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내어 주는 법을 모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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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내어 주는 법을 모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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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내어 주는 법을 모르는 사람
2023.06.02.
가만 생각해 보니 다른 의사가 지척에 있었다.
좀처럼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소연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던 도순은 도움을 청해 보고자 서준의 룸으로 향했다.
조인하가 쓰러진 엄소연을 의무실로 옮겼고 호텔 직원들은 신속하게 대처했다. 그러니 여러모로 태서준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왕진 의사가 이 지역에서 악평이 자자한 사람이라면 다른 얘기 아닌가.
서준이 1층 로비로 내려간 건 그 형편없는 의사가 다녀갔고 엄소연은 아무런 차도가 없다는 봉 실장의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
그렇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서준과 바삐 걸어오는 여도순이 호텔 로비에서 마주쳤다.
느린 걸음이 사치라는 걸 일깨워준 건 우습게도 조인하였다.
엄소연이 그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을 도순의 입을 통해 듣는 그 순간, 조금 남아 있던 여유로움마저 증발해버린 서준은 재빠르게 의무실에 있던 소연을 자신의 룸으로 데려왔다.
애지중지 품에 감싼 것부터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는 것까지. 아픈 엄소연을 다루는 서준의 행동은 더없이 애틋했다. 그리고 그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배어 나온 순수한 감정이었다.
“하…… 엄소연…….”
긴 한숨에 화난 목소리를 나직이 섞는 것마저 심연 밑바닥에서 우러난 애타는 걱정이었다.
“넌 목숨이 두 개라도 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무모하게 굴 수가 있어!
갑자기 오른 열이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분명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이 미련하고 독한 여자는 차디찬 물에 스스로 들어갔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다에 몸을 던졌다. 아주, 씩씩하고 장렬하게 말이다.
쇼크사가 괜히 있을까.
불상사는 면했더라도 성치 않은 몸에 찬물이 부딪히며 살이 찢겨나가는 고통이 있었을 텐데. 그 통증을 어찌 참아낸 것인지. 인당수에 몸을 바친 심청이도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엄소연을 탓한들 제일 무딘 사람은 저였다.
촬영하는 내내 분명 시름시름 앓았을 것인데.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상할 만큼 깊이 잠든 그녀를 보고서도 미처 몰랐으니까.
서준은 무감각한 자신에게, 그리고 소연의 옆을 지키고 있던 조인하의 모습까지 더해져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자책하는 것과 엄소연에게 치근댔던 조인하를 처리하는 문제는 차후 일이었다.
미간을 잔뜩 좁힌 서준은 와이셔츠 윗단추를 몇 개 풀고 소매를 팔뚝 위로 걷어 올렸다. 그리고 곧장 열 떨어뜨리기에 몰입했다.
식은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무릎 뒤와 겨드랑이 할 것 없이 전신 곳곳에 아이스팩을 대었다. 바싹 마른 입술엔 오일과 수분을 충분히 보충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객실에 발도 들이지 않은 봉 실장은 문 앞에서 서준이 가져오라고 지시한 의료품을 건네고 물러갔다.
앓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가느다란 숨으로 겨우 색색거릴 뿐인 그녀는 혈관마저 희미했다. 그래도 단번에 찾아내 링거 바늘을 꽂고 약품을 투여한 서준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얼마 후, 고열로 무너졌던 몸이 서서히 회복되는 듯도 했다. 그러나 아직 방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열의 오르내림은 밤새 반복될 것이기에.
짙은 어둠이 물러간 푸른 새벽.
의식이 약간 돌아온 자그마한 몸이 뒤척였다. 그러나 다시 잠잠해지며 소연은 더 깊은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안정제를 투여한 탓이라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 더 자.”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서준은 이제야 한시름 덜어냈는지 그녀 옆으로 몸을 뉘었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작은 숨소리가 왜 이리 듣기 좋은지 모르겠다. 서준은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게끔 소연을 좀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피로에 물든 눈을 천천히 감았다. 세 시간 후에 있을 촬영 때문이라도 조금이나마 자 둬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을 붙인 서준의 표정이 편안했다.
훔쳐 먹은 사과가 더 맛있다고 했던가.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이렇게 함께 있으니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사람인 것 같았다. 내 것을 내 것처럼, 나보다 더 나 같은 그녀를 아껴주는 것.
그것보다 더 흐뭇한 일도 없을 테니.
***
이른 아침, 서준은 자신의 룸으로 여도순을 불러 이야기했다.
일정대로라면 엄소연은 오늘 카디스를 떠나야 한다. 하지만 몸 상태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얘기를 들어 보니 귀국을 잠시 미루고 여행을 할 거란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을 도순이 설명하자 그럴 법도 하겠다는 생각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계획한 여행이든, 한국으로 돌아가든, 장거리를 이동하기엔 엄소연 씨의 몸 상태가 아직 온전치 못합니다.”
이 말에 이어서 서준은 당장 움직이는 건 무리임을 못 박아 이야기했다.
“소연이가 건강한 애이긴 한데 간혹 몸살이 나면 죽을 듯이 심하게 앓더라고요. 그러면 비행기 타는 건 언제 가능할까요? 항공권 예약을 변경해야 하거든요.”
“가능한 한 긴 휴식을 취하면 좋겠지만, 번잡한 이곳에 계속 머무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닐 겁니다.”
어젯밤 이미 적당한 장소를 모색해 두었다. 엄소연이 편히 쉴 수 있고, 저 역시 드라마 촬영을 병행하며 그녀를 보살피기 수월한 곳 말이다.
“나한테 괜찮은 생각이 있긴 한데, 그건 다녀와서 상의합시다.”
“그럼, 이사님만 믿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물론입니다.”
역시 잘생긴 게 다가 아니었다.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상한 남자였다. 태서준의 팬인 것이 내심 자랑스러운 도순은 촬영장으로 출발하는 서준을 룸 밖까지 배웅했다.
“잘 다녀오십…… 잉?”
꾸벅 인사하고 늦게 고개를 들었음에도 서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도순의 말에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설핏 긁적인 서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니고. 아무튼, 이따가 봅시다.”
“하하, 예.”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것인데 이상하게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엄소연에게 여도순이 있어 다행이랄까. 도순의 웃는 낯을 보며 불안감을 해소한 서준은 그럭저럭 무겁지 않은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늠름한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서준이 모래사장으로 걸어들어왔다.
수십 마리의 늠름한 말과 그에 따른 수많은 엑스트라까지, 말과 마차 추격전이 벌어질 해안가는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였다는 게 느껴졌다.
“자, 5분 뒤에 슛 들어갑니다! 안전요원은 해안으로 진입하는 차량 계속 차단해 주시고, 기수들은 깃발 뒤로 전부 모여 주십시오!”
확성기를 든 스태프의 지시가 떨어지자 촬영장에 투입된 사람들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차에 올라탄 서준은 문뜩 엄소연의 체향이 코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야 밤새도록 그녀와 있었으니 그럴 수도. 하지만 일순 빚어진 그리움은 향기에 그치지 않고 일파만파 크게 번져 나갔다.
어젯밤 내내 행복했다면 미친놈일까.
아파서 끙끙대는 그녀 곁에 있는 게 어느 때보다 좋았다면 돌은 놈일까.
아마도 난 그랬던 것 같다.
***
태서준이 머문 객실에 엄소연이 있다.
어제 곧장 스페인을 떠난 조인하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지만, 그 일은 돌고 돌아 유정화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오민정과 친하다는 핑계로 드라마 제작진이 숙소로 쓰는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 유정화는 태서준과 만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전개인가.
그 계집애 하나 입원시킬 병원이 카디스 시내에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 애를 끼고 있는 것인지.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온갖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든 엄소연과 대놓고 사귀겠다는 의미 아닌가. 저는 닭 쫓던 개가 되는 꼴이고.
고작 미혼모 계집애에게 태서준을 빼앗길 수도 없거니와 그걸 믿기조차 어려운 정화는 서준의 룸으로 무작정 달려왔다.
공교롭게 서준도 지금 막 객실 안으로 발을 들인 터라 벨을 누른 사람이 봉 실장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문을 열어 준 것인데, 그 찰나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정화는 안쪽 침실 부스까지 거침없이 뛰다시피 걸어가 침대 위에 누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건 아니지?”
커다란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엄소연을 두 눈으로 확인한 정화가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저 애가 아파서, 외국이라, 그저 불쌍해서 돌봐 주는 거지?”
“…….”
황당하기 그지없는 서준은 어서 이곳에서 나가라는 삐딱한 눈짓만 정화에게 보낼 뿐이었다.
“왜 말을 못 해? 서준 씨, 아무 여자나 만나는 사람 아니잖아!”
“잘못 알고 있네. 난 누구든 만나. 유정화만 아니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그동안 서준 씨가 너무 그리웠단 말이야. 죽을 만큼.”
“…….”
“내게 돌아와.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면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릴게.”
“…….”
이건 또 무슨 얘긴지. 기가 찰 뿐인 서준은 대꾸 없이 피식, 웃었다.
오래전에 이별한 여자가 예고 없이 찾아와 붙잡고 애원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이별을 그는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지금 흔들리는 걸까?
사실 소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직 멍한 상태이긴 하지만 낮은 음성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유난히 귀에 콕콕 박혀왔다. 그러나 감은 눈을 차마 뜰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아까 한차례 깨어났을 때 도순에게 말한 게 있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사람들의 입심이 견디기 힘들지라도, 하루빨리 귀국하고 싶다고. 그런 이유로 도순은 지금 아래층 룸에서 귀국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 이곳에 없음을 눈을 뜨고서야 인지한 소연은 갑자기 혼자 남겨진 탓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 시작하려는 걸까? 그래서 내가 없는 다른 곳으로 둘이 사라진 거야? 나는 진정 방해꾼인 거야?
하,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원망이 쌓여 아픔이 되었을까, 아픔이 원망을 만들었을까. 대체 뭐가 먼저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몸과 머리는 더욱더 욱신거렸다. 체온마저 급상승했다. 시계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소연의 가슴은 점점 더 콱 막히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를 봐야 덜 아플 것 같은 이 마음은 또 뭔지. 그가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소연은 또다시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체온계를 확인한 서준이 침대 옆으로 앉았다.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의 둥근 이마를 쓸며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섬세한 손길을 느낀 소연은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서러움, 복받치는 눈물을 이겨내지 못했다.
긴 속눈썹 사이로 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엄소연…… 눈 좀 떠봐.”
서준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계속 잠을 잤을 뿐 그녀의 의식은 멀쩡하다는 걸.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지?”
“…….”
소연은 부드럽게 떠진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유정화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혀끝에서만 맴돌다 삼켜졌다.
울까 봐, 또 나약해질까 봐, 자격도 없으면서 괜한 질투로 저만 초라해질까 봐, 억누른 슬픔이 또 비어져 나올까 봐.
“대답하기 싫어?”
“…….”
“그럼 듣기만 해. 너 지금 많이 아파. 당장 입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이 아파.”
“…….”
“그러니까, 괜찮아질 때까지만이라도 나와 함께 있자.”
“…….”
당신은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 잘 살 수 있잖아. 난 그게 잘 안 되는데. 그런 당신 곁에서 힘들어하느니 차라리 멀찍이서 그리워할래요. 전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이 말 역시 입술로 되뇌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일자로 다문 입술은 소연의 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래서, 이 아픈 몸으로 기어코 가겠다?”
“……갈래요.”
겨우 한마디 한다는 게…….
간다고?
얼마간 허공을 짓누른 시선이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서준은 담담한 목소리에 한숨을 담아 말했다.
“하나만 묻자. 너와 나…… 여기서 끝이야? 진짜 끝이야?”
“…….”
“나를 안 보고도 엄소연은 잘 살 수 있느냐고.”
아니. 그 반대였다.
이 남자를 보지 않곤 잘 살 수 없다.
하지만 반드시 잘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품어 줄 순 있어도 내어 주는 법을 모르는 사람, 언제고 내게서 멀어질 사람, 평생 내 것일 수 없는 사람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설사, 아이로 이 남자의 발목을 움켜잡을 수 있대도 그런 내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이 남자도 뭔가 부족해서 지금 나를 붙잡는 것일 텐데, 그 마음이 채워지면 나만 바라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끝내는 게, 짧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던 말라가의 기억만으로 끝내는 게 맞다.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거다.
제 판단이 옳은 건지 아닌지도 모를 만큼 소연은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힘없는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