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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태서준의 마법 (30/51)


30화. 태서준의 마법
2023.04.14.


인천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스페인의 남단 말라가공항에 도착했다.

무려 15시간의 비행을 끝낸 네 사람은 곧장 공항을 벗어나 리무진을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그림자처럼 태서준을 따르는 박성호와 봉 실장은 앞쪽 운전석과 보조석에, 파티션으로 분리된 뒤쪽 공간에는 서준과 소연이 나란히 앉았다.

지중해를 품은 소박한 마을. 결혼할 상대가 없어도 한 번쯤은 신혼여행지로 꿈꾸어 보았을 아름다운 이곳. 사진으로만 보았던 목가적인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해안가 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을 보고 있자니 타국이란 게 절로 실감 난 소연의 입술 사이로 와, 하는 감탄사가 연실 튀어나왔다.

어제만 해도 빌딩 숲만 보이는 회색 도시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파라다이스라고 해도 무방할 이상한 나라로 왔다. 하루의 절반, 그 이상의 시간을 들였음에도 소연은 한순간에 이곳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었다. 태서준의 마법에 걸려들어서 말이다.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면 태서준은 시계 토끼인가?

에이, 아무리 상상이래도 토끼는 너무했…….

풉!

뚱딴지같은 생각을 작은 미소로 희석한 소연은 말라가 풍경에 다시 푹 빠져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변화무쌍한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나 재밌었을까. 서준은 아예 대놓고 소연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주 넋을 잃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엷게 화장한 고운 얼굴과 작고 도톰한 입술이 실룩샐룩 움직일 때마다 피식피식 따라 웃는 것이.

조각 같은 얼굴이 제 옆에 바짝 붙어 있는데, 그걸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살갗을 핥는 듯한 그의 시선을 참다못한 소연이 서준이 앉은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


“왜 나만 계속 봐요?”

“여긴 늘 그대로여서 따분할 정도인데 엄소연은 볼수록 재밌거든.”

기습적인 질문에 적당한 답을 내어준 서준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곳에 자주 왔다는 말씀이신가요?”

“다들 알다시피 나라에 묶였던 몇 년 동안은 올 수 없었지.”

“아, 그러시구나…….”

소연은 문뜩 이 남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쓸쓸해지는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서걱거렸다.

고작 일로 만나는 사이에 알고 말고 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라며 허한 마음을 다독여봐도 소용없었다.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소연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제 감정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한국은 아직 봄인데 이곳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스페인의 하늘 정중앙에 놓일 무렵, 햇볕이 따갑게 내리비추는 길을 따라 달리던 차는 가로수 초막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정차했다.

중후한 엠블럼 장식이 달린 커다란 철문이 길을 막고 있어서였지만, 이내 그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며 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진입하자마자 드넓은 잔디밭과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소연의 시야에 다음으로 들어온 건 모래사장을 끼고 있는 바다와 웅장한 위엄을 갖춘 대저택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엔 감탄과 의아함이 동시에 차올랐다.


“설마, 우리가 묵을 곳이 여긴가요?”

“…….”

고풍스럽고 위풍당당한 외관만 보더라도 이 저택은 간단한 예약만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걸 모를 수 없는 소연이 허겁지겁 물으니 서준은 턱을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숙소로 간다고 하신 게, 이 으리으리한 저택을 말씀하신 거였어요?”

“왜, 숙소가 저택이라 놀랐어?”

“아니, 뭐.”

묵을 수 있는 곳을 숙소라 하지, 뭐라 할까. 라는 말을 서준이 덧붙이자 다소 당황스러워했던 소연도 더는 할 말이 없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리무진은 커다란 분수대를 돌아 현관과 바로 연결된 계단 앞에 정차했다.

차 밖으로 발을 내디디는 소연의 손을 서준이 잡아주었다. 공주님을 에스코트하는 듯한 그의 신사적인 태도에 그녀의 하얗던 두 뺨이 금세 분홍 장밋빛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은 저택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황혼의 노을빛을 내어주는 것조차 인색했다.

아내와 딸, 그 옛날 세 식구가 한집에 살았던 동네 어귀를 슬슬 걷던 느린 걸음이 어느덧 큰길로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종일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계속 쓰고 다니던 우산을 접어 지팡이처럼 손에 든 병환은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내리막길 삼거리 포장마차라고 했겠다? 저기가 맞는가 보네.”

약속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는 사이에 초록색 신호등이 켜졌다.

딸과 만나기로 한 포장마차는 차도와 바로 맞닿은 곳이었다. 인도에 몇 개 놓인 야외 테이블은 궂은 날씨 탓에 텅 비어 있었다.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한 유병환은 소주와 가락국수를 주문하고 도롯가 주변을 휘적휘적 둘러보았다.

흘러간 세월만큼 이곳도 많이 변했다. 예전엔 그저 야산일 뿐이었으나 그럴싸한 시민 휴식처로 탈바꿈한 옆쪽 공원만 해도 그러했으니.

포장마차 주인이 내어준 국수를 후루룩 먹어치우고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켠 유병환의 기분은 이 눅눅한 날씨에도 하늘을 날듯 좋기만 했다. 평생 벌어도 만져보지 못할 거금이 이제 곧 수중에 꽂힐 것인데 그럴 만도 했다.

허황한 꿈을 꾸며 헛되이 살진 않았다.

상식 밖의 비윤리적인 일을 행하긴 했으나 그 역시 할 수 있는 것이라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리고 운이 따라주지 않아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돼버렸으나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없는 놈이 잘 살려면 찬밥 더운밥을 가릴 순 없지 않은가 말이야.

그게 다 우리 가족 모두가 잘살자고 한 일인데 착한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배신하고 도망쳤다. 그래도 내 인생의 보험 같은 딸은 주고 갔으니 그리 미워할 필요는 없으려나.

그래, 다 잊자! 다 훌훌 털어버리자! 앞으로 더 잘 살면 될 일이고, 내 목표는 그뿐 아닌가.

한데, 사람들 눈을 의식하는 애가 웬일로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지? 하여튼 내 딸이지만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하아……. 그나저나 지금이 몇 시더라…….”

구시렁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툭 털어버린 유병환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1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하는 그는 막간을 이용해 핸드폰을 터치한 후 귀 쪽으로 가져다 댔다.


“날세, 고 사장.”

-어이쿠, 유 사장님 아닙니까. 목소리가 밝으신 걸 보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하, 있지, 있어! 일전에 급전 돌리느라 담보로 맡긴 내 빌딩 말일세. 내일 그 문서를 찾으러 갈 생각인데 말이지.”

-페이퍼컴퍼니 사기에 휘말려 개털 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아니었습니까?

“그 때문에 한참 골머리가 썩긴 했었지. 그래도 내가 누군가. 이제 다 해결됐으니 고 사장에게 전화를 넣은 거 아닌가. 그러니 내일은 사무실에서 꼼짝 말고 딱 기다리게. 내 모처럼 비싼 술도 살 테니.”

-저번에 따님 도움을 받았다고 하시더니, 또 그러신 겁니까?

“왜 아니겠나.”

딸 자랑에 앞서 유병환의 넓어진 콧구멍에서 뭉근한 김이 뿜어져 나왔다.


“하나 있는 딸년 성격이 매몰차긴 해도 제 아비 힘든 건 또 못 보거든.”

-요즘 보기 드문 효녀네요.

“어디 그뿐이겠나. 나를 닮아 미색도 출중해, 돈 버는 재주도 뛰어나서 그깟 건물 한 채 값이야 우습지. 사연이 있어 내 여태 함구했지만, 황 사장도 내 딸년이 누군지 알면 뒤로 안 넘어가곤 못 배길걸?”

-누군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그러면 정말 황 사장만 알고 있어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병환은 이제껏 딸의 정체를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다. 그것이 딸의 돈줄을 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말하고 싶은 충동을 더는 억누르지 못했다. 들떠버린 기분에 그만 휩쓸려버린 거였다.


“내, 작게 말할 테니 잘 들…….”

급기야 근질근질한 입술이 달싹이며 열릴 때였다.

부르르르릉, 촤악!


“에헤이……!”

배달용 오토바이가 웅덩이에 고인 물을 튀기며 유병환 앞을 지나쳤다.


“어, 어르신……!”

오토바이를 세우고 다가온 청년이 구정물에 얼룩진 병환의 정장 바지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그만 실수를…….”

“배달이 녹록한 일은 아니지. 난 괜찮으니 이만 가 보게.”

다른 때 같으면 성질 것 호통을 쳤을 것이지만, 손을 휘적휘적 내저어 청년을 그냥 보내버린 유병환은 통화를 계속 이어갔다. 오늘은 운수 나쁜 일조차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날이니까.


“황 사장. 듣고 있나?”

-어서 말씀해보시라니까요. 궁금해 죽겠습니다.

“그래그래, 내 특별히 황 사장한테만 말해주지. 내 딸이 누군가 하면 말이지, 유…….

하지만, 유병환은 이번에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부아아아앙…….

쾅! 콰당탕탕!

어디선가 속력으로 달려온 대형 화물차가 유병환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순식간에 덮쳤다.

딸의 이름을 다 말하기도 전에.

아니, 기다렸던 딸을 만나기도 전에.

***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일어나 보니 저녁이었다.

여러 개의 아르 누보 스타일 벽 등에서 번진 노란 불빛이 금색 부챗살처럼 고풍스러운 실내를 우아하게 밝히고 있었다.

천장의 아라베스크 문양과 화이트 몰딩 벽면 탓에 더 높고 크게 느껴지는 이 방은 저택 집사로 보이는 중년의 백인 신사가 내어준 방이었다.

19세기 스페인의 귀족이 썼을 법한 마호가니 원목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소연은 잠시 벽난로를 응시했다.

낮은 불볕더위, 밤은 서늘함이 느껴질 만큼 이 지역은 일교차가 컸다. 그걸 대변하듯 약하게 불씨만 남은 재의 뭉근한 열기가 실내 온도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이만 침대에서 내려온 소연은 제브러 패턴 러그를 맨발로 디뎌 아치형 창가로 다가섰다. 저택과 이어진 이국적인 건물과 탁 트인 자연경관이 말간 눈동자 속에 깊이 닿았다.

낮에 보았던 에메랄드빛 바다는 밤의 어둠을 삼킨 듯 짙은 코발트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소연은 창가에서 멀어져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금장으로 장식된 화장대 앞에 앉은 소연은 낯선 공간에 있는 자신을 다시금 실감했다.

욕실 안도 그렇고, 이 방에 곳곳에 비치된 물건마다 새겨진 중후한 휘장 문양이 주는 무게감만으로도 태서준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재력을 지닌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더구나 이 방으로 오기 전에 그가 말하지 않았나.

이 저택은 그의 가족이 휴양지 별장으로 쓰고 있는 곳이라고. 그러니 촬영 시작 전까지 이곳에서 맘 편히 있다가 일정에 맞춰 촬영지로 넘어가자고.

대체 그의 집안은 얼마나 부자이기에 해외에 이런 큰 저택까지 소유한 것일까.

그리고 난 정말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걸까.

무턱대고 태서준을 따라 한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소연은 이곳에 온 이후 저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태서준에게 거리감을 더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똑똑.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던 소연의 귀에 들린 건 가벼운 노크 소리였다.

곧이어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갈한 유니폼 차림의 백인 여자는 낮에 가방의 옷을 꺼내 드레스룸에 정리해주던 사용인이었다.


“Está preparada la cena.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어요.)”

그녀의 말투는 상냥했다. 스페인어는 잘 몰라도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소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용인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방에서 물러갔다.

다이닝룸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서 차를 마신 터라 어딘지 알고 있었다. 소연은 저녁 식사에 어울릴만한 옷이 필요했다. 그와 단둘이 식사하는 자리지만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추고 싶은 거였다.

한참 고민하다 소매가 긴 검은색 원피스를 골라 입고 방을 나서는 그녀의 손엔 대본이 들려 있었다.


‘입 맞추는 건 해야지.’


‘이, 입을 맞춰요?’


‘연습을 말한 건데, 엄소연 씨는 다른 걸 생각했나 봐?’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도 연습을…….’

 
에잇! 괜히 얼굴을 붉혀가지고…….

차를 마시고 일어설 무렵 서준과 했던 대화를 다시금 떠올린 소연은 손발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걸음마저 빨라진 그녀는 2층에서 아래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갔다. 하지만 중간에서부터 느려진 걸음이 이내 멈췄다.

등허리를 곧게 세운 소연은 고개를 약간 들어 올려 우러러보는 자세로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건 계단 벽면에 걸려 있는 가족 초상화였다.

그림 안에는 세 명의 소년과 부모님으로 짐작되는 어른 두 명이 있었다.


“……!”

순간,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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