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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아름다운 계절 (34/51)


34화. 아름다운 계절
2023.04.28.


말라가의 바다와 하늘은 유독 선명하고 푸르렀다.

요트를 타고 이정표도 없는 물길을 헤쳐 당도한 곳은 이름 없는 작은 섬이었다. 섬 전체 모양이 하트라는 건 그가 알려주었다. 그런 걸 왜 말해줘서는.

그 언젠가 현우가 물었다.

하트는 왜 하트냐고, 왜 양쪽 모양이 같냐고. 그래서 말해 준 게 두 사람의 심장이 만나면 완벽한 사랑이 되는 거라고 했다.

그랬더니 영특하게도 현우는 그 완벽한 사랑이 저 아니냐고 다시 물으며 까만 바둑알 같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때 아빠가 누군지 알고 싶어 제 딴에 그렇게 돌려 물었다는 걸 왜 몰랐겠나. 그래서 찡해지는 심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의 설명에 불현듯 현우와 했던 대화가 떠오르며 부자간의 정을 가로막고 있는 게 저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도는 걸 겨우 참아냈다.

외딴섬의 해변을 팔랑팔랑 나비처럼 쏘다니는 소연은 동화 속 왕자님보다 더 왕자님 같은 서준을 바라보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행복했다.

아름다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그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꿀처럼 달았다. 아니, 그보다 더 달콤했다.

피해 갈 수 없는 현실. 언젠가는 봉인했던 아이의 비밀을 수면 위로 꺼내야 하겠지만, 그 복잡하고 불안한 생각들이 잠시나마 잊힐 만큼.

단 하룻밤이었다.

그리고 첫 만남부터 특별했던 그 남자를 잊을 수 없어 가슴 깊숙이에 묻었다. 하지만 그 가슴을 다시 비집고 나온 그는 몇 해 전보다 더 큰 의미가 되어 있었다.

그의 감정이 진심이라는 건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잠깐의 호기심일지도 몰랐다. 태서준의 마음이 딱 그 정도라고 해도 오늘만큼은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

만일 그와 이별해야 한다면 더더욱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 그를, 그의 사랑으로 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나니까.

부모님은 나날이 배가 불러오는 딸을 따스하게 품어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 딸도 예쁘지만 그런 네가 낳는 이이는 얼마나 더 예쁘겠냐고. 기꺼이 도와주겠노라고. 단, 네 단단한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유쾌하게 말씀하셨지만 왜 한숨 짓지 않으셨겠나. 기대했던 만큼 실망 또한 컸을 것인데.

그렇게 마음의 빚을 지며 여기까지 왔다.

결코, 쉽지 않은 날들을 견디며.

왕자에게 말도 못 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의 심정이 이러할까. 당장 내 아이가 당신 아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아직 그래선 안 될 것이다. 지금보다 좀 더 견고한 관계가 됐을 때. 그때까진 비밀이야 한다.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며 지금까지 견뎌온 시간. 그와 함께 힘겹게 지켜온 행복이 자신의 욕심으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와 내 아이가 태서준의 오점이나 짐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으니까.

다만, 그의 기억에 꽤 괜찮은 여자로 남고 싶다. 그 욕심이라도 부려야 먼 훗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없더라도 그 추억이 나머지 삶의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해 줄 테니까.

난 절대 이곳에 온 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단 며칠뿐인 이곳에서의 추억을, 행복한 그와의 시간을 욕심껏 열심히 기억 속에 새겨넣을 것이다.

비록 미친 짓이 될지라도, 그 기대의 반. 아니, 그 반의반만이라도 채울 수 있다면…….

마음 깊은 곳에 꼭꼭 묻어 둔 생각들이 고스란히 투영되어서인지 소연의 미소는 유독 진주처럼 새하얗고 영롱했다.

소연은 부러 더 밝게 말을 이었다.


“태서준 씨는 언제부터 잘생기신 건데요?”

장난기 어린 호기심을 내비친 소연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여뻤다.


“…….”

넌 언제부터 예뻤는데?

라고 묻는 건 낯간지러운 일이라 서준은 말없이 작고 여린 손을 더 힘주어 잡으며 소연과 나란히 모래 위를 걸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연이었던가. 끊을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이런 걸까. 신이 이 작은 섬에 나를 가둬 살게 한다면, 그래서 오래오래 같이할 단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난 과연 누구를 선택할까.

아마도 난 너일 것 같다.

윤기 나는 긴 머리가 바닷바람에 탐스럽게 흩날렸다. 생글생글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이 왜 이리도 예뻐 보일까.

서준은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피식, 멋쩍게 웃었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자 굳이 사진을 찍는 자신이 너무 낯설고 어색했으니까.


 
하트 섬을 나와 저택으로 돌아가던 서준은 물길을 가르는 요트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어야 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수영해 보는 게 어릴 적부터 로망이었다는 소연의 얘기 때문이었다.

그냥 지나가듯 해 본 말이었는데, 바로 배를 세우는 이 남자. 안 듣는 척하면서도 귀담아들은 그가 고맙고도 신기한 소연은 싱긋 웃었다.


“서준 씨는 수영 안 해요?”

“난 별로. 요즘 이곳에 상어 떼가 자주 출몰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서준이 장난스러운 표정에 으스스한 농담을 섞었다.


“히익! 또 장난치는 거죠?”

그게 진짜면 수영하라고 이렇듯 판을 깔아 줄 리 없잖은가. 소연이 버럭 하자 서준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며 피식거렸다.


“난 누가 뭐래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안 믿는 편이라. 하고 싶으면 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직접 부딪혀 보라는 뜻인가요?”

“글쎄. 뭐를 하든 엄소연 자유 아닐까.”

“피, 사람 겁주기에 아주 재미가 들렸나 본데…… 좋아요!”

흰색 카디건을 얼른 벗어 던진 소연은 수영복 차림으로 바닥이 까마득한 깊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몸을 가볍게 날려 입수하는 모습이 꽤 용감하고 씩씩했다.

소연은 보란 듯이 요트 주위를 휘휘 돌며 헤엄쳤고, 서준은 갑판 위에서 유유히 움직이는 그녀를 진득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맘껏 바다 수영을 즐긴 소연이 요트 위로 가뿐히 올라올 때였다.

짝짝짝!


“제법이네.”

소연의 용기와 수영 실력을 칭찬한 서준은 손뼉까지 쳐 주었다.


“상은 없고요?”

“…….”

장난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소연은 한술 더 떠 묻자 서준은 잘생긴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가장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미소면 충분하지 않나?”

“그게 상이라고요?”

“어.”

“아, 진짜…… 훗…….”

서준의 뻔뻔한 대답이 어찌나 기막힌지, 소연은 그만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든 상념을 깨끗이 잊어버린 채 드넓은 대자연과 한 몸이 된 건 난생처음이었다. 태서준이 넉넉한 시선으로 저를 지켜봐 준다는 게 가장 든든했고,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순간 소연은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완벽한 행복감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

서준과 소연이 섬에서 선착장으로 돌아왔을 땐 해가 하늘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말라가 시내를 구경시켜준다는 서준의 말에 소연은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예쁘기로 유명한 마르케스 데 라리오스 거리였다.

보행자들의 천국이라는 별칭답게 깨끗하고 반들반들한 보도블록 위를 걷는 서준과 소연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연인 같았다.

서준의 허리와 팔 사이로 쏙 들어온 작은 손을 가볍게 감싼 커다란 손이 듬직했다.

보호받는듯한 그의 따스한 감촉이 그렇게나 좋았을까.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들킬까, 길거리상점의 쇼윈도 쪽으로 연실 고개를 돌린 소연은 괜히 관심도 없는 상품을 열심히 구경하는 척했다.

서준이 제 눈길을 눈여겨보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길거리를 쏘다니던 중 두 사람은 출출해지는 탓에 스페인 전통 애피타이저 타파스를 먹었다. 소연은 제가 주문한 것이 생각보다 맛이 없어 투덜댔다. 그러자 서준이 인심 좋게 자신의 것을 소연에게 내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것도 그다지.


“내 것만 맛없는 줄 알았는데.”

“나도 먹을 때마다 이건 아니더라고.”

“힉! 뭐예요? 알면서 여기를 왜?”

“유명한 집이기도 하고, 난 아니지만 엄소연 씨 입맛엔 맞을 수도 있으니까.”

서준은 말하며 소연의 입가 한쪽에 묻은 소스를 엄지로 쓱 닦아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의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당황하는 건 오로지 소연의 몫이었다.


“허……!”

소연이 허탈하게 웃으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서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엄소연이 어떤 표정을 지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서준의 눈엔 다 귀여워 보이고 몹시 즐거웠으니까.

결국, 시원한 음료수만 원 샷하고 음식점을 나온 두 사람은 타바스 전문점에서 몇 발짝 걸어 어느 옷가게로 들어갔다.

쇼윈도에 걸려 있는 옷들이 맘에 들어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할 것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엄마, 아빠, 아이가 세트로 입을 수 있는 잠옷을 우연히 보게 된 소연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그곳을 나와버렸다.

그 가족 잠옷 세트를 말갛게 바라보고 있자니 오순도순 정답게 모여 한가로운 저녁 한때를 보내는 그와 저, 현우가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더 바랄 게 없는 평범하고도 행복한 풍경이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가족의 모습 아닌가.

헛되고도 과한 욕심이 생겨버린 자신을 발견한 소연은 덜컥 겁이 난 거였다.


“왜 그냥 나와? 뭐라도 살 줄 알았는데.”

“쇼윈도에 걸린 옷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맘에 안 들더라고요.”

시내 구경에 이어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말라가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였다. 그러나 30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랐을까.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져 아쉽게도 중간에서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대기하는 차에 도착할 때까지 서준은 제 겉옷을 벗어 내리는 비에 젖지 않게 소연의 머리와 몸을 폭 감싸주었다. 정작 자신은 빗물을 흠뻑 뒤집어쓰면서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검은색 세단이 어느 건널목 신호등에서 잠시 정차할 무렵이었다. 쾅, 하며 하늘이 찢어질 듯 울부짖더니 이내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제 막 졸기 시작한 그녀의 머리가 병아리 부리처럼 서준에게 콕콕 부딪쳐온 것도 그때였다.

얼마 후 신호가 바뀌며 차는 다시 출발했다.

그 순간, 앞 좌석의 봉 실장과 박성호는 보았다.

서준이 제 어깨에 자그마한 머리를 기대게 한 것을. 혹여 고개가 떨어져 다칠까, 커다란 손바닥으로 소연의 머리를 살며시 받쳐주는 것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오목조목 하얀 얼굴을 촘촘히 더듬는 것을.

소연은 새근새근 잠들었고, 서준은 앞 좌석에 있는 두 남자의 시선을 개의치 않아 했다.

쉿!

입을 꾹 다문 봉 실장과 박성호는 숨죽인 채 놀란 눈빛을 넌지시 교환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수행인으로서 지금 본 것을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는 걸.

***

저녁 무렵 저택에 도착한 서준과 소연은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그 후,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온 소연은 화장대 앞에서 오늘 있었던 일련의 일을 되짚어보았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바라본 자연경관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하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벗 삼아 더욱 새하얬다. 그 아래로 푸르른 산등성과 끝이 없을 듯한 수평선까지 넘실대는 바다, 에메랄드빛 물살을 가르는 흰 요트와 물보라.

그 수려한 장관 속에서 제일 돋보인 건 단연코 태서준이었다.

거칠 게 없는 지중해 한가운데에서 난 자유로웠다.

눈치 볼 것도 없고, 내 행동에 이렇다 뭐라 할 사람도 없는, 그와 단둘뿐인 세상 같았다.

말라가 시내를 돌아다닐 땐 그냥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내가 웃으면 그가 웃었고, 그가 웃으니 나 역시 또 웃음이 났으니까.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엔 깜빡 잠이 들었다. 비를 맞은 데다 차 안의 공기가 따뜻하니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모양이다.

그때 내게 닿았던 따스한 손길.

눈물 나도록 감사했던 시간.

꿈 같은 하루.

오늘 일을 얼마 되지 않는 그와의 추억 한 페이지에 정성스럽게 새겨넣은 소연은 난데없는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일전에 엄마가 말씀하셨다.

힘든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억지로 꿰맞추는 인연은 탈 나기 마련이라고. 살다가 자연스레 만나지는 사람. 무리 없이 만나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거듭나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 네게도 그런 인연이 꼭 찾아올 거라고.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이미 하나밖에 없는 심장을 빼앗겨버렸는데.


“후…….”

더는 마네킹처럼 앉아 있을 수 없는 소연이 크게 심호흡했다.

분홍빛 입술을 야무지게 말아 물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방문 밖으로 발을 사뿐히 내디뎠다. 어제 약속한 대로 서준의 방으로 건너가려는 것이었다.

또각또각…….

복도를 걷는 잰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태서준이 벌써 보고픈 거였다.

***

서준은 자신의 방에서 소연이 오기를 기다렸다.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켠 서준은 차분한 결을 유지하며 창가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밖에는 아직도 장대처럼 내리는 비가 땅거미가 내려앉은 정원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난 무엇 때문에 엄소연을 이곳까지 데려왔을까. 무엇을 얻고 싶어, 어떤 걸 확인하고자 여기까지 왔을까. 이 질기고 질긴 비가 그치면 엄소연을 조금이나마 싫어할 수 있을까. 미워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건 이미 스스로가 알고 있는 듯했다.

서준은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 안쪽이 자꾸만 찌릿찌릿 간지러웠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아는 거였다.

엄소연이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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