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첫사랑 (46/51)


46화. 첫사랑
2023.06.09.


안 그래도 회사와 연락이 두절된 조인하 때문에 뭔가 찜찜한 기분이었던 원후는 서준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즉시 소연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여도순을 앞세워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후의 시야에 일순 들어온 광경은 가히 무도하고 참혹했다.

제정신이 아닌 조인하는 엄소연을 무참하게 덮치는 중이었고, 한편 소연은 바들바들 떠는 손에 쇳덩이가 들려 있음에도 차마 조인하를 내려치지 못했다. 그 순간, 저를 발견한 엄소연의 눈빛에서 원후가 느낀 건 숨이 끊어질 듯한 절박함이었다.

구원후는 곧장 조인하를 가격했고, 인하 역시 원후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끔찍한 난투극으로 인하는 코뼈가 주저앉았고, 빗장뼈 골절과 인대가 파열된 원후는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이 다시 마주한 건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만이었다.

변호사를 대동한 채 구원후의 병실로 찾아온 조인하는 CN 엔터테인먼트와 조건 없이 결별하겠다는 내용이 명시된 서류와 엄소연에게 두 번 다시 치근대지 않겠다는 비밀각서에 차례로 서명했다.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합의로 이 일을 수습한 건 공인이라는 특성과 회사 입장을 고려한 최선책이며,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게 없다는 걸 세 사람 모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병실을 나가기 전 조인하는 엄소연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봤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연아. 그동안 내가 미안했다.”

그의 사과를 한동안 곱씹던 소연은 한숨을 툭 내뱉으며 인하에게 말했다.


“선배가 한 짓을 용서할 수 없어요. 하지만 딱 부러지게 처신하지 못한 제 잘못도 있겠죠. 선배는 뉘우치세요. 전 이 일을 묻는 것으로 제 죗값을 치를게요.”

“…….”

소연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인하를 일으켜 세우며 마저 이야기를 이었다.


“내가 아프더라도 소중한 사람을 망가트리고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묵묵히 지켜줘야 하는 거잖아요. 한동안 힘들겠지만, 마주치면 우리 어색한 인사라도 반드시 해요. 서로를 볼 때마다 각자의 잘못을 반성하자는 거죠.”

“그래…… 그렇게 하자.”

소연의 뜻을 받아들인 인하가 미간을 깊이 구겼다. 엄소연의 성숙한 태도가 무모하게 굴었던 조인하의 마음을 깊이 건드린 거였다.

이렇게 CN 엔터테인먼트와 엄소연과의 연을 끝내게 된 조인하는 이만 발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소연 씨도 가서 쉬어요. 며칠 동안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전 조금 더 여기에 있을게요.”

“그럼, 신세 좀 더 지겠습니다.”

“신세라니요. 저 때문에 대표님께서 이 고생을 하시는 건데요.”

오른쪽 어깨와 팔 전체에 깁스한 구원후를 향해 싱긋 미소 지은 소연은 조금 전 화원에서 사 온 꽃다발을 화병에 꽂기 시작했다.

소연은 저로 인해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된 구원후에게 송구할 따름이었다. 그 마음에 빚을 갚고 싶은 그녀는 구 대표가 퇴원할 때까지 성심을 다해 간병하기로 마음먹은 거였다.

원후는 그런 그녀를 마다하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일로 이렇게 된 건 유감스러웠으나, 엄소연과 일보 가까워진 지금이 어느 때보다 즐거웠으니까.


 

***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석 달이 다 되어갔다.

서준은 드라마 작업이 모두 끝난 보름 전부터 매일 밤 술에 취했다. 그런 적 없던 태서준이 클럽이나 술자리를 전전하는 야행성 생명체가 된 이유는 나날이 커져만 가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유는 엄소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재력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 죄가 아니게 피해 갈 수 있지 않겠냐는 엄소연의 기우가 그냥 지나칠 게 아니라는 걸 서준이 깨닫게 된 건 말라가를 벗어날 즈음 조용히 따라붙는 그림자를 발견하고서였다.

그리고 그런 낌새를 눈치챈 건 카디스에서도 여러 번이었다. 보였다가도 연기처럼 사라지는 행동이 어찌나 신출귀몰하던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맘만 먹으면 못 할 게 없으신 분이시니.

태 회장의 사람이란 걸 어렵지 않게 간파한 서준은 스페인 촬영을 이어가는 동안 엄소연과 거리를 두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혹여 아버지의 성화에 그녀가 어떤 형태로든 곤란해지는 걸 절대로 원치 않았으니까.

그래도 눈에 자꾸 밟히는 걸 어떡할까.

한번은 스치는 얼굴을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 카디스 숙소 카페테리아에서 저녁 시간 내내 죽친 적도 있었다.

생전 그런 짓을 할 줄 모르던 태서준이 어쩌다 그렇게까지 된 건지. 그 자신도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곳을 쉽사리 뜰 순 없었다.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그녀를 봐야 콱 막힌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일 것 같았으니까.

커피를 다섯 잔째 주문했을 무렵 서준은 로비의 한 귀퉁이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는 엄소연을 보았다.

그 순간, 심장이 어찌나 두근두근 나대던지. 촬영하면서 그렇게나 얼굴을 마주 보고, 키스까지 했는데도 유리 벽 너머에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서준은 사뭇 설레기까지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테이블에 다가앉은 오민정이 말을 걸어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서준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엄소연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끝내고 싶다는데. 내가 싫어서 그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코 가겠다는데.

그래서, 더는 붙잡지 않았다.

혹시 마음이 바뀔까, 직접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는데도 엄소연은 끝까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내게서 멀어졌다. 내가 없는 곳으로 떠나갔다.

아픈 주제에 씩씩한 걸음으로 미련 없이.

퍽 엄소연답게.

하지만 그것은 그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엄소연이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며칠간 서준은 훌쩍 떠나버린 그녀가 무척 미웠다. 너무 미워서 입술로 수없이 되뇌었다. 아주 잘한 일이라고, 아주 후련하다고. 마음은 그게 아닌데도 그래야만 견뎌질 것 같았으므로.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밤잠을 설쳐가며 한숨짓는 일이 허다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가슴이 시리고 허해지는 건 서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게 다 엄소연 탓이라는 걸 모를 수 없는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애타는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것도 안 통한다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애걸하고픈 충동마저 일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한발 다가가기 무섭게 더 멀리 도망가는 엄소연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오후 3시.

이틀 동안 논현동 자택에서 꼼짝하지 않던 태서준이 웬일로 외출할 준비를 마치고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유려한 몸에 근사한 슈트를 휘감은 거야 다른 날과 별다를 게 없다지만, 다소 격식 있는 옷차림에 댄디한 보타이를 착용했다는 건 제아무리 태서준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후 수목드라마로 방영될 <태양의 주인> 제작보고회가 있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위이잉…….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던 시원한 걸음이 우뚝 멈춰 선 건 얌전하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해서였다.


“…….”

액정 화면을 스친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이고도 씁쓸한 조소를 머금었다.


“왜.”

-회사엔 얼굴도 안 비치지? 전화도 도통 없고.

“퇴원은?”

-관심이 없네! 퇴원한 지가 언제인데 웬 뒷북?

“두 번 다시 다치지 말라고 하는 얘기인 줄은 모르지?”

-그러게. 하필 오른팔을 다쳐선. 왼손잡이인 네가 부러울 줄 누가 알았겠냐. 많이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내 걱정을 해주는 걸 보니 미안하긴 한가 봐?

“별로.”

서준은 사실 미안했다.

구원후가 다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부탁 때문이었으니까.

소연이 스페인을 떠난 이틀 후인가. 서준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핑계로라도 엄소연을 한 번 더 보면 좋으련만, 빡빡한 현지 촬영 일정에 두 발이 묶인 그는 구원후에게 전화로 부탁했다.

엄소연의 건강 상태를 언급하며 조인하의 수상쩍은 움직임 때문이라도 그녀 집에 속히 가 보라고. 그러나 폭력으로 얼룩진 그 일을 스페인에서 전해 들은 서준은 한동안 실소를 멈출 수 없었다.

뭐를 하든 독하기로 소문 난 구원후의 근성은 어디 갔냔 말이지! 조인하, 그 새끼는 반쯤 죽여놨어야지!

라고 읊조리면서.

하지만 엄소연의 일에 가타부타 논할 자격은 제게 없지 않은가.

그녀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서준은 말없이 뒷짐을 질 뿐이었다.


“전화는 왜 했는데?”

-내일 시간 있지?

“왜.”

-가족 모임. 오랜만에 두 집안 식구들 다 모이자 하시네. 특히 이모부께서 너를 꼭 잡아 오라고 명령하셨거든.

금일 본가로 오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어제 받았다. 뭐라 잔소리할지 뻔히 알기에 갈 마음도 없을뿐더러 제작보고회 일정이 잡혀 있어 못 간다, 말했더니 모임을 하루 미루며 구원후를 앞세운 모양이었다.


“갈 거면 너나 가지, 나까지 왜 끌어들여?”

-난들 이러고 싶겠냐. 알잖아? 우리 구 회장님이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 그나마 내 편을 들어주는 이모부한테 아버지가 꼼짝 못 하시니 줄 잘 서야지. 그러니 내 얼굴 봐서라도 같이 가자.

제가 한 부탁 때문에 병원 신세까지 진 구원후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불쑥 나오려는 거절의 말이 목 끝에 걸렸다. 대신 푹 한숨을 내쉰 서준이 짧게 대답했다.


“알았다.”

-후후훗, 내 그럴 줄.

확신에 찬 구원후의 웃음소리가 무척 얄미웠다.

짜증이 밀려온 서준은 대꾸 없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

제작보고회가 시작되며 출연 배우 모두가 무대 위에 올랐다.

이어서 취재 기자의 몇 가지 질문이 있었다.

미리 짜놓은 각본에 적당한 답변이 오가는 와중에도 단연코 태서준이 가장 돋보였다. 다음으로 응당 주목받아야 할 사람은 여주 오민정이었으나 기자들은 엄소연에게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눈에 띄려 애쓰지 않아도 시선을 사로잡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속사의 공식발표가 가장 크게 작용한 듯했다. 다시 말해 구원후의 지략이 자충수를 묘수로 바꾼 셈이었다.


“엄소연 씨는 광고 모델로 활동하셨고 드라마는 처음이신데요. 나이도 어리신데 네 살 아들을 혼자 키우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미혼에다가 신인배우로서 그 사실을 공표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어떤 연유에서 그런 용기를 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소연은 당황하지 않고 기자의 질문에 차분히 답했다.


“한 남자를 사랑했고, 아이는 그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젠 제 모든 것이 되어버린 소중한 아이랍니다. 시간을 되돌려도 전 제 아이를 꼭 낳았을 거예요.”

“그러면…… 그분이 첫사랑?”

“……네.”

이렇게 한 시간 동안 이어진 드라마 제작보고회가 얼추 마무리되어갈 무렵이었다.

조연으로서 몇 가지 인터뷰와 몇 마디 인사말을 전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온 소연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무대 위에는 태서준과 오민정이 나란히 서서 사회자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그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소연의 시선이 부지불식 태서준에게 닿았다.

근 석 달 만에 보는 그였다.

전보다 다소 슬림해진 듯도 했지만, 그로 인해 더 날카로워진 턱선 하며 유려한 그의 모습은 변함없이 눈부셨다.

방송국에 오기 전부터 흔들리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건만.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쩌자고 더 보고 싶어지는 건지.

여지없이 흔들렸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뻐근했다.

이젠 그 어떤 감정도 남아서는 안 될 텐데, 난 이렇게 또 그를 바라게 된다.

이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하지? 안 본 것처럼 후다닥 돌아서면 이상하겠지? 미소라도 살짝 지어줘야 하는 걸까? 어휴, 그럴 자신도 없으면서 무슨!

사실 소연은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단 한 번도 바라봐 주지 않는 태서준 때문에 기분이 꽤 많이 울적했다.

그는 마음을 완전히 접은 모양인데, 그렇지 못한 저는 뭔가 싶기도 했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건 진짜 싫어진 거잖아. 하긴, 그의 뜻을 냉정하게 뿌리친 나인데 미우면 미웠지, 어떻게 좋은 감정이겠어.

화려한 그의 인생에 껴들 수 없는 초라한 저는 조용히 물러가 주는 게 도리였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미워도 한 번만 봐주지…….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날 바라봐 주지…….

소연은 부질없는 기대를 접으며 무대 옆쪽에 마련된 작은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다들 관중석에 있거나 무대를 지켜보느라 이 방송국에서 방영됐거나 방영 예정인 드라마 포스터가 걸려 있는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 이거구나…….”

새하얀 벽면에 걸려 있는 포스터 하나가 소연의 커다란 눈망울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역시 <태양의 주인> 주연답게 태서준의 멋스럽고 강렬한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이것으로나마 그를 원 없이 볼 수 있어서 좋았을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소연은 커다란 포스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에 표정마저 골똘해졌다.

먼저 이곳을 뜨면 모양새가 이상하겠지? 그렇다고 태서준을 아무렇지 않게 볼 자신도 없잖아. 그래, 여기에서 조용히 있다가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 묻어가면 되겠다.

여전히 시선을 포스터에 고정한 소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일 때였다.

뚜벅뚜벅…….

누군가가 전시관으로 들어와 그녀 옆에 섰다.


“……!”

이 향기는……!

갑자기 심장이 팔딱팔딱 뛰며 소연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