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바보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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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바보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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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바보 멍청이
2023.05.05.
겨우겨우 울음은 그쳤으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얼룩진 눈가를 꾹꾹, 손등으로 눌러 닦은 소연은 서준에게 물어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이요.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어요. 근데, 저를 첫눈에 좋아하셨다고요?”
“…….”
또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서준은 대꾸 없이 태연하게 위스키를 몇 모금 마셨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꼬이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내어주었으면 응당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 내 마음을 보여줬으면 너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넌 내가 바랐던 천사의 미소는커녕 넌 눈물을 보였지. 우는 얼굴도 예뻐선. 또 울리고 싶게.
한데, 넌 무슨 까닭에 서럽게 울었을까. 왜, 무엇이 널 슬프게 한 걸까.
내 고백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그 남자가 생각났나?
설마, 아직도 널 버리고 떠난 그 못된 자식이 그토록 그리운 거야?
생각 끝에 서준이 피식 웃었다.
“그럼, 넌. 엄소연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발화한 화의 불씨를 누그러뜨린 그의 목소리는 이 밤처럼 고요했다.
“태서준, 하면 욕심 날만 하잖아요. 멋지고 잘생긴 남자니까. 그래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전 그게 다예요.”
아래로 눈을 내리뜬 소연이 또박또박 낭랑한 음성으로 답했다.
“끌려? 너는 딱 그거다?”
“네.”
고개를 끄덕이는 소연의 태도는 단호했다.
처음 본 남자를 사랑했고, 수년이 흘렀어도 그 남자를 놓지 못해 여기까지 온 사람이 바로 저라고 말할 순 없었다. 무엇이든 다 말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그와의 소중한 시간을 망쳐버릴 순 없으니까.
“그럼 나도 말해주지. 너를 좋아했어. 지금도 그래.”
“……!”
당연히 두근두근 설렐 수밖에 없는 소연의 시선이 급히 들렸다. 하지만 연이은 서준의 이야기는 그녀의 시선을 정처 없이 방황하게 했다.
“그렇지만 사람 감정이 얼마나 갈까. 영원히 식지 않을 것처럼 펄펄 끓는 마음도 언젠간 차가워지기 마련이지. 그사이에 의심할만한 일이 생기면 더 빨리 소잔해지는 게 남녀 관계고.”
지금까지의 말인즉슨 엄소연을 만나기 이전에 그랬다는 얘기였다.
그러므로 뒷이야기가 더 남아있었으나 서준은 다음 말을 잇기에 앞서 꽤 당황스러워하는 소연의 목소리 귀를 기울였다,
“사람 감정에 엄청 회의적이시네요. 누구나 다 그런 건 아닌데…….”
제발 식었으면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사랑도 분명 있는데…….
혼자 가슴에 품고만 있어도 너무 벅차게 좋아서, 그리움마저 사랑일 수밖에 없는 사람도 분명 있는데…….
그게 나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나서 그러시는지도 몰라요. 진짜 사랑은 의심보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거든요. 더 깊이 알고 싶고요. 이사님도 언젠간 그런 사랑,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으실 거예요.”
“하…….”
소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한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 하나도 어쩌지 못해 이리도 애가 타는데. 너야말로 내게로 엎어지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으면서. 그런 주제에 감히 나한테 다른 사람을, 진짜 사랑을 논해?
“좋아. 말 나온 김에 좀 더 솔직해져 볼까.”
“솔직이라니요?”
“내 말은 남녀 관계에 회의적인 내가, 넌 그렇지 않다는 뜻이야.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여자도 네가 처음이고. 그런데 넌 가까이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 같아. 왜일까. 꼭 뭔가 숨기려는 사람 같단 말이지.”
“……!”
소연은 헉! 하며 식겁했다. 멀쩡했던 심장이 갑자기 쪼그라들고 입 안은 바싹 말랐다. 방심하다 정곡을 찔린 소연이 의자에서 화들짝 일어나기까지 했다.
“수, 숨기는 거 없거든요? 그,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얘기에 말까지 더듬으며 과하게 반응하니 더 이상할 노릇 아닌가.
소연이 서준에게서 두어 발짝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어, 엇!”
엄청난 힘에 팔목이 잡아 당겨진 소연의 몸이 서준의 허벅지 위로 엉덩방아를 찧듯 넘어졌다. 그러나 도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서준의 굳건한 팔과 커다란 손에 허리가 꽉 붙들린 탓이었다.
“네가 자꾸 이러니까 수상하지 않겠어? 진짜 숨기는 게 있나 본데, 뭐지?”
“…….”
좌우로 움직이는 눈시울이 붉었다. 눈동자는 물빛이 차올라 찰랑찰랑 투명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꽉 다물려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숨까지 참은 모양인지 한순간 작은 입술이 톡 벌어졌다.
“하, 그런 거 없다니까요!”
숨을 몰아쉬며 목소리를 낸 소연은 또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렇잖아요, 태서준 씨가 어디 보통 남자예요? 잘 보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대했을 뿐인데. 이사님처럼 잘나고 완벽한 남자가 또 어딨다고. 그건 본인이 더 잘 알잖아요!”
“진짜?”
“아무렴요!”
“하, 엄소연…… 너, 정말…….”
우기는 데 장사 있나.
잘난 남자. 흔히 들어 별 감흥 없는 얘기였다. 하지만 엄소연의 입에서 나온 찬사는 느낌부터 다른 것이, 서준은 기분이 묘해졌다. 귓속을 파고든 여린 음성이 맹독처럼 빠르게 번져 전신이 느른해지는 듯도 했다.
픽, 웃어버린 서준은 차고 알싸한 위스키를 입에 물어 혀로 굴렸다. 그 액체가 목 안을 자극하자 살짝 찡그려진 고혹적인 눈매가 진한 수컷의 매력을 토해냈다.
매 순간이 A컷 화보인 그의 턱밑을 올려다본 소연은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겼다는 안도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왜.”
“아니, 그냥…….”
“마시고 싶어?”
“…….”
여태 화만 내던 사람이 갑자기 다정하게 물어오면 어쩌란 말인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 소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안착한 곳은 미니바 위에 얌전히 놓인 술잔이었다.
***
엘스텔라 호텔 라운지 바에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기다란 바에 걸터앉아 머리를 맞댄 두 남자는 다름 아닌 이 호텔의 사장과 부회장이었다.
“서준이 말이야. 지금 스페인 저택에 있대.”
“막내가? 거긴 왜?”
“몰라. 그쪽에서 촬영이 있다나 봐. 겸사겸사 들렀나 보지. 예전부터 거기 좋아했잖아. 그런데 혼자 간 게 아니라던데?”
“그 새끼, 여자랑 있구나!”
“듣기로는 그렇다고 하던데. 둘만 거기에 있는 걸 보면 그렇고 그런 사이겠지?”
“형은 그 얘기 어디서 들었는데.”
“어디긴, 아버지 비서실이지. 아마 아버지 귀에 제일 먼저 들어갔을 거야.”
“자식, 조심해야 할 텐데. 연기하는 거야 이젠 말릴 수도 없고, 결혼이라도 빨리 시켜야겠다고 저번에 나한테 그러시더라고.”
“하긴, 중동에서 사고 터졌을 때 사령관실에 전화 넣어 얼마나 노발대발하셨게. 막내아들 졸지에 잃을까 봐 사색이 다 되셨지. 그런데 어디 맘대로 되는 애여야 말이지. 아버지랑 기 싸움에서 막상막하인 게 서준이잖아.”
“크큭. 우리 형제 중에 태서준이 제일 세긴 하지.”
“그나저나 아버지가 벼르고 계신 게 어디 서준이뿐이겠냐. 너나 나나 매한가지지.”
“어? 저기 원후 왔네.”
한참 이야기하던 이준과 용준이 시선을 돌려 바 입구에서 걸어오는 큰 키의 남자를 바라봤다.
“내가 늦었나?”
“알면서 묻냐?”
“미안해, 형님들.”
원후가 두 사촌 형과 나란히 바에 앉자 공손하게 다가온 웨이터가 위스키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너희 회사 아이돌 말이야. 유럽 미국 할 것 없이 싹 다 점령했더라. 이모님은 곧 망할 거라며 아주 노래를 하시던데, 네 회사는 그 반대인 모양이지?”
“부모님 저주로 시작한 회사라 이젠 면역력 100%지. 엘스텔라 호텔도 만만치 않잖아. 형들 운영 수완이 좋아서 벌써 세 번째로 새 호텔 건립한다며.”
“아, 이탈리아? 그곳이야 태석호 회장님 지시로 증축하는 거고. 안 그래도 그쪽 상황 살펴봐야 해서 내일 출국한다.”
“워, 워, 이모부가 아니더라도 부회장, 사장이 나란히 등장하면 그쪽 임원들 퍽 부담스러워지겠는데?”
이준과 용준, 원후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터라 평소보다 큰 음성으로 즐겁게 이야기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들 뒤쪽 테이블엔 한 여자가 세 남자를 등진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니,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 자신을 최대한 숨기려는 듯 보였다. 어두운 실내의 조명은 그녀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야구모자에 후드티 모자까지 푹 눌러 쓴 노력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의 존재를 가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세 남자의 목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병원 측으로부터 회생 불가능 판정이 내려진 유병환의 입에서 산소마스크가 제거됐다.
그런데 웬걸, 그는 스스로 숨을 쉬며 눈까지 번쩍 떴다. 비록 그게 전부인 미약한 회복이었으나 모질게 살아온 만큼 목숨도 참 질긴 사람이 바로 유정화의 친부였다.
내심 좋다 말은 정화는 불안했다. 못된 친부를 단두대에 세워 놓고 빨리 죽지 않아 안달하는 제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좀체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추스르고자 이 호텔 바를 찾은 거였다.
그런데, 지금 맞닥뜨린 이 상황은 뭘까.
더 높은 곳을 허락한다는 신의 가호인가. 모르고 놓친 걸 돌아보며 안타까워하라는 신의 조롱인가.
뒤쪽에서 익숙한 이름이 처음 들려오는 순간엔 설마, 했다.
태서준이 내가 아는 그 태서준? 그럼, 저 두 남자는…….
바로 뒤에 있는 터라 두 남자의 목소리는 정화의 귀에 콕콕 박히게 들려왔다. 긴가민가하던 차에 태서준이 로열패밀리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은 건 구원후의 등장과 그들의 관계였다.
그가 집안은 고사하고 형제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물론, 단 한 번도 없다. 태서준이 거짓말은 안 했을지언정 사귀는 동안 그 사실을 입도 벙긋하지 않은 건 저를 기만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태서준과 구원후가 사촌지간이라는 것도 지금에서야 알게 된 정화는 한동안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꿈에도 몰랐던 사실 때문에 너무 놀라서. 태서준이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호, 태석호 화장의 막내아들이라는 걸 눈앞에 두고도 몰랐다는 게 몹시 어처구니없어서.
칵테일 잔을 말아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흔들림과 함께 유리잔 속의 액체도 찰랑거렸다.
충격에 휩싸인 정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에 있는 잔을 조용히 놓고 서둘러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밖에.
바를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정화는 1층 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억울함에 콱 막혀오는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제 것이 될 수 있었던 엄청난 재운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놓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쩐지! 언제 어디서나 기죽는 법이 없더라니! 고고한 기품이 장난 아니더라니! 역시 그런 거였어! 그 모습과 태도가 전부 무진한 재력에서 나오는 저력 아니겠냐고!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무슨 짓을……!
사귀는 동안 눈치챌 기회는 얼마든지 많았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시간에 그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하! 내가, 내가, 내가 바보였어!”
진짜, 진짜, 내가 바보 멍청이였다!
손에 쥐고 있던 게 진짜인지도 모르고 다른 것을 잡으려고 욕심냈던 자신이 원망스러운 정화는 헛웃음도 지어지지 않았다. 이 정신 없는 틈에도 그녀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늦었대도 시간을 반드시 되돌려 놓겠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서준을 다시 제 남자로 만들어야겠다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기필코 내 남자를 도로 찾아오겠다는 그 생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