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끔찍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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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끔찍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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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끔찍한 일
2023.06.05.
샤워를 마친 소연이 욕실에서 나왔다.
팔과 다리에 대충 속옷을 끼워 넣고 옷장 서랍에서 트레이닝 바지와 셔츠를 꺼내 대충 뒤집어쓰듯 입었다. 그 모든 행동은 느릿느릿 굼뜨기만 했다.
귀국하고 사흘 동안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회복된 몸이었지만,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기분은 더 지하로 꺼져 암담할 뿐.
그렇지만 소연은 굳건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더는 늦출 수 없었다.
곧 현우가 올 것인데,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할 것인데, 이젠 사랑스러운 아들의 찹쌀떡처럼 보드랍고 쫀득한 볼살을 매일 부비부비할 수 있을 것인데, 이리 나약해져 있으면 안 될 일이니까.
엄마답게 더 강해져야 하고, 엄마만 있는 이이에게 아빠 몫까지 몇 배 더 노력해야 하니까.
문뜩 화장대 위에 놓인 아이 사진을 눈앞으로 가져와 한참 응시한 소연의 얼굴엔 슬픈 듯 어여쁜 미소가 살며시 피어났다.
“현우야…….”
엄마가 미안해.
자꾸 울고 아프기만 해서 정말 미안해.
엄마가 기운 낼게. 내 아들이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엄마가 더 열심히 살게.
아직 어린 현우지만 눈썹을 장난스럽게 찡그릴 땐 여지없이 제 아빠와 똑같다. 그 표정이 담긴 사진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얼굴…….
태서준을 생각하니 소연은 또다시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메마른 그리움이었다.
서준은 세비야 공항까지 소연을 데려다주었다.
그곳에서 소연은 그를 등지며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신 울지 않겠다고 독하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날로부터 그녀의 눈빛은 영혼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시리고 건조할 따름이었다.
소연은 들여다보던 동그란 액자를 있던 곳에 도로 내려놓고 주방으로 갔다. 죽이라도 먹어야 몸살로 축난 체력을 조금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을 테니까.
냉장고엔 온갖 죽이 그득했다. 어제 여도순이 잔뜩 사 들고 와 입맛대로 꺼내먹으라며 넣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입맛이 있을 리 없는.
손 가는 대로 아무거나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운 죽을 꾸역꾸역 다 먹은 소연은 아파트 단지 산책로라도 걸을 생각에 현관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웬 초인종 소리가.
늘 도어락을 곧장 열고 들어오는 여도순은 아닐 테고. 그럼 누구…….
별생각 없이 문을 연 소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잘 있었어?”
키 큰 남자가 성큼 문 안으로 들어오자 소연은 뭐라 말도 못 한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거실 소파를 떡하니 차지한 조인하의 표정이 제법 태연했다.
“나 여기 앉아도 되지?”
“이미 앉았는데 그런 물음이 의미 있을까요.”
“내 전화번호 차단한 투정이라고 여겨줬으면 해.”
이 집에 와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례하게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밀고 들어온 행동부터 하는 말까지, 소연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러나 초대하지 않은 손님도 손님이긴 했다.
“차 내올게요. 홍차 좋아하시죠.”
“뭐, 적당히 아무거나.”
피식, 하며 입꼬리를 올린 표정은 비웃음이었다.
뭘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예쁘고 예쁜 엄소연이지만, 태서준에게 한낱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음을 조인하가 확신하게 된 건 밀라노에서 만난 유정화의 그럴싸한 입김 때문이었다.
‘서준 씨는 나와 사귈 때도 곁을 내주는 법이 없는 남자였어요. 맛있게 빨아먹던 단물도 질리는 순간 가차 없이 버리는 냉혈한이랄까. 정 없고 겉과 속이 다른 그 남자를 엄소연이 무슨 수로 감당할지. 아마 버려지고 나서야 잘못 엮인 남자라는 걸 깊이 깨닫고 후회하겠죠. 그나마 나니까 태서준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고요.’
‘재결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이나 나나 대외적인 입장이 있으니 거기까진 얘기할 순 없고. 아무튼 지켜보세요. 나, 유정화가 곧 결혼하게 될 남자가 누구인지.’
‘결혼? 그럼, 태서준이 양다리를 걸쳤단 말씀입니까?’
‘훗, 그런 셈?’
안 그래도 태서준이 못마땅했다.
그 탓에 은밀하게 속삭이는 유정화의 이야기는 조인하의 머릿속에서 곧 진실이 돼버렸다.
태서준의 화려한 겉모습에 혹해 헛물만 켜는 엄소연이 딱하고 한심했다. 해서, 태서준의 실체를 낱낱이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엄소연을 태서준에게 빼앗긴 그 즉시 스페인을 떠나 한국으로 날아왔다. 분했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건 오늘을 기약했기 때문이었다.
인하는 처음 들어온 공간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다 엄소연이 스페인으로 떠나던 날 이 주위를 배회했던 저와 반대로 이곳에 당당히 들어왔을 그 자식을 생각하니 꼭지가 확 돌았다.
“스페인에 더 머무를 줄 알았는데 바로 왔나 봐? 왜, 그 자식이 네가 아프니 귀찮대?”
“…….”
태서준을 지칭하는 험한 소리가 조인하의 입에서 나오자 소연의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를 헐뜯는 얘기라면 조금이라도 듣기 싫은 거였다.
“그걸 물어보러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여긴 무슨 일이죠?”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난 그것 때문에 온 건데.”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는 가느다란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힘없는 제 몸을 의식한 소연은 짐짓 허리와 목을 빳빳이 세우고 말했다.
“이상한 소리 마시고 이거 다 드시면 가세요.”
“너야말로 회피하지 마.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
“하…… 그래요. 아주 오래전 학우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그 날 선배님 마음을 알았죠. 하지만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전 아니라고 했고, 선배는 분명 제게 사과했어요. 그거로 선배님과 제 복잡한 감정은 매듭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요?”
“내가 고백했을 때 넌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고 했어. 아니, 헤어졌다고 했던가? 아무튼, 넌 그 남자의 아이를 혼자 낳았던 거지. 휴학한다고 했을 때 뭔가 이상했는데, 아이가 있다고 네가 공개하고서야 아귀가 맞아떨어지더라. 그런데도 난 널 포기한 적이 없고, 지금도 그래. 그런데 매듭? 이런 내가 어떻게 매듭이 지어지겠어!”
소연은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둔 어느 날 휴학계를 내고 감쪽같이 증발했다. 그렇게 한 해를 넘겨 다시 나타난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학업과 연기에 전념했다.
한 걸음 뒤에서 그런 엄소연을 지켜본 그 세월. 그로선 쉽게 접어질 리 없는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엄소연은 또 다른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인하는 씁쓸한 기분을 자조적인 실소로 희석하며 말을 이었다.
“난 계속 기다렸어. 네가 나를 남자로 좋아해 줄 때까지, 나만 바라봐 주길 기대하면서. 그런데 정말 나는 아닌 거야?”
인하가 코웃음 치며 상체를 젖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그 자세가 위협적으로 느껴진 소연은 바닥에 앉아 있는 몸을 약간 뒤로 물렀다.
“…….”
한낮이 되니 오전보다 더 짙어진 꽃향기가 소연의 코끝에 닿았다. 조금 열어 둔 창문의 좁은 틈을 비집고 흘러들어온 아카시아 향이었다.
겨울엔 집 안으로 들이치는 찬 바람 때문에 꼭꼭 닫지만, 여름이면 따가운 햇볕이 못 견디게 더워 창을 연다. 한결같은 것 같아도 계절마다 절로 나는 행동이 이렇게나 다르다. 하물며 사람에겐 더하겠지.
그게 나인데 어떡할까. 나 자신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데, 조인하에게 감정을 접으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뭐라고 하며 내 마음을 전해야 할까.
소유욕에 타는 갈증은 물을 마셔도 사라지지 않는다. 뽑아내고 잘라내도 어느새 넓게 번져 무성하게 자라나는 잡초처럼 지독한 연심 또한 바라는 그것을 얻는 게 아닌 이상 어떠한 말로도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조인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소연은 그와의 인연을 함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를 단념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러나 끝내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끝이 아니길 바라며 억지로 이어 붙였으나 기어코 끝인 날이.
“선배를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로,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이상을 제게 바라신다면 전 선배를 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 이거 되게 야박하네.”
잠시 잠자코 있던 인하가 소파에서 일어나 소연에게 다가섰다. 그 움직임에 맞물려 소연도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 치도곤을 겪었으면서, 그 지옥 길을 지금도 건너고 있으면서.”
인하는 엄소연이 아이 아빠에게 버려졌다고 단정했다. 그렇게 남자에게 당하고도, 또 그 남자의 아이를 낳아 만천하에 굳이 공개해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한 그녀가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이젠 또 태서준한테 눈이 먼 거야? 그래서 난 또 밀려나야 하고? 정신이 어떻게 된 거지,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래!”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지옥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후회는 더욱 안 해요! 태 이사님과 전 아무 사이도 아니고요!”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선 인하의 억센 눈빛이 소연에게 쏟아졌다. 위협감을 느낀 소연이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연을 벽으로 밀어붙인 인하의 몸짓이 조금 더 빨랐다.
“그럼, 이제라도 나를 잘 생각해 봐! 또 알아? 생각이 바뀔지.”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순탄한 대화는 이제 끝이었다. 인하는 제 팔 안에 가둔 소연을 마구 다그쳤다. 언성을 높인 소연이 저를 짓누른 인하의 가슴을 밀쳤지만, 그는 여린 손목을 드세게 움켜쥐었다. 꼼짝없이 양팔의 자유를 빼앗긴 소연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발 이러지 마요! 당장 놓으라고요!”
“나는 왜 안 되는데! 누군지 모를 첫 남자? 그 잘난 태서준? 그 새끼들은 널 가지고 논 것뿐이야! 사람은 누구나 실수해. 요즘 세상에 과거 좀 있다고 흠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요! 그런 말을 내가 왜 선배에게 들어야 해요!”
경악한 소연의 눈이 독기를 품고 인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내 여자로 사는 게 아이 때문에 주저된다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얘기야. 어디 좋은 사립학교에 넣어 두면 간단하잖아? 부모에게 맡겨 놓고 같이 살지도 않는 걸 보면 너도 그 애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가끔 들여다보는 거로 되는 거 아니겠어?”
“뭐, 뭐라고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정색한 소연의 표정이 꽤 아파 보였다.
그랬다.
그녀는 욱신대는 심장 너무 아팠다.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이 무척이나 아팠다.
“그 입에서 내 아이 얘기가 왜 나와! 난 죽어도 선배가 아닌데!”
“남자는 좋아도 아이는 원치 않았을 거잖아! 암전한 척하면서 남자는 되게 고르나 본데, 눈만 높아선 태서준과 붙어먹었다고 나 같은 건 안중에 없다 이거지!”
“윽……!”
갑자기 소연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붙잡은 그가 말했다.
“좋아해! 죽을 만큼 좋아해! 그런데 네가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사람 열받게!”
인하의 눈매가 붉었다.
“……!”
이 사람, 정상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소연은 손을 힘껏 휘둘러 인하의 뺨을 세게 올려붙였다.
촥!
차진 소리가 크게 났다.
“사람 칠 줄도 알고. 엄소연, 되게 앙칼져졌네…….”
뺨의 안쪽 살을 혀로 훑은 인하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나 가 볼까?”
“미친 새끼! 어디 건드려 봐, 내가 반드시 죽여버릴 테니까!”
악에 받친 경고를 듣고도 인하는 무지막지하게 힘을 실은 손으로 소연의 양어깨를 부서뜨릴 듯 부여잡았다.
“너, 남자 좋아하잖아. 아니, 즐기는 걸 더 좋아하나? 나랑도 그래 보자는데 뭐가 문제야?”
어금니를 꽉 깨문 소연이 모질고도 날카롭게 충고했다.
“날 꺾어서라도 가지고 싶어? 살아서 네 것이 될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가지게? 웃기지 마! 넌 그럴 수 없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힘겹게 쌓아 올린 모든 걸 한순간 잃어! 빛나는 배우 조인하는 없어지고 파괴자, 범죄자만 영원히 남는 거라고!”
“그건 네 생각이지. 난 지금 널 가질 거야. 그리고 잃지도 않을 거야. 네가 날 받아들이면 되는 거니까. 난 꼭 그렇게 만들 거고.”
“…….”
한순간이었다. 남자의 손에 잡힌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힐 것처럼 뒤로 당겨졌다. 불리한 상황인데도 소연은 지지 않는 눈빛으로 조인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눈물 한 방울,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은 채.
“걱정하지 마. 더러운 내 기분보단 거칠지 않게 해줄게.”
인하가 음습한 목소리로 소연의 귀에 속삭였다.
“!”
귓불에서 점점 내려오는 무례한 입술이 더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란 걸 일깨워주었다. 속눈썹을 파들거린 소연이 길게 내뻗은 팔로 장식장 위를 더듬었다. 그리고 이내 묵직한 금제 트로피가 그녀의 손에 들려졌다.
퍽!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건 삽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