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 말이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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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그 말이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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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그 말이 다야?
2023.05.26.
감독의 외침을 들은 서준은 소연에게 뭐라 뭐라 귓속말을 간단히 건네고 침대에서 유유히 내려갔다.
“와, 진짜!”
감탄사를 연발하며 부리나케 뛰어온 도순은 모포로 소연의 헐벗은 상체부터 폭 감쌌다. 그러면서 히죽 웃는 도순의 얼굴이 시뻘겠다.
“진짜 후덜덜했다니까!”
“뭐가.”
“둘이 어찌나 리얼하게 꽁냥대는지, 이불 안에서 진짜 뭐라도 하는 줄. 내 심장까지 벌렁벌렁하더라니까.”
여도순이 무엇을 상상했건 그 이상인지라 지레 뜨끔해져 물은 것인데, 안 들은 것만 못했다.
민망해진 소연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 그것 말곤 할 얘기가 없어?”
“물론 연기도 멋졌지.”
“누가.”
이제야 조금 긴장의 끈이 놓아진 소연이 실눈으로 도순을 바라보았다. 태서준이야, 나야? 라고 추궁하는 것처럼. 그러나 역시 열렬한 팬심은 거짓말을 못 했다.
“그야, 우리 오빠지.”
“그럼, 난?”
“히힛, 농담이야. 둘 다 끝내주게 멋지고 아름다웠어.”
“정말?”
“속고만 살았나.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너도 저기 가서 오빠랑 같이 확인해 보든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방금 촬영한 것을 모니터링하는 태서준과 은연중 눈이 마주친 도순이 살짝 눈인사를 건네자 턱을 가볍게 끄덕인 서준은 윤 감독과 다시 촬영된 화면을 돌려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사님, 윤 감독님!”
그런데 별안간 세트장에 나타난 오민정이 두 남자 사이로 덥석 끼어들었다.
“오늘 촬영이 진짜 궁금해서 카디스에 도착하자마자 여기부터 들렀는데, 벌써 끝났어요? 어, 이건가?”
오민정의 촬영은 내일부터지만 오늘 신이 궁금해 현장에 들른 모양이었다. 윤 감독은 이래저래 시끄러워질 듯하여 민정의 시선이 닿아 있는 모니터를 서둘러 꺼버렸다.
“뭐, 별다를 게 있겠습니까. 나중에 편집된 거로 봐요.”
“그래도 일부러 왔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요. 어디 저도 한번 보여주시라고요.”
“어허, 나중에 보시라니까.”
좀 도와달라는 듯 슬쩍 가로젓는 윤 감독의 눈짓을 받은 서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오민정 씨, 그러지 말고 숙소로 갑시다.”
“네? 지금 태 이사님이 저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그럼 누구겠습니까.”
대답하는 동시에 서준이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하자, 민정은 헤실거리며 그의 팔에 찰싹 엉겨 붙어 세트장을 나갔다.
얼마 후 소연도 숙소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하지만 태서준과 오민정이 다정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자꾸 떠올라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눈에선 바싹 열이 오르고 가슴은 다치기라도 한 듯 아릿하게 저며왔다.
‘잘했어. 내일도 이렇게만 해.’
심지어 온종일 같이 있었으면서도 그는 고작 귓속말로 그 한마디를 제게 건넸을 뿐이다. 하기야,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한 게 어디 오늘뿐인가. 태서준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는 촬영 첫날부터 지금껏 계속되고 있었다.
“허! 그 말이 다야?”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푸념은 오민정이 나타났을 때부터 더 심해진 속앓이 때문이었다.
마지막 촬영까지는 앞으로 이틀 남았다.
너무 속상한 나머지 확 달아오른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린 소연은 그날이 빨리 오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바싹 타는 제 마음이 질투 때문이라는 것도 모른 채.
***
스페인 현지 촬영은 어느새 여섯째 날로 접어들었다.
쉼 없는 강행군으로 정신없이 바쁜 날이 이어지는 와중에 소연은 한 번씩 울컥할 때가 많았다.
분장사가 공들여 화장해준 얼굴이 번질까, 눈물 어린 눈동자를 들어 하늘을 우러른 게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싫다고 밀어내도 포기하지 않겠다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서준은 카디스 일정이 진행되는 내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오직 제게만 그러했다.
그래서 소연은 더 섭섭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를 밀어내며 이 상황을 자초한 것 아닌가. 그러므로 아무리 울컥하고 힘들어도 차가운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스스로 불러온 결과지만 속상함은 이성과 별개로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렇게 참아왔던 감정이 강둑이 허물어지듯 툭 터져버린 건 오늘 촬영장에서였다.
태서준의 변함없는 무심함과 맞물린 소연의 눈물 연기는 현장을 지켜보는 이들의 코끝마저 시큰하게 만들었다. 웬만해선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윤 감독의 눈시울도 한동안 먹먹함을 놓지 못했다.
엄소연의 물오른 연기를 다들 입 모아 칭찬했으나 정작 소연은 묵직해지는 마음이 버겁기만 했다. 현지 촬영이 종료되면 태서준의 사늘한 뒷모습마저 그리워질 게 뻔했으니까.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한 정적이 유난히 빨리 찾아온 듯한 저녁이었다.
마지막 촬영을 하루 앞둔 소연은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서준은 한 달 정도 스페인에 더 머물며 촬영을 계속해야 하지만, 엄소연은 내일이면 맡은 역할이 모두 끝나고 모레 아침이면 이곳을 떠난다.
그렇다고 귀국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흘 전, 드라마의 대대적인 홍보를 위해 방송국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한여름 안방극장에 선보일 <태양의 주인> 제작 현장을 미리 공개했다.
그와 더불어 엄소연의 일도 세상에 알려졌다.
이는 CN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큰 그림에 따라 기획실 주 팀장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으로,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만큼 오히려 큰 이목을 끌 수 있겠다는 계산과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관심이 쏠리기 전인 이때가 시기상 나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사람의 색안경을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되었다.
엄소연이 누군데?
그 어린 나이에 미혼모라고?
신인인데 그 대작 드라마 조연을 단번에 맡았다고? 예쁜가? 연기를 잘하나?
세상 사람들은 이 순간에도 그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신랄하게 입방아를 찧었다. 이런 시기에 그녀가 귀국한다면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 아니겠는가.
구원후 대표는 곧 여론이 잠잠해질 테니 그때까지만 해외에서 시간을 끌어 달라고 여도순에게 당부했었다.
그런 연유로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며 구 대표의 뜻을 소연에게 전한 도순은 침대에 엎드려 스페인과 유럽 여행지 정보를 꼼꼼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넌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없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고심하던 도순이 묻자, 곰곰이 생각하던 소연이 대답했다.
“글쎄. 너나 나나 같지 않겠어?”
“그럼 내가 알아서 정할 테니 나중에 불평이나 하지 마라?”
“그럴 일 없어. 너만 있으면 난 어디든 좋아.”
“내가 친구 하나 잘 키운 보람은 있네!”
씩 웃어 보인 도순이 이만 노트북을 끄고 잠을 청하는 동안 소연은 조심조심 룸 밖으로 나왔다.
모래알이 목 안을 뒤덮은 것처럼 서걱대고 가슴이 답답한 그녀가 향한 곳은 호텔의 1층 로비였다.
늦은 시간인데도 로비 한쪽에 자리한 카페테리아는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이 불쑥 생각난 소연은 그쪽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 걸음은 몇 발짝 나아가지 못했다.
로비 한가운데 우뚝 선 소연의 시야에 들어온 건 유리 벽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태서준이었다.
본능적으로 건물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소연은 생각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들키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서 눈만 내밀어 그를 훔쳐보는 그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볼까.
‘내 촬영은 내일이면 끝이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일 때문이라도 다시 대면해야 할 사람이잖아. 많이 좋아하면 미움도 크다는 건 알지만, 언제까지 그 앞에서 작아지기만 할 거야.’
소연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고, 누군가 보더라도 우연히 만난 거로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텅 비었다고 생각한 카페 테이블엔 태서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민정과 함께였다.
이 늦은 저녁 태서준과 오민정은 오붓한 분위기 속에 마주 앉아 있었다. 서로에게 친근한 눈빛을 건네며. 심지어 두 사람의 표정엔 화사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면, 요 며칠 나를 본체만체한 게 오민정 때문이었어? 말라가에선 나를, 여기에선 오민정이 오길 기다린 거야? 아니, 둘이 언제부터 저리 친했는데?
차라리 못 끝낸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내가 그 말에 얼마나 설렜는데. 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설렜는데. 진심으로 다가오는 당신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프고 미안했는데.
반면,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가 아니어도 잘 지내는 그에게 조금은 덜 미안해해도 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변덕스러운 그의 태도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소연이 더 기막혀하는 건 실망스러운 이 순간에도 태서준이 너무나 보고 싶고 간절하다는 거였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차갑게 대해도, 내게 진심이 아니어도,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있어도, 당신이란 남자를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는데…….
그게 나인데…….
짝사랑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다시 제자리인 자신이 정말 한심했다. 소연은 허탈한 실소를 입술에 올리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룸으로 돌아온 소연은 어지러운 마음을 끌어안고 시체처럼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한참 동안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잠들지 못하는 그녀의 몸은 어느새 불덩어리였다. 날카로운 갈고리가 전신을 들쑤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연은 이깟 열 따위가 무언가 싶었다.
소중한 걸 지키고자 소중한 걸 놓아야 하는데.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어 그를 버려야만 하는데.
펄펄 끓는 몸보다 마음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 더 힘든 소연은 밤새도록 뜨거운 숨을 조용히 내쉴 뿐이었다.
***
어느덧 밤이 물러가고 유난히 밝은 아침이 되었다.
드라마 제작진의 스페인 일정은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소연은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촬영 단계를 밟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화창한 날씨였으나 이상 기후의 연장선에 놓인 바다는 계속 기온이 뚝 떨어져 수면의 파고마저 높았다. 그 때문에 진즉 끝냈어야 할 수중 촬영이 이제껏 미루어졌다.
하지만 해외 로케 일정이 워낙 빡빡한 탓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오늘이었다.
해서, 위험 부담은 있으나 그만큼 안전에 만반을 기한 중형 크루즈 선박 하나와 최첨단 영상 장비를 실은 특대형 보트 여러 대가 드디어 한 시간 전 망망대해에 띄워졌다.
어제 카페에서 보았던 것처럼 오민정은 배 위에서도 태서준 뒤만 쫄쫄 따라다녔고, 오늘도 그는 자신에겐 눈길 한번 안 주면서, 민정이 뭔가를 물을 때는 곧잘 반응해 주었다.
꽤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소연은 입술의 안쪽 살을 질끈 물며 이 괴로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제 곧 바다에 들어가야 할 배우는 단 두 명.
“엄소연 씨, 준비되셨으면 슛 들어갈 위치로 가주시죠!”
촬영 스태프의 힘찬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분장사의 손길에서 이제 막 벗어나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 소연에게 쏠렸다.
서준 역시 곧 입수해야 하기에 제 위치로 이동 중이었다.
그 두 사람이 반대편으로 걸으며 한 지점에서 엇갈리는 그 순간이었다. 파도에 부딪힌 배가 출렁거렸다. 그에 따라 약간 비틀거린 소연의 어깨가 서준의 몸에 닿으며 두 눈길이 서로를 향했다.
“긴장하면 안 생길 사고도 생기는 거 알지?”
“…….”
선배가 선배로서 해주는 걱정일까.
카디스에 온 이후 극심한 온도 차가 뭔지 여실히 느끼게 해준 남자가 제게 한마디 건넨다고 이곳에 있는 동안 가슴에 성에처럼 낀 얼음 알갱이가 한순간 녹는 건 아니었다. 소연이 대꾸 없이 제가 가야 할 곳으로 이동한 건 그 때문이었다.
드디어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뱃머리 끝에 섰다.
머리에 쓴 베일이 바닷바람에 길게 휘날리며 가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소연의 크고 둥근 눈시울에 고인 투명함은 눈물이었다. 그 눈물방울이 툭 터져 새하얀 뺨을 적시는 동시에 몸의 중심이 앞으로 기울더니, 곧이어 그녀의 몸체가 짙푸른 바다로 떨어졌다.
첨벙!
낙하하며 벗겨진 베일은 불새가 나는 듯 바다 저 멀리 날아갔으나 소연은 하얀 물보라와 함께 물밑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다 거센 물살에 전신이 휩쓸린 건 한순간이었다.
그때, 멀리에서 빠르게 헤엄쳐 온 남자가 크고 유려한 신체로 소연의 작은 몸을 휘감았다. 보호받는 느낌에 모든 것을 내맡기듯 소연도 서준을 보듬어 안았다.
이어진 두 남녀의 입맞춤은 사랑하는 연인처럼 더없이 애틋했다.
모자란 호흡을 서로 나눠마시는 순간에도 소연은 그녀를 걱정하는 서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몸이 해류에 떠밀리며 집중력이 흔들렸던 몇 초 전, 하마터면 저로 인해 NG가 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때마침 나타난 태서준 덕에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그 안도감이 너무 커 다른 생각이 껴 들을 틈도 없는 거였다.
그 상태로 서준과 소연은 점이 될 때까지 바닷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하아, 하아…….”
수면 위로 두각을 드러낸 소연이 숨이 딸려 헉헉댔다.
곧이어 서준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하던 스태프들이 두 배우를 작은 보트에 서둘러 태웠다.
“자, 이제 오민정 씨 차례입니다!”
서준과 소연의 촬영이 무사히 끝나자 조 감독이 소리쳤다.
“앗, 차가! 에잇…….”
바닷물에 잠시 몸을 담그는 것도 마냥 불만인 민정이 마지못해 인상을 찡그리며 입수했다. 그리고 몇 초 사이에 다시마 줄기 같은 그녀의 머리가 수면 위로 불쑥 올라왔다.
“푸아!”
잠깐 참은 숨을 거칠게 터트린 오민정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분주히 돌아가던 카메라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이로써 수중 촬영은 무사히 종료.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뱃멀미로 힘든 사람도 있으니 서둘러 육지로 이동합시다!”
오늘까지 촬영된 영상은 드라마 시작과 끝은 물론 중간중간 여러 번 삽입될 것이기에 그만큼 심혈을 기울인 것인데, 생각했던 그림보다 훨씬 괜찮게 나왔다.
윤 감독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우렁찬 건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