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첫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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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첫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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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첫 남자
2023.04.21.
원목 책상 상판에 소연의 등이 닿았다.
큰 체구의 남자가 그만큼의 힘과 무게로 부딪혀오니 작고 가냘픈 여자가 뒤로 넘어가는 건 당연했다. 더한 행위가 저질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지만, 소연은 밀어도 끄떡없는 서준의 가슴에 손바닥을 댄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그만……해요.”
하얀 바탕에 복숭앗빛으로 상기된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가 불만을 잔뜩 내비쳤다.
“넌 지금 멈추는 게 가능해?”
서준의 입술이 습기를 머금어 반들거렸다. 그 입술로 말하는 그는 지독히도 야했다. 질식사 직전에 놓인 사람처럼 숨을 헐떡인 소연은 간당간당한 자제력을 간신히 붙들어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했다.
“거봐. 연습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흔드는 거 맞잖아요.”
“하…….”
방금까지도 자신과 뜨거운 숨을 주고받던 여자가 단번에 태세를 바꾸었다.
이 고집스러움도 엄소연의 매력 중 하나지만 이렇게나 단호한 여자를 그 남자는 어떤 수를 써 무너뜨린 걸까. 저를 버린 남자의 아이를 기쁘게 낳았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냔 말이지.
그럼 난.
네 첫 남자인 나는 뭔데?
난 그 새끼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건가.
갑작스러운 질투심에 상대적 박탈감까지 몰려든 서준이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약속했잖아요.”
“뭐를.”
“서로 원할 때. 그리고 제가 이사님을 이용해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이곳으로 함께 떠나오며 엄소연이 내건 조건이고 서준도 합의한 것이었다. 약속은 지켜야겠지만, 이 극렬한 갈증은 어떡하란 말인가. 타다만 듯한 정염은 심히 지끈거렸다. 그러니 적당한 타협점은 있어야 했다.
“엄소연 진짜 독하네. 그럼, 언제 넘어올 건데.”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언제 넘어가겠다고 말했었나요? 버티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요?”
“그거야 널 설득하기 위한 말이었지. 사실은 제발 버티지 않았으면 했어.”
“…….”
이 남자, 정말 진심으로 날 좋아하는 거야?
소연은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그 답은 긍정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대답하는 그의 담담한 말투와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 정말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연은 결단을 내렸다. 태서준에게 한 발 더 가까이 가 보기로.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태서준을 좀 더 겪어 본 후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내일 저녁, 어때요?”
“뭐가.”
“제가 이사님 방으로 갈게요.”
“지금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 줄은 알고?”
저녁에 방으로 간다고 하니 다른 쪽으로 이해한 듯했다. 소연은 그게 아니라고 얼른 고쳐 말했다.
“호랑이 굴인 건 잘 알고요. 제 말은 단지 우리 사이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 보자는 거예요.”
“하…….”
이 여자, 순전 제 맘대로네.
한숨을 툭 내뱉은 서준은 제 밑에 있는 소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일으켜 앉혔다.
책상에 누워 있다 갑자기 일어나니 눈앞이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소연은 헝클어진 머리를 느릿한 손짓으로 정리하며 여유를 되찾았다.
“면담 같은 건가?”
“유대감 만들기? 그 정도로 생각해주시죠. 솔직히 이사님한테 무척 끌리는 건 부인 못 해요. 하지만 이사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 시간은 제게 주셔야죠. 뭐든 빨리 먹으면 체하는 법이니까요.”
소연은 태서준을 사랑한다. 서준은 엄소연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하는 요건에 이것 말고 다른 무엇이 더 중요할까.
그러나 소연은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저를 좋아한다는 그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 없었다.
잃을 게 있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불안감일 수도 있었다.
저를 좋아하는 게 가벼운 흥미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연인이 된다 해도 둘의 관계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그가 제 아이에게 아빠의 사랑을 얼마나 나눠줄 수 있고, 그가 친부로서 당연히 해야 할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순 있는지.
소연은 이러한 기대치에 그가 얼마만큼 부합해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자신의 결정으로 서준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과연 그가 감당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었다. 서준이 쌓아온 것들을 원치 않는 진실로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원하는 건 진실한 대화로 둘 사이에 유대감부터 쌓는 거였다. 스페인행에 동행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래야 소중한 제 아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고, 만일 그가 제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이곳에서의 기억은 예쁜 추억 정도로 간직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서준을 살짝 밀친 소연이 앉은 책상에서 내려섰다.
그러나 뒤로 밀린 만큼 앞으로 다가선 서준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소연을 제 팔 안에 가두었다.
“스테이크를 한 덩이를 쉬지도 않고 해치운 엄소연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건 그렇고. 그러면 왜 하필 내일 저녁이지?”
저보다 훨씬 큰 남자가 고압적인 눈길을 내리찍었나 소연은 그에 아랑곳없이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고작 며칠인데. 그러니 집중적으로 탐구해 보자는 거죠. 저녁엔 하루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도 해 보고요.”
“그러다 넘어올 수도 있는 거고?”
“그게 아니라도 마지막 날엔 확실한 대답을 해드릴게요.”
고작 며칠.
그쯤 참는 거야 어렵지 않다.
머리로는 그리 생각했으나 그의 몸은 그렇지 못했다. 키스하면서부터 흥분된 몸은 여전히 그녀만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으니까. 제 품에 안겨들지 않는 이상 눈앞에 있는 엄소연은 그 자체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서재 뒤편의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온 서준이 방문 앞까지 소연을 데려다주며 그녀에게 빨리 방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한 건 그 때문이었다.
“잘 자.”
짧은 굿나잇 인사를 남긴 서준이 발길을 돌릴 때였다.
“바로 주무시려고요?”
조금 전까지 그를 거절한 저였다. 자신이 이기적인 건 알지만 그와 떨어지기 싫은 소연의 마음이 우발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
걸음을 멈춘 서준이 삐딱하게 눈썹을 세우며 방문 앞에 버티고 선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아니, 그냥…… 전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낮에 많이 자서…….”
소연이 말끝을 어물쩍 흐리는 동안 서준의 심장은 일순 요동쳤다. 그 역시 엄소연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거였다.
“그래서, 놀아달라?”
“어후, 제가 뭐, 애인가요? 그냥 그렇다고요.”
서준의 마스터룸은 복도 맨 끝이었다. 그쪽으로 눈길을 던진 서준이 말했다.
“안 잘 것 같으면 내 방에 같이 가든가.”
“지, 지금요?”
“내일 내 방으로 올 거라며. 유대감 만들기야 지금부터 해도 상관없지 않나?”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그럼, 오늘은 사전답사 차원에서!”
“그 전에 ‘이사님’이라는 그 소리 좀 빼면 안 될까?”
“그거야 어렵지 않죠, 태서준 씨. 저기 끝방이죠?”
싱긋 미소 지은 소연이 먼저 서준을 지나쳐 사부작사부작 앞장서서 걸었다.
“…….”
이 여자가 끝까지 날 괴롭히려고 작정을 하셨나.
어쩌다 소연을 뒤를 따라가게 된 서준의 입에서 걷잡을 수 없는 실소가 연실 터져 나왔다.
이래저래 정말 얄미운 여자였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유일한 여자이기도 했다.
***
“명수동 삼거리는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교통사고가 난 곳입니다. 작년만 해도 무려 14건의 사고로 36명이 사망하거나 중, 경상을 입었으니까요. 하지만 차가 인도까지 침범한 건 처음입니다.”
경찰의 연락을 통해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온 유정화는 밤을 꼬박 새우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버지의 병실을 지켰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형사가 어제저녁 병원으로 실려 온 유병환의 사고 경위를 세세히 설명하는 동안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던 정화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멀쩡했던 사람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사고를 낸 사람은 왜 여태 나타나지 않는 거죠? 양심이 있으면 와서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감입니다만 포장마차 일부를 덮친 화물차는 번호판이 없고, 운전자는 사고 즉시 도주해버려서 저희도 목격자 중심으로 사고 경위와 오리무중인 운전자를 파악 중입니다.”
‘목격자’라는 말이 반가웠을까. 흐리멍덩한 눈의 초점이 확 살아난 정화가 마른침을 조심히 삼키며 물었다.
“제대로 본 사람이 있나요?”
“우선 포장마차 주인이 그나마 가까이서 보았지만, 지나가다 본 사람의 증언과 별 차이가 없어서 아직은 딱히…….”
“형사님이 돌려 말씀하시는 거 다 압니다. 뺑소니 범인을 찾을 확률이 희박한 거잖아요.”
“아직 그렇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사고 난지 만 하루도 안 됐으니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요.”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정보라도 얻게 되시면 바로 제게 연락 주세요. 제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사람 얼굴은 반드시 봐야겠으니까요.”
“유정화 씨의 참담한 심정을 왜 모르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꼭 찾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를 마친 형사가 병원 휴게실에서 나가려다가 말고 다시 정화를 바라봤다.
“아 참! 혹시 아십니까? 유병환 씨가 어제 왜 명수동에 갔는지.”
“그 동네에서 20년을 살았어요. 꼭 이유가 있어서 가신 건 아닐 겁니다.”
“포장마차 주인 얘기로는 유병환 씨를 어제 처음 보았다고 하던데, 왜 하필 그곳에…….”
“글쎄요. 그건 아버지가 깨어나야 알 수 있는 문제 같은데요.”
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화가 급한 용무를 말했다.
“먼저 실례해야겠네요. 지금 담당 의사를 만나야 해서요.”
“아, 어서 가 보시죠.”
“그럼, 형사님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곧 부친을 잃을지도 모를 유정화가 안쓰러웠을까. 그 유명한 배우를 실제로 만난 게 이제야 실감 나서였을까. 형사는 꽤 바쁜 걸음걸이로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스읍,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다른 건 다 물으면서 그건 왜 안 물어볼까……. 누구와 있었는지. 그곳에 유병환 씨가 혼자 있었다는 걸 유정화 씨는 잘 모를 텐데.”
엄지로 턱을 쓸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형사의 눈에서 예리한 빛이 도드라졌다.
***
서준과 소연은 마스터룸 소파에 앞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셨다.
햇수로 4년이 지났다. 그 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이 아닌 스페인, 호텔이 아닌 으리으리한 저택이라는 것. 더 깊이 들어가자면 그 시간만큼 낯설고도 익숙해진 관계랄까.
<태양의 주인>은 죽지 않는 불멸의 마왕 기천율과 그가 사랑했던 비운의 여인 소여화의 환생을 다룬 기묘한 이야기로서, 로맨스가 주이고 천년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전개와 스릴러를 결합한 스토리로 스펙터클하게 촬영될 예정이다.
그 이야기를 하던 중 귀신 배역의 분장이 꽤 실감 나 무서울 거라고 겁을 주던 서준은 이 저택도 종종 유령이 출몰한다는 말을 은근슬쩍 던졌다.
“윽……거짓말이죠?”
시곗바늘이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옆의 작은 등만 켜 놓은 터. 밤의 으쓱한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소연은 어깨를 좁히며 서준에게 얇은 눈초리를 겨눴다.
“저 겁주려는 거 다 알아요.”
“그럴까. 내가 그 귀신을 마지막으로 본 게 아마…….”
“언젠데요?”
서준이 뜸 들이며 말끝을 길게 늘이자, 그의 진지한 표정에 솔깃 넘어간 소연이 왕방울만 한 눈을 반짝거리며 빨리 말해보라며 보챘다.
“그거 아나. 스페인 귀신도 자기들 얘기하면 좋아서 모여드는 거.”
“으윽! 그런 소리 말고 언제 봤냐니까요.”
“알려주면 놀랄 텐데…….”
서준이 한 거라곤 소연의 어깨너머를 슬쩍 바라봤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지금 네 뒤에 있다.’라고 말하는 리얼한 눈짓.
“꺅!!!”
아무래도 장난이 과했던 모양이다. 순간 기겁한 소연이 몸을 떼구르르 굴려 서준의 허벅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눈물도 찔끔, 서준의 목을 매달리듯 꽉 껴안고 오들오들 떨기까지 했다.
“기가 이리도 허해서야.”
“흐흐흑, 이러지 마요! 나, 오늘 잠 어떻게 자라고…….”
아까 키스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복수일 수도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난리 치는 소연이 꽤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웃던 서준은 또 한 번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진짠데…….”
“히익! 그만 좀 하라니까요!”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소연은 이제 겁 대신 화가 많이 났다.
“흥! 진짜 나빴어!”
뾰족이 서준을 째려본 소연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씩씩거리며 나갔다.
그렇게 소연이 제 방으로 돌아간 이후 서준은 발코니로 나가 그곳에 한참 서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초저녁부터 몸을 괴롭히던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주었으니까. 참는 거야 익숙하지만, 괴로운 건 괴로운 거니까.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을까.
이내 욕실로 들어간 서준은 아주 긴 샤워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