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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모든 게 반칙인 남자 (31/51)


31화. 모든 게 반칙인 남자
2023.04.17.


긴 식탁 앞쪽에 마주한 두 사람은 가벼운 질문과 대답을 간간이 주고받으며 저녁 식사를 이어갔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봤는데, 계단 중간쯤에 걸린 초상화는 이사님과 가족들인가요?”

“아주 어릴 적에 그림인데 내 얼굴은 용케 알아봤나 봐?”

“그때나 지금이나 얼굴은 똑같던데,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한 거죠.”

“그래?”

“네.”

소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짧게 대꾸했다.

지금보다 태서준의 어릴 적 모습이 제 아들과 너무도 닮아 있어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얘기까지 입 밖으로 낼 순 없었으니까.


“잘 드시네. 입맛에 맞나 봐?”

접시 가장자리에 커트러리를 가지런히 내려놓은 서준은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크리스털 잔을 손에 들었다.


“비프스테이크는 호불호가 따로 없죠. 더욱이 전 고기라면 언제든 감사히 먹거든요.”

말로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오늘따라 더 맛있긴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녀 앞의 접시는 어느새 싹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선잠을 자고 먹는 것마저 신통치 않았다. 그 탓에 잠과 식욕, 이른바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본능이 동한 것이니.

다만, 곤히 잠든 저를 깨우지 말라는 도련님의 지시가 있었다며 저녁 식사 시간이 다소 늦춰진 이유를 다이닝룸 앞에서 마주친 백인 집사에게 전해 들은 소연은 괜스레 귀밑까지 발그레해졌다.

잠꾸러기에 이어 대식가의 면모를 서준에게 연타로 들킨 것만 같았으니까.

레드와인을 한 모금을 삼키는 것으로 민망함을 얼추 씻어낸 소연은 제게 집중된 화두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언제부턴가 말을 놓으시던데.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도 말이에요.”

“편한 게 좋아서. 왜, 내 말투가 거슬려?”

말할 때마다 서준의 목울대가 섹시하게 움직거렸다. 은연중 그곳에 정지돼 있던 제 시선을 나무라듯 소연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또 와인을 호로록 마셨다.

그러나 의지와 반대로 소연의 시선은 좀 더 아래로 흘러 더없이 남자다운 넓고 탄탄한 가슴팍에서 멈췄다.

서준은 멋스러운 화이트 실크 셔츠와 블랙 슬랙스 차림에 여유로운 자태마저 완벽했다. 더구나 단추 세 개를 풀어 놓은 셔츠 사이로 살짝 드러난 잘 짜여진 흉곽이 여간 유혹적인 게 아니었다.

이 남자는 알고나 있을까.

자신이 지금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나를 얼마나 현혹하고 있는지.

고혹적인 눈빛이 나를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으로 빨아당기고 있는지.

인간의 끝 없는 욕망이라는 게 이런 거였다. 부족한 수면을 충족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그 굶주림이 해소되니 이젠 다른 욕구가 모든 사고를 지배한다.

어렵사리 그의 가슴에 박힌 시선을 떼어낸 소연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거슬리다니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사실 좋긴 했다. 귓속을 파고드는 나직한 목소리. 우아한 말투와 선명한 입술에 감도는 의미 모를 미소까지 소연은 미치도록 좋았다.


“듣기 나쁘진 않네…….”

궁금해하는 동안은 나를 계속 떠올렸을 테니.

서준이 잔을 기울여 붉은 입술로 붉은 와인을 지그시 삼켰다.


 
백인 집사와 두 명의 사용인이 다이닝룸 안으로 들어왔다.

소연과 함께 식탁에서 일어난 서준은 맛있게 식사했다는 인사와 늦은 시간까지 수고했다는 말을 사용인들에게 건네며 이만 퇴근할 것을 지시했다.

그가 구사하는 스페인어는 현지인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유창했다. 하기야, 두뇌와 재력을 다 갖춘 사람이 못하는 게 무엇이 있겠나.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새삼 놀랄 필요도 없다.

서준은 사람들의 눈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지 보란 듯이 소연의 손을 덥석 잡고 다이닝룸을 나갔다.

서준에게 이끌려 소연이 이동한 곳은 1층의 조용한 서재였다.

이곳에서 대본 연습을 할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불씨를 아늑하게 지펴 놓은 벽난로 쪽 암체어에 소연을 앉힌 서준은 저도 그녀의 옆자리로 착석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간격은 의자의 팔걸이가 아니었다면 몸이 닿았을 만큼 아주 가까웠다.

얼마 후, 길게 꼰 다리 위에 팔꿈치를 올린 서준의 손에는 대본이 들려졌고, 그와 마찬가지인 소연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살펴보는 동안 얼마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가을이면 가회동 본가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는 은목서.

그 꽃을 닮은 엄소연의 향기가 서준의 후각을 간질였다.

원래 달콤한 향이라는 건 알았지만 오늘따라 더 달게 느껴진 서준은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코 멀리하고 싶지는 않은, 되려 없어질 때까지 욕심껏 전부 들이마시고 싶은 향이기도 했다.


“엄소연 씨는 수영 잘하나?”

서재에 들어온 이후 서준의 첫 질문은 수중 촬영에 대한 것이었다. 당연히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던 소연이 싱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못 하진 않죠. 하지만 그 신이 꽤 길던데 물속에서 어떻게 버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건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알아서 해 줄 거지만,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신이니 엄소연 씨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거야. 내일 한번 연습해 봐.”

“진짜 그래도 돼요? 안 그래도 물에 들어가 본 게 오래전이라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몸에 한 번 밴 건 쉽게 지워지지 않거든. 취하는 순간 본능에 각인되는 거니까.”

저택 바로 앞이 요트 선착장이었다. 먼빛이지만 소연은 창밖으로 그곳에 정박해 있는 근사한 요트를 얼핏 봤었다. 일반 요트보다 훨씬 컸다.

즐기러 온 건 아니지만, 서준의 제안에 소연은 설렜다. 푸른 바다에 떠 있는 하얀 요트만 떠올렸는데도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런데 수중 신을 죽 훑어보던 소연은 다음 장의 지문을 읽으며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소여화가 물속에 가라앉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내용인데, 사실 죽는 것보다 죽기 전까지 기천율과 애틋한 키스를 나누며 깊은 감정선을 전부 표출해야 하는 게 상상만으로도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태서준 앞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린 소연은 괜히 대본을 뒤적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 여기 어디 대사가 있던데…….”

하지만 어딜 봐도 진한 애정 신이 태반이라 이래저래 당황스럽기만 한 소연의 얼굴은 더욱 새빨개졌다.

이렇듯 <태양의 주인>에서 엄소연의 주 역할은 진한 멜로를 보여주는 거였다.

심지어 기천율과 한 침대에 있는 농밀한 신도 여러 번. 다시 말해 극 중의 로맨스를 위해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어야 하는 건 오민정이 아니라 신인배우, 엄소연의 몫이었다.

오늘 그와 대본 연습할 구간을 찾으며 혼자 허둥지둥하는 소연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가만히 보고 있던 서준이 픽 웃었다.


“왜, 자신 없나.”

“뭐, 뭐가요?”

“나랑 키스하는 거.”

서준의 진한 눈길이 시치미를 뚝 떼는 작고 도톰한 입술에 달라붙었다. 그냥도 아니고 자석처럼 찰싹.


“키스 신이야, 뭐, 그냥,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면 되지 않을…….”

뒷말을 어물쩍 넘기는 소연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댄 서준이 실소했다.


“그냥?”

“아, 아니, 왜 말꼬리를 잡아요? 저는 연습보다 실전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라고요.”

“실전이 중요하긴 하지. 그런데 엄소연 씨는 벌써 쥐구멍을 찾고 있잖아. 키스라면 적지 않게 해 봤을 사람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잖아.”

“……!”

이 남자가 무슨 소릴! 하지만 뭐라 반박할 순 없었다. 4년 전 키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게 자랑은 아니니까.

허를 제대로 찔린 소연의 굳은 표정이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실전을 논해? 촬영 내내 스태프들만 고생시키다 하는 척하며 대충 때우자는 얘기인가? 그게 열심히 하겠다는 연기자의 태도야? 수백억 투자된 드라마에 어울리지도 않는 저급한 퀄리티는 누가 책임질 건데?”

“…….”

누구긴. 맡은 배역을 제대로 연기해내지 못한 나겠지. 그런 나에게 다음 기회는 절대 오지 않을 거고.

그의 말이 백번 옳았다. 서준의 일침에 정신이 바짝 차려진 소연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연기 안에선 현실의 나는 없는 거야. 그게 프로 연기자의 마음가짐 아닐까? 날 이용한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연기잖아. 이럴 때 제대로 이용해야지.”

“…….”

다 맞는 말이지만 자신의 머뭇거림이 연기 때문만이 아닌 건 이 남자도 알고 있지 않은가. 더는 조롱당하기 싫은 작은 두 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요! 하면 되잖아요!”

소연이 빽 소리치듯 목청에 힘을 싣자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꼬았던 다리를 푼 서준이 어디 두고 보겠다는 듯 몸을 뒤로 빼고 근엄하게 팔짱을 꼈다.


“그럼, 어디 해 봐.”

두 눈까지 감아준 건 가만 있을 테니 소신껏 해 보란 뜻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각오만큼. 프로 연기자가 되고 싶다면 그 의지에 맞게.


“하긴 할 건데…….”

서준 앞으로 다가간 소연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하긴 할 건데……눈, 뜨지 마요?”

소연은 미세하게 내쉬는 숨소리부터 속눈썹까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원한다면.”

그러나 턱을 한 번 까딱한 서준의 표정은 잔잔한 수면처럼 안온하기만 했다. 매끄러운 목소리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왜 나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나만 바보같이 떠는 건데? 그깟 키스가 뭐라고. 입술이 녹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연습하는 것뿐이잖아.


“해요.”

후, 하며 크게 심호흡한 소연은 서준의 입술로 바짝 가져간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그리고 지그시 누르는 그때였다.


“!”

“!”

키스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을까. 두 입술이 포개지는 순간 소연은 깜짝 놀랐다. 조금만 하려던 게 너무 깊이 닿아버렸으니까. 흡수되듯 훅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으니까.

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는 그 순간 서준의 미간이 움찔했다.

키스가 키스지, 라고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감고 있는 눈앞이 일순 번쩍했다.

명치 끝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키스할 기회는 여러 번 있으나 입맞춤까지 이어진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다시 만난 이후 첫 입맞춤이었다.

그러니 어찌 무감하겠으며,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빠르게 여유를 되찾은 서준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떴다. 키스의 장인이란 수식어답게 키스 신에 대해 조언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메라가 들어오는 각도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꺾어 줘야 그럴싸해.”

“누, 눈 뜨지 말랬……흡!”

밭은 숨을 터뜨린 소연의 입은 몇 마디 말도 뱉어내지 못하고 다시 막혀버렸다.

서준의 살갗에서 번진 뜨거운 열기가 소연에게 전해졌다. 누구에게서 먼저 발화한 열기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체온 역시 무서운 속도로 달아올랐다. 아무리 연기 연습이라 해도 이건 진짜 키스였다.

그런데도 소연은 물러섬 없이 두 팔로 서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를 고수하느라 등줄기가 저릿저릿해진 탓도 있지만, 막상 그의 입술이 닿으니 더한 욕심이 생겨서였다.


“이, 이래도 되죠?”

“…….”

이미 저질러 놓고 묻는 건 뭔지. 서준은 대답 대신 커다란 손으로 소연의 허리를 살며시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어, 엇!”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힘이 풀린 소연의 다리가 서준의 허벅지 위로 안착했다. 아예 푹 주저앉은 꼴이었다.

일어날 수도, 그렇다고 계속 앉아 있기도 모호한 상황이 되자 소연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서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할까요?”

“…….”

뜻대로 하라는 듯 눈썹을 위로 올렸으나 서준의 손등엔 이미 굵은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이성과 달리 그의 본능은 이 순간, 이 기회를 절대 놓치기 싫은 거였다.


“이 자세 괜찮은데, 왜. 다시 해 보는 건 어때.”

“또……요?”

“내가 누구의 연습 상대가 돼 준 건 처음이거든.”

서준이 물기로 반들거리는 소연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그러니 열심히 해야지…….”

서준의 노골적인 유혹을 감히 뿌리질 수 없는 소연의 심장은 거인이 힘껏 발을 구르는 것처럼 쿵쿵댔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첫 남자, 전부를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내 아이의 아빠이며 끝 사랑이기에.

공중에서 얽힌 두 눈빛이 강렬하게 뒤엉켰다.

서준의 시야와 머릿속은 오직 단 한 사람, 엄소연으로 가득했다.


“엄소연…….”

그동안 참아왔던 인내의 끝을 보았을까. 깊이 가라앉은 까만 눈빛에 강한 열망이 휘돌았다.


“미칠 것 같아. 너 때문에. 그러니까…….”

오늘은 네가 나 좀 봐줘야겠다.

가녀린 허리를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소연의 목덜미와 뒤통수를 한 손으로 감싼 서준이 벙긋대는 작은 입술을 한입에 베어 물기 직전이었다.


“자, 잠깐…….”

“……?”

짐승 같은 욕망을 멈춘 건 우습게도 연약한 손가락 한 마디였다. 서준의 입술 위에 살포시 손가락을 얹은 소연이 말했다.


“내일부터요. 연습하다 이러는 법이 어딨어요? 아무리 급해도 이곳에 온 첫날부터 흔들면 반칙이죠.”

저를 좋아한다는 태서준. 그의 고백에 마구 설렜던 소연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면 저야말로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여지를 남긴 건 아무리 아닌 척해도 내비쳐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 틈을 파고들려는 듯 서준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더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키스한 지가 오래돼서 연습이 필요하거든.”

“그걸 저더러 믿으라고요?”

“의심도 병인데. 대본에 분명 있는 내용인데, 못 믿을 것도 없잖아. 정 내가 흔드는 걸로 생각되면 막아도 돼.”

“…….”

이건 무슨 배짱인가…….

말을 참 헷갈리게 한다.

모든 게 반칙인 남자의 유혹에 버티는 것 자체가 무리인 소연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가슴은 말도 못 하게 그를 원하는데, 머리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덤비는 그를 무조건 막으라 한다. 그렇게 소연의 머리와 가슴이 싸우고 있을 때였다.

서준은 소연을 번쩍 들어 마호가니 책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과감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쉴 틈 없이 조여오는 남자에게 속수무책 빠져들 수밖에 소연은 서준의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놓치면 정말 죽기라도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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