리 하고 오시라고요.”

“억울하면 엄소연 씨도 해. 내 집에 막 쳐들어오라고. 그러면 공평하잖아.”

“…….”

부지불식 그러겠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뻔한 소연은 반쯤 열린 입술을 얼른 닫아 잇새로 잡아 물었다. 그 탓에 양쪽 뺨에 우물이 쏙 파였다.

그 귀여운 보조개에 시선이 꽂은 서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가면 어때?”

“제, 제가 왜 이사님 집에…….”

“아니, 거기 말고.”

서준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소연에게 내밀었다.


“난 여기 가자고 하는 건데.”

“……?”

하늘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배합된 직사각형 종이봉투는 슬쩍 봐도 항공권임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받아든 소연이 안의 내용물에 적힌 글씨를 확인했다.


“이, 이건 스페인행 티켓이잖아요?”

“오늘 저녁 비행기야. 내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엄소연도 같이 가야 하고.”

“오, 오늘이요?”

“바로 지금.”

갑작스럽게 출국하자는 서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소연의 눈이 최대치로 확장됐다.

***

고정 수입이 없는 소연은 부족한 생활비를 엄마가 준 카드로 충당했다.

그러다 드라마에 캐스팅되며 통장에 꽂힌 돈이 이제껏 벌어본 중 제일 큰 거금이었다. 앞으로 꾸준히 활동하면 수입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캐나다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는 4살 아들을 자력으로 떳떳하게 키우기도 수월할 것을 잘 알기에, 또 그것이 이번 드라마를 반드시 잘 해내겠다고 결심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소연은 그런 이유로 포기보다 제가 맡은 역할에 모든 혼신을 쏟아붓기로 마음먹었다.

태서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한 번 더 엮인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지레 걱정하고 무서워하기보다 제 사랑과 부딪혀 미래를 타진하고, 정말 그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책임질 것을 책임지기로.

그러나 아이 일을 숨긴 잘못은 별개의 문제였다. 언젠간 태서준에게 깊이 사죄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은 죄가 크다 한들 소연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아이가 생긴 걸 처음 알았을 땐 태서준을 만날 기회가 녹록지 않았다. 더구나 그 시기에 그는 입대하지 않았나. 그리고 3년이 넘어버린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동안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입도 굳게 잠겨버렸다.

또한, 뒤늦게 진실을 알려 봤자 제일 곤란할 사람은 태서준 아니겠나. 아이의 친부가 누군지 말해준다 해도 그는 무척 난감해할지도 모른다.

그 까닭에 사실을 알리는 게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로써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태서준과 함께할 명분까지 꼼꼼히 챙긴 소연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질질 끌고 방에서 나왔다.

때마침 자신의 집에 다녀온 도순이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헉!”

이게 무슨 일인가! 이사님이 왜 여기에……!

기겁하듯 움직임을 멈춘 도순이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화보 속 스틸컷처럼 근사한 자태로 소파에 앉아 있는 태서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놀랐는지 도순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였다.

본격적인 현지촬영은 일주일 후부터지만 드라마제작팀의 반은 이미 현지로 떠난 터. 시차 적응과 컨디션 조절을 핑계 삼은 소연은 오늘 스페인으로 출발하는 태서준을 따라가기로 한 이유를 도순에게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렇게 됐어. 마침 오늘 뜨는 특별기에 한 자리가 남는다는데 놓치기 아깝잖아. 어차피 가야 하는 거 이사님과 먼저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간다고?”

“실은 갑자기가 아니라 이사님이 전에 말씀해주셨는데, 내가 깜빡한 거야.”

훗…….

귀에 달콤하게 스미는 거짓말이랄까. 아주 자연스럽고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소연이 내심 기막힌 서준은 절로 나오는 실소를 참느라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아직도 얼떨떨한 도순이 눈을 끔뻑거리며 서준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는 나중에 촬영 팀과 합류해서 넘어가고, 둘은 지금 스페인으로 떠난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여도순 씨.”

“어쩐지 짐을 미리 챙겨놓고 싶더라니, 이런 일이 생겼네요.”

조금 전 까무러치게 놀라 했던 자신을 까마득히 잊은 듯 도순은 요조숙녀처럼 조신하게 말했다.


“소연이가 생긴 거랑 다르게 엉뚱한 짓을 잘해요. 그러니 진짜 진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갈 때까지 우리 소연이 별 탈 없게만 보살펴 주시면 정말 그 은혜 평생을 두고두고 감사드리겠습니다, 이사님.”

“물론입니다.”

“…….”

엉뚱한 건 나보다 저가 더 하면서, 뭐래?

친구를 속인 죄책감이 들긴 했으나 소연은 전에 없던 도순의 진지한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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