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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저 새끼, 진짜였어? (43/51)


43화. 저 새끼, 진짜였어?
2023.05.29.



 
바짝 긴장한 탓이었을까.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것도 같고, 여태 잘 가누던 몸마저 갑자기 힘이 풀리는 느낌이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신 눈을 못 뜰 것 같은 기시감마저 든 소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려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점차 묵직해지는 눈꺼풀은 그녀의 의지를 꺾고 어느 틈에 스르르 감겨버렸다.

그만 고집 피우고 나한테 와.

서준이 이 말을 소연의 귀에 넌지시 흘리기도 전에 말이다.

그랬다.

태서준은 평소와 달리 늘 타고 다니던 자신의 차와 함께 다니던 두 남자를 호텔 숙소로 보내버리고 다른 배우들과 섞여 큰 승합차로 이동 중이었다. 그것도 여도순이 앉아야 할 소연의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서 말이다.

덕분에 도순은 맨 뒷좌석에서 또래 매니저들과 재밌게 떠들고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듯한 소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준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사람이 제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 날부터 모든 행동을 조심했다. 그 때문에 무심하게 굴어야 했던 자신이, 순간순간 와락 안고 싶은 걸 아닌 척했던 시간이 덧없게만 느껴져서.

종종 당황스러워하는 엄소연이 재밌기도 했지만, 마냥 즐겁지도 않았다. 그녀를 멀리한다는 자체가 자신에게 벌이 되는 것도 같았으니까.

이만하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준 듯도 싶은 서준은 오늘 밤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단둘이 식사하여 앞날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싶었다. 때때로 제게 스치는 그녀의 깊은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 없어 자신감도 있었기에.

그러나 내일부터 한동안 엄소연을 볼 수 없게 된다. 그 성마름 앞에 더 이상의 기다림은 무의미했다. 당장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이렇게 잠들어버리니…….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한 승합차에서 배우들이 차례차례 내렸다.


“엄소연 씨.”

서준이 곤히 잠들어 꼼짝하지 않는 소연을 불렀다. 그러자 엄소연을 깨우는 건 제 전문이라는 듯 뒷좌석에서 냅다 다가온 도순이 말했다.


“제가 데리고 내릴게요.”

잠시 뒤, 차에서 내린 도순은 양손에 잔뜩 들린 짐을 가지고 호텔 안으로 곧장 들어갔고 소연은 인도에 올라서자마자 얼음이 된 듯 움직임을 멈췄다. 호텔 회전문 근처에서 촬영 스태프와 대화하는 태서준과 시선이 딱 마주쳐서였다.

뭐라고 하지? 그동안 감사했다고 하면 될까? 아니, 그건 좀 삭막하잖아. 사람이 많은 곳이니 그냥 쿨하게 악수라도 해볼까? 아니면…….

그에게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소연이 한 발 앞으로 내디디는 찰나였다.


“나, 소연 씨한테 정들었나 봐. 한국에 가면 또 볼 건데 엄청 섭섭한 거 있지?”

극 중 태서준의 시종역을 맡은 중견 여배우 한 명이 소연에게 다가와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저도 그래요. 그동안 다들 잘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 촬영은 끝났지만 일산 촬영장으로 종종 찾아뵐게요.”

“그렇게라도 다시 보면 되겠다. 내일 귀국하지?”

“네.”

사정이 있어 귀국을 미뤘다는 시시콜콜한 얘기는 불필요했다. 말을 줄인 소연이 아쉬운 표정을 짓자, 중년 여배우가 태서준 옆에 딱 붙어 있는 오민정을 흘긋 일별하며 한 톤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민정 씨가 아무리 잘해도 여기에선 엄소연 씨가 진짜 주인공이었어. 분위기를 만드는 연기 몰입감까지 최고였다고. 얼굴만 예쁘다는 선입견 때문에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소연 씨가 너무 잘해줘서 다들 다시 봤다고 하더라. 나도 그렇고.”

“어휴, 과찬이세요.”

어디까지나 덕담이겠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소연이 수줍게 웃었지만, 그 미소는 얼마 못했다.


“어라! 유정화 씨, 조인하 씨 아녜요? 저기 봐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두의 눈길이 태서준과 오민정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소연의 눈에도 유정화와 조인하가 정확히 보였다.

특히 유정화를 보자마자 일련의 악몽 같은 일들이 퍼뜩 떠오른 소연의 맥박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었고, 몸은 그 자리에 붙박이듯 얼어붙고 말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서준 씨.”

매력적인 미소를 도도하게 지어 보인 유정화가 서준에게 꺼낸 첫마디는 반말이었다.

하지만 정화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소연의 눈에 들어온 건 크게 한 번 흔들리고 이내 고요히 가라앉는 태서준의 눈빛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태서준은 아직도 유정화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연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4년 전의 태서준은 유정화를 잊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다 할 사람 같았다. 유정화는 얼마 전까지도 그의 애인인 척했던 일을 들먹이며 저를 겁박했다.

더불어 이 순간 새롭게 깨달은 건 저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화 언니!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요?”

민정은 제게 눈길도 주지 않는 정화에게 버럭 성질부터 냈다. 물론 친근감을 표현하는 오민정만의 방식이었다.


“글쎄.”

“대답이 왜 그래요? 사람 실망스럽게!”

그걸 모르지 않는 정화는 약간의 농담과 인간미 넘치는 모양새를 취하며 민정의 등을 토닥토닥 감쌌다.


“훗, 발끈하긴. 내가 우리 민정 씨 아니면 여길 왜 왔겠어? 겸사겸사 윤 감독님 작품 응원하러 왔지.”

밀라노에서 친해진 오민정과 유정화는 그곳에서 며칠간 어울리며 매우 돈독한 사이가 됐다. 아니, 민정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그 정성이 빛을 발하는 이 순간만큼은 정화도 진심이었다.

유정화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인하의 눈길이 낯빛이 유난히 창백한 소연에게 닿았다.

그때였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소연이 차도에 내려선 순간, 호텔 앞으로 달려오던 자동차가 급정차했다.

끼이이이이……익!

스키드마크가 그려진 아스팔트 바닥에는 쓰러진 엄소연이 있었다.

***

1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영화 세트장 일부가 무너지며 머리를 다친 소연은 실신한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 그 일은.

다행히 신속한 응급 처치로 뇌 손상은 피했으나 희귀 혈액형인데 과다 출혈이라 수술보다 피를 구하는 게 더 시급했다. 만일 천운이 닿지 않았다면 소연은 그때 삶 전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큰일을 겪었으니 사고 트라우마는 얼마나 지독했을까. 그래도 소연은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 유정화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당시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병원에 입원해 있은 지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상처는 아물었어도 사고의 공포는 가시지 않았을 그 무렵, 유정화가 병실로 찾아왔다.


‘눈엣가시가 너였는데 마침 이런 일이 생겨버렸네. 그 정도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운도 참 좋지. 하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따라 줄 것 같아?’

 
그녀가 나직이 했던 그 말.


‘같은 일을 하니 좁은 바닥에서 또 부딪힐 순 있겠지만, 두 번 다시 내 눈앞에서 얼쩡거리거나 거슬리는 일은 없었으면 해.’

 
유정화는 엘스텔라 호텔 바에서 처음 본 그때부터 엄소연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소연은 정체 모를 태서준의 여자가 유정화였다는 걸 그때 알았다.


‘네가 나를 잘 피해 가란 얘기야. 또 당하기 싫으면.’

 
특히나 소름 끼쳤던 정화의 마지막 말은 듣고도 당최 믿을 수 없었다. 극악한 진실이자 악랄한 범죄였으니. 그러나 그 사건은 의혹이 있었음에도 유감스러운 사고로 조용히 종결됐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 만에 유정화와 정면으로 마주친 소연은 그 끔찍한 사고의 악몽이 되살아난 거였다.

또 당하기 싫으면…….

당하기 싫으면…….

싫으면…….

병실에서 들었던 유정화의 그 목소리가 머리에서 광광 울렸다. 그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암전된 소연은 다쳤던 머리까지 욱신거려 뒷걸음질 쳤다. 어느 순간 까무룩 의식을 놓아버렸다.

소연은 호텔 의무실 침상에 누워 있었다.

호텔 지배인이 급히 부른 의사는 아무런 진찰도 없이 해열제만을 처방하고 돌아갔다. 곧 열이 떨어질 거라고, 이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만 말하며.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열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경구 투입 약이 잘 듣지 않는 것 같아 한 번 더 약을 썼으나 40도를 넘나드는 고열은 여전했다. 의식을 잃은 이후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소연은 죽은 듯 누워만 있었다.


“저…… 소연이 좀 잠깐. 제가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땅이 꺼지라 한숨만 푹푹 내쉬던 도순이 소연을 부탁하며 의무실을 서둘러 빠져나가자, 조인하는 저가 보호자라도 되는 양 침상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거봐…… 나밖에 없잖아…….”

메마른 물수건을 다시 적셔 소연의 이마에 올린 인하는 혼잣말을 계속 읊조렸다.


“네 친구도 나가버리잖아. 아픈 네가 지겨워서. 그러니까 어서 받아들여. 엄소연한테는 나밖에 없다는 거.”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대꾸할 리 있겠는가.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오래도록 묵혀 둔 속마음을 조금 내비친 거였다. 하지만 더 욕심을 내고 싶은 인하는 손끝으로 소연의 입술을 느리게 더듬었다.

한참 그곳에 머문 손이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듯도 했다.

정신은 없어도 그의 음심을 느낀 걸까. 메마른 입술이 미약하게나마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인하는 다시 소연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인하가 의무실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 소연의 입술 감촉에 너무 심취한 탓이었다.


“그 손 떼.”

“……!”

사나운 이빨을 감춘 듯한 낮은 음성에 인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강한 자의 눈빛이 어찌나 매섭게 꽂히는지, 인하의 상체가 약간 뒤로 밀려났다.


“너 같은 놈을 스토커라고 하지.”

“뭐?”

“미친…….”

소연의 상태부터 살핀 서준은 판단이 섰는지 우직한 팔로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거야!”

“…….”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에 입술을 딱 다문 서준이 의무실을 조용히 나가려 했다. 그러나 인하는 몸으로 문 앞을 막아섰다.


“당신 지금 뭐냐니까!”

“고열에 말라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만 보는 넌 뭔데.”

“다녀간 의사가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

“지금 손쓰지 않으면 위험해. 비켜!”

“무슨 헛소리…… 흑!”

“너야말로 개소리 집어치워!”

의사로서 하는 경고에도 인하가 비켜서지 않자 간단히 무릎 한방으로 방해꾼을 해결한 서준은 곧장 그곳을 나갔다.

태서준은 엄연히 의사 면허가 있는 의료인이었다.


“하…….”

아무 소리도 못 낸 채 조인하는 입만 벙긋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느꼈다.

여유와 의연함의 대명사인 태서준도 엄소연 앞에선 그렇지 않다는 걸.

저 새끼, 진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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