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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내 가슴에 네가 들어와 (35/51)


35화. 내 가슴에 네가 들어와
2023.05.01.



 
소연이 마스터룸 안으로 들어오자 서준은 그녀와 함께 미니바 쪽으로 이동해 스탠딩 의자에 앉았다.


“위스키 마시고 계셨네요?”

“조금.”

“저도 마실 수 있을까요?”

“안 취할 자신 있어?”

“취하면 어때서요. 이럴 땐 좀 즐겨도 되잖아요.”

“그러든가.”

서준은 새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입술 끝을 올렸다.


“…….”

그가 내어주는 술잔을 입술로 가져간 소연이 진한 알코올을 꼴깍꼴깍 전부 삼켰다.


“정말 취하려고?”

“이 정도에요?”

술 몇 잔 들이붓는다고 어떻게 되진 않는다.

목구멍이 불타는 것 같다고 진짜 재가 되는 게 아니요, 잠시 인사불성이 된다 한들 머리와 가슴에 각인된 기억을 영원히 망각하는 것도 아니다.

끽해야 목구멍이 따끔하고, 위가 뜨끈해지는 것뿐. 그쯤이야 바싹 탄 속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지금 소연에게 필요한 건 복잡한 생각을 잠시라도 망각할 수 있는 알코올이었다.


“한 잔 더 줘 봐요.”

소연이 더 달라며 빈 잔을 살짝 흔들었다.

서준은 소연의 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자그마한 얼굴에 오목조목 들어찬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야무져 보였다.


“안 말려.”

서준이 인심 쓰듯 크리스털 잔으로 술병을 기울였다. 콜콜콜, 액체가 떨어지며 맑은소리가 났다. 소연은 술잔이 채워지자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내심 신경 쓰였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저택 말이에요. 이사님의 가족들이 자주 드나드는 별장 아닌가요? 한국 사람이 스페인의 이 너른 부지와 으리으리한 저택을 소유했다면 부모님은 분명 엄청난 재력가이실 테고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도 이 정도 저택을 소유할 재력은 충분히 있는데.”

의외의 발언이었으나 서준은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말해주기도 전에 먼저 알아버린 게 다소 신기했지만, 놀랍지도 않았다. 어차피 아버지 소유인 이 저택까지 끌어들인 것 자체가 자신에 대해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으니.


“계단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 알았죠. 이사님 어릴 적 모습인데, 배경이 이곳이잖아요. 이사님이 구원후 대표님과 사촌이란 건 진즉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분인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에요.”

말라가 저택에 도착한 이후 소연은 잘 모르는 태서준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그 자신만으로도 부족할 게 없을 태서준은 어마어마한 배경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소연은 중앙 계단에 걸린 가족 초상화를 보며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태서준이 아주 어릴 적부터 이곳에 드나들었다면 응당 부모님의 재력이 보통 어마어마한 게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흔치 않은 재벌가의 일원일 것이라고.

하지만 태서준의 집안이 이른바 서열 1위 재벌인 것까진 알지 못했다.

태석호 회장은 경제계 거목으로 TV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거물. 그러니 간혹 경제 뉴스를 보아왔던 소연이 태 회장을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으나, 그 초상화는 25년은 족히 넘은 그림이었다.

따라서 어디서 본 듯했지만, 지금과 꽤 많이 달라진 외양 탓에 그림 속의 인물이 태석호 회장인 것까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모로 태서준과 심한 집안 격차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소연은 딱 꼬집어서 물었다.


“혹시, 이사님의 부모님이 재벌이세요?”

“뭐, 대충은. 그래서.”

진짜였구나.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진짜 재벌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태서준이 더 멀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그와 이어지기 어려운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어려울 것 같아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시작이 불가능한 건 아니고요?”

“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건데? 내가 태서준이라서? 내 부모님이 재벌이라서?”

“둘 다요.”

정말 특이한 여자 아닌가. 재벌이라고 하면 다들 가까이하고 싶어 안달인데. 그래서 더 철저히 감춘 배경이고 가족이었다.

그런데 엄소연은 되려 재벌인 것에 지나친 경계심을 보인다. 지나치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마련. 그렇다면 그건 뭘까.

서준은 왠지 모르게 의구심이 생겼다.


“네게 나쁠 건 없을 텐데, 왜.”

“좋은 것도 없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 관계를 더 이어가기 곤란하다?”

“아무래도요.”

“그럼, 엄소연은 나를 일로만 보겠다는 거네?”

“……그래야 하겠죠.”

“훗…….”

누구 맘대로.

서준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웃었다. 제게서 멀어질 생각만 하는 엄소연이 괘씸해서라도 그렇게는 안 되겠다는 뜻이었다.


“어쩌지? 난 엄소연을 일로만 볼 수가 없는데.”

“설마, 저와 스캔들이 나도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허…….”

무모한 사람이 아닐 텐데, 말도 참 이상하게 한다. 소연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빨개진 눈시울을 크게 부릅떴다.


“겁 없이 아이까지 고백한 엄소연답지 않게 왜 이러실까.”

“저 겁 되게 많아요.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뭇잎이 다른 거로 보여 빽 소리칠 때도 있고요, 어쩔 땐 제 그림자에도 깜짝깜짝 잘 놀란다니까요.”

“과연…….”

그럴까.

서준은 천천히 감았다 뜬 눈으로 소연의 당황한 표정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널 볼 때마다 냉기와 열기를 오가는 내 감정들은 뭘까. 먼 곳에서 엄소연을 막연히 떠올렸을 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그런데 재회한 이후부터는 욱신거리는 심장이 꽤 불편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아이 일을 알게 된 순간엔 말도 안 되게 배신감까지 느껴야 했다. 인간이 처녀 생식을 하는 게 아닌 이상 남자가 있겠거니 생각했으니까.

한데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그 와중에 웃긴 건 자신이었다. 아이는 있지만 남자는 없다고 하는 엄소연의 목소리에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던 불쾌감이 온데간데없이 일순 사라져버렸으니까. 안도감마저 들었던 것도 같다.

말라가에 들를 때면 늘 홀로 찾았던 그 작은 해변에서 천사의 미소를 보았다. 해맑다고 해야 하나. 무구하게 반짝이던 엄소연의 얼굴이 또 보고 싶어지는 건 뭘까. 내 마음을 솔직히 말해주면 다시 그렇게 웃어주려나.

진지한 표정과 음성으로 서준이 말했다.


“엄소연이 전에 그랬지.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 그러니 네가 한 말에 책임져.”

“무슨…… 뜻이죠?”

“내 가슴에 네가 들어와 확 박혔거든. 별짓을 다 해봤는데 도무지 빠지질 않아. 그렇게 된 지 꽤 됐지. 널 처음 만난 날부터 그랬으니까.”

“……!”

소스라친 눈빛이 넘어지듯 휘청거렸다.

미간을 좁힌 소연이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서준을 빤히 응시했다.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잘 뛰던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렸고, 코끝은 시큰했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선…….

커다란 두 눈에서 참을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소나기처럼 후두두 떨어졌다.

뱃속에서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난 10달 동안 부른 배를 쓰다듬고 껴안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눈코입은 어떨지 그려볼 때마다 그 사람, 그 얼굴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자꾸만 엄습해오는 두려움과 나쁜 생각을 하룻밤 추억에 의지하며 애써 지웠다.

토닥토닥하는 따뜻한 손길이 무척이나 간절했던 나날을 그를 생각하며 홀로 견뎠다. 깜깜한 망망대해의 등불처럼 그는 늘 빛이 되어 내 어두운 마음을 환히 밝혀주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 당연한 관성 같은 거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가슴에 내가 확 박혔다는 이 남자.

그 말 하나면 충분했다.

아픔과 행복이 공존했던 그 모든 지난날이 이 순간 그저 감사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다.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렇다면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태서준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재벌가라는 사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이미 사랑하지만, 다시 그를 사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 하나 좋자고 다른 세상에 사는 이 남자의 발목을 붙잡을 순 없으니까.

견고한 그의 삶에 감히 나 따위가 걸림돌이 될 리는 없겠지만, 매끄러운 도로 위에 뿌려진 자갈처럼 거치적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더불어 다짐하건대, 지옥에 떨어진대도 내 선택에 구차한 변명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태풍 속에서도 끄떡없는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끝까지 지켜내야 할 내 아이를 위해서.

그런 의미의 눈물이었다.

***



‘세상에, 엄소연 씨가 애 엄마라네. 일단 그렇게 알고 작업해. 스토리는 그대로. 스킨십만 원래대로 다시 고치라고.’

 
엘스텔라 호텔에서 파티가 열리던 날, 권은영 작가는 보조 작가에게 전화해 대본 수정을 지시했다.

강한 러브라인이 있어야 시청자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게 평소 권 작가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온실 안의 화초처럼 여리고 앳돼 보이는 엄소연이 높은 수위를 감당해낼 리 없다는 판단에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었다.

그런데 사람을 속여도 유분수지, 미혼모였다니. 심지어 너 나 할 것 없이 남자 셋이 똘똘 뭉쳐서 내 의견을 묵살해? 다들 예쁜 외모에 홀린 게 아니면 뭐냔 말이야. 좋아, 엄소연을 그리 다들 원한다면 나는 다른 수가 있지!

라고 생각한 권 작가는 분한 마음에 시청률이라도 챙기겠다는 심보로 대본을 수정했다.

그러나 엘스텔라 호텔 로비는 그녀의 말을 담아 듣는 귀가 많았다. 그리고 그곳엔 조인하도 있었다.

인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엄소연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졸라버렸을지 모른다. 그녀가 저를 남자로 바라봐주길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며 흘려보낸 세월이 허무해 돌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인하 혼자만의 감정일 뿐. 그리고 줄곧 혼자만 매달렸다는 사실에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소연을 만나고자 했던 날, 조인하는 도곡동으로 갔었다. 그러나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아 아파트 근처를 한동안 배회하다 보게 된 건 태서준과 함께 차에 오르는 엄소연이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그 많은 스케줄을 어떻게 소화해냈는지도 모를 만큼 조인하는 계속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역시 해외 화보 촬영이 있어 속히 공항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엄소연이 왜 태서준과 스페인으로 갔는지, 그 이유라도 들어야 발이 떨어질 것 같아 CN 대표실에 무턱대고 들른 거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엄소연 씨를 후배로 많이 아끼는 건 알고 있지만, 내가 그 부분을 조인하 씨에게 시시콜콜 발설할 이유가 있을까요. 엄연히 엄소연 씨 개인사가 아닙니까.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아끼는 후배를 더 힘들게 한다는 생각은 못 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걱정도 못 합니까. 그리고 태 이사님은 왜 소연이를 스페인으로 데려간 겁니까?”

인하가 따져 묻자 원후야 말로 궁금해졌다.


“그동안 조인하 씨의 과한 행동이 좀 이상하다 했는데, 그게 핵심이었습니까? 줄곧 후배가 아닌 여자로 좋아했던 겁니까? 그래서 태 이사와 같이 스페인으로 떠난 게 그렇게나 신경 쓰인 거고?”

“…….”

돌직구 질문에 인하가 입매를 굳혔다.

말을 안 하는 것 보니 넘겨짚은 게 맞는 듯한데, 그렇다면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했다.


“조인하 씨 감정이 상대와 합의된 거라면 차후 엄소연 씨 행보에 대해서 기꺼이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감으론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스물여섯. 만으로 스물넷이면 아직 부모님 슬하에서 어여쁜 딸 노릇만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아닌가. 그런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구원후에게도 퍽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원후는 그녀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 엄청난 비밀을 품고 있는 동안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을까, 끝내 스스로 고백한 뒤에도 이후 벌어질 상황을 걱정하며 혼자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하여.

그런데 다시 올라간 서준의 룸에서 본 엄소연은 의외로 초연했다. 서준의 코트를 걸친 모습도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 두 사람 사이에 뭐라도 있는 건 아닌지 잠깐 의심도 했으니까.

엄소연에게 미온적이기만 하던 서준이 연습 상대를 자처한 것도 그렇고, 파티가 열리던 그 날에도 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스페인도 같이 간 걸 보면 미심쩍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정화 이후로 여자라면 질색하는 녀석 아닌가.

그쪽으로 깔끔한 건 내가 더 잘 알지 않나.

의심할 여지도 없다.

도리어 복병은 여기에 있었다.


“그럼 뭡니까. 엄소연 씨의 장래가 걱정되는 겁니까, 맘에 있는 여자가 태 이사에게 맘을 빼앗길까, 그게 걱정되는 겁니까.”

“말씀이 심하십니다, 대표님! 태서준에게 제가 밀릴 사람으로 보입니까. 역시 소연이가 돌아오면 차분히 이야기해 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니 펄쩍 뛴다. 역시 둘은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걸 확인한 원후는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 대화는 끝난 겁니까?”

“…….”

그걸 왜 제게 묻느냐는 듯 인하가 한쪽 눈살을 찌푸리자 그 역시 재밌다는 듯 씩 웃어버린 원후는 이만 회전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같이 나갑시다. 난 약속이 있고, 조인하 씨는 일정에 맞게 공항으로 가셔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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