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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죽어라 요동쳤다 (47/51)


47화. 죽어라 요동쳤다
2023.06.12.


후각에 닿는 근사한 향기.

제 쪽을 비추던 조명이 큰 키에 가려져 주위가 금세 어둑해진 소연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도 옆에 선 남자가 태서준이라는 걸 대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소연은 고개를 내릴 수도, 옆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눈은 분명 뜨고 있는데 눈앞의 시야는 아득해졌다. 몸마저 지금 자세 그대로 빳빳하게 굳어갔다. 폐부로 들고나는 숨이 지나치게 불규칙했다.


“…….”

서준은 소연처럼 포스터를 응시한 채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긴, 무슨 얘기가 필요할까. 저처럼 사람 많은 곳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것일 텐데. 발길을 돌릴 이유도 없을 만큼 내게 무감해진 그일 텐데.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긴 침묵 속에 잠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

무언가가 손등에 스쳤다.

그 순간 소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수로 닿은 건가? 라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손등과 손등이 맞대어지며 그의 따스한 체온이 꽤 오래 전해져왔다.

쿵쿵쿵쿵쿵쿵…….

소연의 심장이 죽어라 요동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손끝을 톡 건드리는가 싶던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더듬더듬. 그리고 확 감아버렸다.


“……!”

심장이 쿵! 떨어졌다.

너무 뛰어 닳아 없어질 것 같았던 엄소연의 심장은 이제 없었다. 일순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쳐버렸으니까.


“그…… 왜…….”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는데 소연의 혀는 마비된 듯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

서준의 유난히 짙은 눈동자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는 소연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가 마주치는 그때였다.


“두 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윤 감독이 전시관 입구에서 샴페인 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샴페인 따러 갑시다. 다들 대박 기원 축배를 들자고 난리입니다.”

화들짝 놀란 소연은 어느새 서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집에 아이가 기다려서요.”

“아, 그러십니까. 아쉽지만 얼른 보내드려야겠군요. ”

안타까울수록 더 애타게 보고 싶은 법.

그 이치를 잘 아는 윤 감독이 눈을 찡긋하며 서준에게 말하듯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가볍게 흘렸다.


“그 잘생긴 꼬마 녀석, 완전 엄마 바라기던데.”

 

 

***

내가 이 남자를 유혹하면 어떻게 될까?

날 미친 사람 취급할까?

아니면 얼씨구나, 바랐던 거라 해 줄까?

생각은 수백 번 해 봤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럴 용기가 없었다. 같은 배우지만 태서준의 고귀한 존재감은 일반적인 연예인과 급부터 다르니까.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벽, 그 자체인 그의 완벽함을 함부로 깰 자신도 없고.

하지만 야심 차게 도발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드디어 오늘, 바로 지금이다!

서준에게 바짝 붙어 앉은 민정은 쪽 뻗은 다리를 요염하게 꼬았다. 말려 올라간 짧은 스커트 밑으로 늘씬한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크리스털 잔에 고인 서준의 시선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무관심에 양 볼이 볼록해진 민정은 서준의 팔에 슬쩍 기대며 말했다.


“우리 진짜로 사귀면 어떨 것 같아요? 기자도 우리 케미가 장난 아니라고 했잖아요. 난 좋던데.”

“…….”

싫지도, 좋지도 않은 무감한 눈빛은 은은한 조명이 닿아 부드럽고 느른해 보였다. 그 눈이 요염을 발산하는 민정을 잠시 응시하고 다시 술잔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피식.

서준의 입가에 야트막한 조소가 스쳤다.

사실 서준의 심장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무대 위에서 엄소연이 했던 대답이 자꾸 되새김질 되는 머릿속이 미치도록 혼란스러웠다.

그 새끼가 첫사랑이면 나는! 네 첫 남자인 나는 대체 뭐였는데! 빌어먹을! 그럼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거야?

지독한 질투에 욕지거리를 내뱉는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그래서 더 그녀를 본척만척했다. 하지만 서준의 무의식은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소연을 찾았다. 어떠한 구실을 붙여서라도 맹렬한 비난이라도 퍼부어 줄 생각에.

그러나 후미진 공간에서 막상 그녀를 발견한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제 시야에 들어온 그녀를 보며 그동안 몹시 그리워했구나, 하는 자각뿐.

그 마음이 그도 모르는 사이 행동으로 옮겨진 건 이성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그녀였던가. 서준은 제 손가락에 감긴 보드라운 감촉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샴페인을 터트리며 다들 흥분에 들떠 축배를 들 때 서준은 자꾸 엄소연이 어른거려 기분이 가라앉았고, 명치는 계속 뻐근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쓸쓸하고 헛헛한 마음이었다.

제작보고회가 끝나고 방송국을 나온 윤 감독과 서준은 드라마 투자자들과 함께 인근 클럽으로 이동했다. 그때 묻어온 오민정은 다들 귀가할 시간이 되어 그곳을 떠났는데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이 룸에 남은 사람은 태서준과 오민정뿐이었다.


“난 어때요? 태서준 씨 여자로.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아요? 드라마 주인공 둘이 실제 연인이 되면 드라마도 더 잘 될 거고, 꿩 먹고 알 먹…… 웁!”

민정은 알 대신 수박을 먹었다.

주절주절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서준이 과일로 민정의 입을 막아버린 거였다.

수박즙이 턱으로 줄줄 흘러내리자 수박을 퉤, 입안에 남겨진 수박씨를 한 번 더 퉤, 뱉어버린 그녀가 눈꼬리를 당겨 올리며 눈을 치떴다.


“뭐예요!”

“프로가 되려면 아직 멀었네. 오민정 씨는.”

서준이 이제껏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작품이 끝났으면 현실로 돌아올 줄도 아는 게 프로지.”

엄숙하고 낮은 어조지만 비아냥거리는 게 분명했다.


“프, 프로? 그럼 촬영하는 동안 내 농담은 왜 그리 잘 받아줬는데요? 나한테 흑심이 있으니까 그랬던 거잖아요!”

“흑심이라……. 그건 예의라고 해야 맞지 않나.”

“씨……!”

혼자 잘났어, 정말!

민정은 거절당한 수치심에 온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다시 입술을 굳게 닫아버린 서준은 턱 짓으로 말했다.

나가는 문은 저기.

라고.

***

취기를 빌렸다기엔 정신이 너무 말짱했다.

모두 잠든 새벽 2시.

박성호는 소연의 아파트 건물 앞에서 차를 세웠다. 내린 차에 기대선 서준은 가만히 소연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뚜루루루,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리더니 손바닥만 한 기계에서 듣고 싶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엄소연……?”

-네, 저예요.

“나…… 술 마셨어.”

-…….

“그런데 마셔도 마셔도…….”

너만 더 생각나더라.

끝말을 마른기침으로 대신한 서준은 다시 말했다.


“안 취해.”

-…….

“나한테 할 말 없어?”

-네.

“와……. 엄소연 되게 모지네…….”

-…….

“그래. 그래야겠지. 더 꿋꿋해져야겠지.”

아직도 믿어지진 않지만 넌 한 아이의 엄마니까. 그래서 네 삶 어디에도 내 자린, 네 마음 아주 구석진 자리에도 난 낄 수가 없는 거겠지.


-…….

그녀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래도 서준은 지금이 그렇게나 좋았다.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그동안 그리워하지 않은 것처럼, 어쩌면 연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너무 좋아 서준은 피식피식 헛웃음만 나왔다.


“내가 좀 취하긴 했나 보다.”

-…….

“미안해. 갑자기 전화해서.”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정상은 아니었다.


“늦었어요. 쉬셔야죠…….”

“넌 왜 지금까지 안 잤는데.”

-하…….

툭 터진 한숨일까. 그러나 그 이후로 그녀는 작은 숨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엄소연…….”

-…….

또 대답 없는 그녀를 느끼고 있자니 서준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가지런한 잇새로 야트막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느닷없이 전화해 못나게 구는 자신이, 못 잊는 여자의 집 근처나 맴도는 자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끔찍하게 한심했다.


“그래, 자라.”

끊는다…….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통화는 끝나버렸다.

털썩, 하며 차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우려던 서준이 비틀거리며 범퍼에 엉덩이를 찧었다. 운전석의 박성호가 얼른 차 문을 열고 나와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서준은 피식피식 웃으며 건들지 말고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그러면서 올려다본 밤하늘. 깜깜한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이 지나치게 밝았다.

머리와 목을 뒤로 젖혀 무수히 반짝이는 달과 별을 바라보던 서준은 아예 긴 다리를 쭉 뻗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눈길은 핸드폰 액정으로 내려갔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향기가 지금도 후각에 닿는 듯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어여쁜 미소.

이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다신 없을 거다.

말라가의 작은 섬에 잠시 정박했을 때 해변의 뽀얀 모래사장을 밟으며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의 미간이 흐릿하게 실금을 그렸다. 짙은 눈매도 찡그려졌다.

서준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엄소연의 웃는 얼굴이.


 

***

소연은 깜깜한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마음이야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아니, 통화하는 동안 속으로 수십 번은 더 물어보았다.

지금 어디냐고.

왜 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내게 전화하고 있냐고.

하지만 묻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녀는 울고 싶어도 이젠 울 수 없는 메마른 눈이었다.

그녀의 텅 빈 듯한 눈동자는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착 가라앉은 눈빛마저 사막의 모래바람보다 건조했다. 그러나 커다란 눈시울은 무기력한 체념이 붉게 고여 있었다. 그것이 더욱더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말라기의 추억과 석 달 전의 그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소연은 부지불식 제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등을 건드리던 부드러운 감촉. 손가락을 감아오던 따스한 온기.

감겼다 떨어지는 그의 손끝을 도로 붙잡았다면, 꽉 잡고 놓지 않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는 함께할 수 있었을까.

포스터 전시장에서 그는 왜 내 손을 잡았을까. 내게 있던 당신 마음이 오민정에게로 옮겨간 걸 내가 다 봤는데. 카디스에서 분명 그랬잖아. 그게 아니면 내가 오해한 걸까.

아, 정말 모르겠다.

이런 생각조차 부질없는 미련 아닌가.

혼란스러워하던 소연은 두 손으로 감싼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태서준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뇌리에 달라붙는 건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얼마나 더 그리워해야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아파해야 뼈마디까지 새겨진 그를 지울 수 있을까.

아마도 난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보다.

그러니 당신이라도 날 잊어요.

제발 나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아요.

나와 상관없이 행복해야 할 당신이니까.


“후…….”

가슴의 통증을 게워내듯 깊은 날숨을 조용히 내려놓은 소연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우가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아이의 옆자리에 누워 찹쌀떡처럼 쫀득한 볼살에 얼굴을 맞대었다. 잠결이지만 아이도 엄마가 좋은지, 작은 몸을 꼼지락꼼지락하며 소연의 품 안으로 쏙 파고들었다.

그래, 그래, 내 아들…….

소연은 희미하게라도 웃을 수 있었다.

작은 아이.

이 조그마한 존재가 오히려 저를 숨 쉴 수 있게, 살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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