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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기다림의 시간 (33/51)


33화. 기다림의 시간
2023.04.24.


말라가는 스페인에서도 가장 뜨거운 지역에 속하긴 하지만 오늘따라 오전인데도 기온이 찜통이었다.


“미쳤네, 미쳤어!”

보트 가판 위의 서준은 은연중 어금니를 짓씹듯 한숨 섞인 목소리를 잘근잘근 뱉어냈다.

선착장으로 내려오는 소연은 수영복 위에 래시가드를 입고 있었다. 거리는 좀 있지만, 가늘게 쭉 뻗은 다리와 아슬아슬한 몸의 굴곡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서준의 새까만 눈동자 안으로 단번에 쏙 흡수됐다.

심한 노출이 비일비재한 광고나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절대 흐트러짐 없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서준은 그때와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소연의 수영복은 비키니도 아닌 평범한 수준인데도 그의 반응은 그 이상을 보는듯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반바지에 상체를 드러낸 서준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탄탄한 흉근을 들썩거리며 흔치 않은 남성미를 내뿜었다. 서준의 심기가 일순 어지러워진 건 눈에 보이는 것 때문이었지만, 한곳으로 몰려드는 열감도 크게 한몫했다.

소연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서준의 목울대가 절로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수영복 차림새가 무척이나 의식돼서였다. 그런데 소연은 요트에 오르지 않고 나무 널에서 파란 물밑을 응시하는듯한 자세로 잠시 서 있었다.


“다 왔으면 어서 탈 것이지 왜 꾸물대실까. 아예 물속에 빠트려 버릴까?”

이 말을 혀끝으로 구시렁대는 동시였다.

순간 첨벙! 하는 소리가 서준의 청각에 크게 닿았다.


“위험…….”

소연이 바닷물 속으로 사라진 건 서준의 다급한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였다.

수영 실력이 완벽한지는 몰라도 본인이 잘한다 했으니 곧 올라오겠거니 생각한 서준은 요트에서 내려와 소연이 떨어진 곳으로 성큼성큼 뛰어가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대체 물 밑에서 뭐를 하는 건지. 뽀글뽀글한 기포는 조금씩 올라오는데 정작 그녀는 물속에서 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무 널 위에서 무릎을 굽혀 아래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 흐느적거리는 무언가가 언뜻 보였다.


“……!”

불길한 예감이 스친 머릿속이 싸했다.

첨벙!

서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려한 몸을 날렸다.

깔끔한 다이빙 솜씨로 바다에 입수한 그는 물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푸아……!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의 머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요트 반대편으로 말이다.


“하아, 하아…… 쫌, 놔요. 하아……”

“…….”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첨벙거리는 소연의 팔을 더 세게 움켜쥔 서준이 그녀를 까칠하게 바라봤다. 계속 제게서 벗어나려는 그녀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은 거였다.

그 눈길에 찔려 따끔하기라도 했을까. 소연은 대뜸 따져 물었다.


“하, 왜요!”

“너부터 말해. 왜 그랬어?”

흠뻑 젖은 머리를 좌우로 튕긴 서준이 소연을 제 쪽으로 바짝 잡아당기며 되묻자, 그의 드센 힘에 기가 죽은 소연이 떠듬떠듬 대답했다.


“자, 잠수용 로프가 보여서…… 발이 미끄러져서……. 아무튼, 이왕 바다에 빠진 거 연습할 겸 물속에서 버텨 보려고 그런 건데…….”

“엄소연!”

버럭, 하는 목소리에 작은 어깨가 움찔했다. 그 움직임이 물에 둥그렇게 퍼져 고스란히 서준의 가슴에 부딪혔다.


“사람 걱정하게 하고! 그랬으면 얌전히나 있을 것이지, 도망은 왜 치는데! 내가 괴물이라도 돼?”

물에 빠진 소연이 떠오르기는커녕 점점 물 밑으로 꺼지자 서준은 식겁했다. 심장마비라도 왔나 하여. 정신을 잃었나 하여.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하여.

그래서 서준이 물에 뛰어든 것이고, 소연을 끌어 올리고자 그녀의 목에 팔을 감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순간 소연은 잡고 있던 로프를 놓고 쏜살같이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녀의 수영 실력은 잘한다는 표현 그 이상이었다. 특히 잠영은 여느 잠수꾼 못지않았다. 여기에 태서준도 청소년 수영체전 금메달리스트였다. 그런 둘이 쫓고 쫓기며 물속에서 옥신각신한 거였다.


“갑자기 괴이한 물체가 다가와 뒤로 확 잡아당기는데, 안 놀라겠어요? 태서준 씨도 저 때문에 놀라셨다면 미안하긴 한데요, 꼭 이래야 해요?”

아무리 그렇대도 이게 소리칠 일인가 말이야. 소연은 이렇게까지 화내는 그를 처음 보았다.


“왜 화만 내는데요!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잖아요!”

소연도 빽 소리쳤지만, 목소리의 끝은 가녀린 울먹임이었다.


“그거야 네가 물귀신이라도 될까 봐…….”

이 순간 서준은 보았다. 맑고 깨끗한 눈동자에 가득 찬 물기를. 예쁜 눈에 보석처럼 박힌 영롱함을.

뾰족한 송곳에 깊이 찔린 듯 그의 심장도 쿡 아려왔다.

서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소연을 직시했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서로 맞닿은 상체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싸웠으나 싸움이 아니요, 주고받는 언성이 높았으나 상처 주는 말이 아니요, 곱지 않은 눈빛이 서로를 향했으나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의 침묵이 이어지는 그때였다.


“네. 실장님”

갑자기 선착장으로 내려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트는 있는데 사람은 안 보입니다. 어떡할까요.”

전화하는 남자는 박성호였고, 투시력이 없는 그의 눈에 요트에 가려진 소연과 서준이 보일 리 없었다.


“네? 선실에는 들어가지 말라고요?”

왕골로 짠 피크닉 바구니에 점심 식사를 담아 가져온 성호는 봉 실장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아, 네, 네, 저도 그런 눈치는 있습니다.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말고 갑판에 피크닉 가방만 살짝 놓고 오란 말씀이잖아요. 크큭.”

선내에서 우리가 무슨 일이라도 벌이는 줄 아나? 듣다 보니 웃음소리도 그렇고 얘기가 좀…….

소연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


“저 봐요, 오해하잖아요!”

소연이 우직한 가슴을 살짝 밀쳤다.

미약한 힘에 기꺼이 뒤로 밀려나 준 서준은 조금 전과 다른 묵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소연이 알게 된 건 바닷물에 몸을 가볍게 띄워 선착장 쪽으로 팔다리를 내젓는 그 순간이었다.


“잠깐…….”

서준이 서둘러 제게서 멀어지는 소연을 붙잡았다.


“풉, 콜록, 콜록!”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뒤로 당겨지며 물을 삼킨 소연이 사레가 들려 캑캑댔다. 그사이에 소연은 서준의 너른 가슴에 폭 감싸져 있었다.


“짜?”

“아무렴 바닷물이 달까요. 그 당연한 걸 묻……!”

등에 닿은 감촉에 조잘대던 음성이 뚝 끊겼다. 커다란 손의 움직임에 바짝 긴장한 소연은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말해줄까.”

“……”

소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갑자기 훅 끼치는 그의 숨결이 소연의 귓불을 스쳐 지나는 그 순간이었다. 크고 단단한 품에 그녀의 상체가 쏙 들어갔다.


“!”

심히 쿵쿵대는 심장 박동이 그의 가슴에서 제 가슴으로 전해진 소연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심장이 이래. 너 때문에 내 가슴이 부서지도록 뛴다고.”

“…….”

서준의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한 소연은 멈칫멈칫하면서도 팔을 뻗어 서준을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그의 등을 살짝살짝 토닥였다.

맨 처음 태서준과 함께 스페인행 비행기에 오를 때에는 두 가지 마음이었다. 그가 아무리 흔들지언정 절대 안 넘어가겠다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반면 또 다른 마음으로는 내심 기대도 하였다.

이 남자가 정말 나를 사랑해서, 그래서 나와 현우를 정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 남자와 함께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어제보다 한 뼘 더 열린 제 마음을 그에게 전해주고 싶을 뿐, 이 남자의 마음이 제 마음과 같기를 바라며 설렐 뿐이었다.

맑은 눈동자와 커다란 눈매.

그 안에서 잘게 떨리는 눈망울이 바다 위의 물비늘처럼 예쁘게 반짝거렸다.

서준은 그 어여쁜 눈을 새까만 눈동자에 단단히 가두었다.


“우리,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서준이 속삭이자 소연은 그의 뜻에 따라주었다.

부드럽고 여린 상체를 꽉 끌어안은 서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단 며칠이 벌써 수년처럼 느껴진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이렇게라도 해야 견뎌질 것이기에.


 

***

CN 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선 구원후와 기획실 주 팀장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속 배우 서포트 프로그램에서 엄소연 씨를 빼신다면서요. 광고 섭외를 아예 받지 말라고도 하셨고. 엄소연 씨를 그냥 죽이자는 것 같은데, 어쩌자고 내게 상의도 없이 그러셨을까요.”

원후는 난감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한 톤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의 반응을 봐야 알겠지만, 벌써 회사 안팎은 엄소연 씨 일로 시끌시끌합니다. 이 상황에서 무턱대고 밀어주기도 무모하잖습니까. 기자들이 엄 배우의 사생활을 트집 잡는다면 우리 회사 이미지에 도움 될 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회사 지원보단 엄소연 씨 혼자 자생해야겠지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 시야를 아래로 떨어뜨린 주 팀장은 변명이 아닌 타당한 이유를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구 대표는 윤 감독과 권 작가 앞에서 엄소연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주 팀장이 구원후보다 발 빠르게 회사 원칙에 따라 조처한 거였다.

그만큼 CN 대표라도 뚜렷한 명분 없이 참견했다간 회사 임원들에게 빈축을 살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지만, 구원후에게 비상한 수가 있다면 180도 달라지는 얘기였다.


“쉬쉬하며 지켜보자? 그러다 가망 없으면 팽하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론 엄소연 씨 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이미지 하나로 죽고 사는 게 이 바닥의 섭리인지라 저도 안타깝습니다.”

남편은 없는데 아이가 있다.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주 팀장이야말로 실로 유감이었다.

회사 안에는 A급 배우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의 흥망이 소속 회사의 힘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칫 엄소연의 개인사가 기자들에게 들먹여진다면, 회사의 이미지까지 건드려진다면, 이제까지 승승장구만을 해 온 CN 엔터테인먼트에 둥지를 튼 기존 연예인들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 일.

우려가 현실화가 되기 전에 막는 게 기획실 책임자가 할 일이기에 주 팀장도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CN 대표로서 주 팀장에게 명령하는 구원후의 태도는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전부 터뜨리세요. 단, 짧고 굵게.”

“네? 하지만…….”

“엄소연 씨는 우리 회사와 한배를 탄 사람입니다. 그리고 불리한 일일수록 감추는 게 아닙니다. 최선의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빠르게 공론화해서 우리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어야죠. 그래야 뒤탈이 없고 운이 좋으면 더 크게 도약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역으로…….”

“뒷감당은 내가 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찌 장담하시는지.”

“엄소연 씨가 그러더군요. 미혼모가 되기를 자처한 자신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이까지 비난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아이만큼은 세상의 밝은 햇살을 고루 받게 하며 당당하게 키우고 싶다고. 우리야말로 그 새로운 신여성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해 고루한 개념을 깨보자는 겁니다.”

장사 한두 번 해 보냐는 듯 원후가 넌지시 알려주자 주 팀장이 자신의 무르팍을 탁 내리쳤다.


“아하! 그러니까, 대표님 말씀은 대중에게 사연까지 한꺼번에 터뜨려 솔직하고 당당한 신 여성상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자는 거 아닙니까.”

“잘 아시네!”

위기를 잘 이용하면 호재가 되는 법.

‘불리’를 ‘유리’로 이끄는 재주가 탁월한 구원후 대표가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끗하자 주 팀장은 벌써 각이 나온다는 듯 시원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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