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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내 생각이 틀렸다 (39/51)


39화. 내 생각이 틀렸다
2023.05.15.



 
슈, 슈우…… 팡! 팡팡!

깜깜한 밤, 선상 위의 레스토랑은 축제 분위기로 무르익었다.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자 뱃머리 난간에 기대선 소연은 깜깜한 밤하늘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는 불꽃을 넋 놓고 올려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서준의 시선은 제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제 얼굴에 닿은 그의 눈길을 인지한 소연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왜 저만 봐요? 불꽃놀이 안 좋아해요?”

“…….”

내가 좋아하는 건 엄소연이니까. 그 어떤 화려한 것을 내 눈앞에 가져와도 너보다 아름다운 건 없으니까.

환하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이 그저 행복한 서준은 입술 끝을 살짝 올릴 뿐이었다.

저 입술…….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현혹하는 저 잘생긴 입술…….

소연은 저도 모르게 서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매혹적인 입술이 지독하게 우아한 미소를 그려냈다.

팡팡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죽처럼 소연의 심장은 말도 못 하게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그러나 원인 모를 압박감을 애써 외면한, 설렘과 결이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이대로 말해버릴까.

현우가 자기 아이인 걸 알면 이 남자는 내게 뭐라고 할까. 화부터 낼까? 너무도 황당해 그냥 웃어버리려나? 혹시 내가 싫어졌다며 비난하려나?

평생 당하는 게 뭔지 모르고 살아왔을 사람일 테니까.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매달리며 잘못했다 애원해야 할까, 이대로 모든 걸 단념해야 할까.

말도 꺼내기 전에 겁부터 난 소연은 서글픈 눈빛으로 서준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

눈 깜빡할 사이에 그녀의 이마에 다녀간 건 매끄러운 그의 입술이었다.


“뭐예요?”

“좀 봐주라. 네가 너무 예뻐서 이거라도 해야…….”

쪽!

삽시간이었다. 소연은 뒤꿈치를 바짝 들어 말문을 막듯 서준의 입술에 뽀뽀했다.


“무슨…… 의미?”

소연은 이제 느낄 수 있었다.

저만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

언제 어디서든 저부터 배려해주는 따스한 손길.

일관되게 좋아하는 마음을 표출하는 고백과 그에 따른 진중한 태도.

지금 이 남자가 저를 흔드는 건 어떠한 계산도 가미되지 않은 진심이라는 걸. 온몸으로 부딪혀 그의 간절한 마음을 제게 전하고 있다는 걸.


“저도 오빠가 너무 멋져서 그만…….”

서준은 갸름한 턱을 살며시 잡아 갈팡질팡하는 시선을 제게 끌어왔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소연의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 얼굴을 겹쳤다.

뜨거운 숨결이 밀려들며 세련된 우디머스크 향이 후각에 훅 끼쳤다. 깜짝 놀라 커다래진 시야는 온통 태서준의 얼굴로 가득했다. 이 순간만큼은 절대 놓치기 싫은 소연은 이내 눈을 감았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커다란 폭죽이 키스하는 두 사람과 까만 밤하늘을 색색의 환한 빛으로 수놓았다.

***

서준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소연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다소 빠른 걸음이었다.

이윽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서준은 크고 예쁜 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무구하게 반짝였다.

서준은 천천히 작은 입술에 키스했다. 작은 떨림까지 미치게 좋은 서준은 오늘만큼은 엄소연을 놓치기 싫었다. 멈출 수 없었다.

그와 벽 사이에 갇힌 소연은 숨 막힘에 가슴을 들썩이며 팔다리를 움츠렸다.


“저, 저기 너무 빠른……!”

“너무 늦었다고는 생각 못 하나. 엄소연, 이제 큰일 났다.”

그의 선전포고가 짜릿했다.

서준은 소연의 얼굴 여기저기를 간질이며 돌아다녔다. 살며시 닿았다 떨어지고, 또 입술을 붙여 다디단 열꽃을 피워냈다.


“…….”

이런 건…… 연인에게 하는 그런…….

아, 모르겠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부드럽다는 말로도 한참 부족한 굉장히 감미로운 입맞춤에 이대로 녹아 없어져도 행복할 것 같은 소연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다.

미간에 실금이 그려진 서준은 탐스러운 입술을 깊이 빨아당겼다. 그 찰나에 스커트가 살짝 들렸다.

블라우스 단추를 목에서부터 하나하나 여는 손끝에서 성마름이 확연히 느껴졌다. 서준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로 뜨거운 숨이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서준의 눈코입이 소연의 눈에 아주 가까이 다가옴과 동시에 그녀의 뇌리로 무언가가 주마등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엘스텔라 호텔.

그곳을 제 집처럼 이용하는 태서준.

초상화 속에서 인자하게 미소 짓던 그의 아버님.

그림 속에 있던 아버님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도 하여 줄곧 머리에서 맴돌았는데, 소연은 이제야 경제면에서 심심치 않게 보았던 태석호 회장과 그분의 얼굴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래 맞다! 그분은 젊었을 때의 태석호 회장이 맞는 듯했다. 그렇다면 태서준의 그분의 아들이란 얘기 아닌가!

게다가 안개가 걷힌 듯한 소연의 머릿속은 또 한차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귓등으로 들었던 큰언니와 엄마의 대화가 퍼뜩 떠오른 거였다.


‘엘스텔라 호텔에서 왜 아빠 생일 케이크를 보내왔대요?’


‘호텔 이름으로 태 회장님이 보내신 거야. 네 아빠가 선물을 마다하니 케이크라도 보내야 마음이 편하시다면서.’


‘태 회장님이 아빠랑 친분이 그렇게 두터우셨어요?’


‘그렇단다.’


‘거참, 신기하네요. 평생 공부만 하신 아빠가 재벌 중 재벌인 태 회장님과 가까운 사이라는 게.’


‘소연이가 태어났을 무렵에 네 아빠가 그분 이식 수술을 집도하면서 주치의가 됐어. 그때부터 태 회장님이 네 아빠를 무척 신임하시게 된 거지.’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재벌계의 거목인 태석호 회장이 태서준의 친부라는 것. 그리고 아빠와 태석호 회장님이 보통 친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이 여태 저를 압박하며 따라붙던 실체였고, 공교롭게 이 순간 그것을 기억해낸 거였다.


“자, 잠깐요!”

소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며 블라우스의 마지막 단추에 손을 대는 서준의 손을 꽉 거머쥐었다.


“……?”

먹이를 빼앗긴 짐승의 투정이 이러할까. 더 나아가려는 손의 움직임을 제지당한 서준은 으르렁대듯 한쪽 눈썹을 불만스럽게 치켜세웠다.

그녀 이마에 입술을 댄 건 저지만, 먼저 입술에 뽀뽀한 건 그녀였다. 그 후의 키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분명 그녀의 행동은 더는 버티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안 되겠다고 말하는 건 대체 뭘까.


“나를 받아들이려는 거 아니었어?”

소연은 허겁지겁 흐트러진 옷을 정돈하며 말했다.


“맞아요. 조금 전까진 그랬어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려서 태서준 씨에게 넘어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왜!”

“미, 미안해요. 아무튼, 아니라고요! 그럼, 전 이만…….”

그가 저를 변덕스러운 여자로 취급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소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마스터룸을 빠져나갔다.


“하……!”

사람을 들었다 놨다, 아주 제 맘대로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바라게 되는 이 굶주린 갈망은 죽어야 멈춰지는 것일까. 저 조그만 여자가 뭐라고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느냔 말이지!

엄소연을 못 잊었던 시간과 그래서 그녀에게 질척거릴 수밖에 없었던 근래의 일들을 문뜩 되돌아본 서준은 화가 난 표정을 애써 무표정으로 바꾸며 저벅저벅 걸어 욕실로 들어갔다.

또다시 엄소연에게 거절당한 난감함에 열이 올라 찬물로 세수라도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엄소연이 싫어진 건 아니었다.

단지, 한 여자의 마음을 얻는 게 이리도 힘들 줄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을 뿐이었다.

***

엄소연이 태서준을 갑자기 밀어낸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태서준을 받아들이고, 꼭꼭 숨겨왔던 것도 전부 다 털어놓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솔직해지려는 순간, 중앙 계단에 걸린 초상화가 줄곧 거슬렸던 이유를 깨달아버렸다.

자세히는 그의 아버님 모습이 왠지 낯익다 했었는데, 결국 소연은 오늘에서야 그분이 누군지 정확히 기억난 거였다.

재계 1위의 재벌가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단순 재벌이라는 것과 엘스텔라 그룹은 차원이 달랐다. 서준이 자신을 받아들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제 방으로 돌아온 소연은 얼마간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멍을 때렸다. 그리고 얼마 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캐나다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우리 현우, 저녁밥은 먹었어?”

-웅. 함머니가 한국 가려면 많이 커야 한다고 해떠요. 그래서 많이 먹었또요.

“훗, 잘했어, 예쁜 내 새끼! 우리 현우, 서울 집에 오면 엄마가 좋아하는 거 많이 해 줄게. 뭐가 제일 먹고 싶어?”

-키키킥, 혀누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거면 다 좋은데.

“그래. 뭐든 말만 해. 엄마가 다 해 줄게.”

눈물이 왈칵 솟구치는 걸 겨우 참아내느라 잠깐 숨을 멈춘 소연이 다시 말했다.


“현우야,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셔?”

-할부지는 옆에 이또요. 잠깜만 기다료 봐요, 엄마.

현우가 전화를 바꿔주자마자 푸근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다, 소연아.

소연은 평상시와 똑같은 안부를 이야기하며 은근슬쩍 태 회장에 관해 물었다.


“아빠, 엘스텔라 호텔 태석호 회장님 잘 아시죠.”

-그렇다만. 그건 왜.

“아니, 경제학 공부하는 친구가 자기 논문에 그분을 언급했는데, 저도 괜히 궁금해져서요. 어떤 분이세요? 성격이나 가치관 같은 거 말이에요.”

-허허, 글쎄다. 한마디로 호인이시긴 하지. 하지만 막대한 재력을 일구신 만큼 아주 냉정하고 정확한 성정은 보통 사람은 흉내도 못 낼 거다.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으시거든. 맘만 먹으면 못 할 게 없으시고. 무엇보다 무서운 통찰력이 대단하신 분이란다. 더 말해주련?’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빠.”

아빠와 통화 이후 소연의 생각은 더욱더 복잡하고 깊어졌다.

맨 처음 초상화를 보고 그가 재벌 2세라는 걸 알았을 때 저와 태서준은 다른 세상의 사람임을 실감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그를 마음에서 잘라내기엔 뭔가 미련이 많이 남았다. 해서, 다시 용기를 내 태서준의 여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

그를 가지는 건, 그의 여자가 되는 건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태서준 하나만 보면 모를까, 집안 어른들의 이해관계까지 엮여 있었다. 그만큼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그의 집안이 재벌가라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다. 그래도 태서준이 저를 좋아하는 이상 아이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태석호 회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소연은 깨달았다.

자칫 아이만 빼앗길 수 있겠다는 불안감. 그의 부모님과 제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힐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태 회장이 아이만을 거둬가겠다 원한다면. 그래서 그 어마어마한 재력과 거대한 힘으로 아이를 제게서 빼앗아 간다면…….

안 돼! 절대 그럴 순 없어!

아이와 헤어지는 끔찍한 상황은 정말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므로 소연은 여지없이 서준을 밀어내야만 한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이와 아이 아빠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이이니까!

털석, 하며 두 무릎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곧이어 머리도 아래로 향했다.

소연은 바닥에 엎드린 채 한참을 꼼짝하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숨죽여 게워내는 그녀의 여린 어깨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



-자네들을 카디스로 보내고 저는 여자랑 단둘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네, 회장님.”

-알았네. 내가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여, 여보세……하!”

말하는 중에 전화가 뚝 끊겼다.

에라 모르겠다는 듯 핸드폰을 탁자 위에 던진 봉 실장이 침대 매트리스에 풀썩 누웠다. 그리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천장을 쳐다보며 눈만 느리게 끔뻑거렸다.

옆 침대에서 봉 실장을 쭉 지켜보던 박성호가 물었다.


“태 회장님이시죠?”

“그래. 다 아시면서 내게 확인 사살하신 거라 발뺌할 수가 없네.”

“허허…… 재벌가는 가족끼리도 그렇게 감시를 하나?”

“…….”

어디 가족뿐일까. 주변 사람인 저까지 달달 볶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닐 텐데. 봉 실장이 알면서 왜 묻냐는 눈초리로 박성호를 뚱하게 바라보자 성호는 이내 턱을 위아래로 크게 끄덕거렸다.


“암요, 알죠, 알아. 그래도 적당히 하셔야겠어요. 실장님이 양다리인 걸 이사님이 아시는 날엔 무사치 못할 예감이 팍 오거든요.”

“너도 몸조심해야 할 거다. 일단 나부터 죽겠지만 그다음은 너일 테니까.”

“그건 좀 억울하죠. 전 옆에서 주워들은 게 전부인데.”

“이사님께 보고 안 할 거잖아.”

“크크큭, 거야 물론이죠. 제가 봉 실장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사모하는데요.”

“그러니까.”

“그나저나 태 회장님은 곧 졸도하시겠는데요?”

이제 쥐도 새도 모르게 엄소연의 신상이 탈탈 털릴 일만 남았다는 걸 박성호와 봉 실장이 모를 리 없었다.


“전에도 태 이사님이 미리 정리하셔서 다행이었지, 유정화 씨 일을 뒤늦게 아시고 태 회장님이 얼마나 노발대발하셨어요.”

“말은 제대로 해. 나한테만 난리 치셨지, 정작 이사님께는 아예 모른 척, 잔소리도 한마디 안 하셨잖아.”

“이번엔 상황이 좀 다르잖아요. 아이가 있는 걸 아시면 어떻게 나오실는지.”

말 그대로였다. 엄소연이 미혼모인 데다가 연애는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태서준이 여자에게 이렇게나 푹 빠져 몰두하는 건 처음 봤기에 봉 실장은 태 회장의 불호령이 곧 떨어지지는 않을까, 괜히 걱정부터 앞섰다.


“맥주 있냐?”

“당연하죠. 아까 호텔 앞 마트에서 싹쓸이하다시피 사 왔거든요.”

봉 실장이 묻자 냉장고 쪽으로 냉큼 이동한 박성호가 아주 작정한 듯 맥주 캔을 종류별로 꺼냈다.

일은 윗사람이 저지르는데, 뒷감당은 아랫사람 몫인 갑갑한 현실. 그래도 상사의 로맨스 덕분에 연이틀 푹 쉬지 않았나. 그리고 내일 오후까지는 자유의 몸이었다.


“안주도 시킬까요?”

“먹고 죽은 귀신에 때깔도 좋다잖아.”

“좋습니다!”

두 남자는 최후의 만찬이라도 즐길 기세로 룸서비스까지 거하게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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