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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저 새끼가 미쳤나 (48/51)


48화. 저 새끼가 미쳤나
2023.06.16.



 
태 회장의 부름으로 가회동 본가를 찾은 서준은 원후와 함께였다.


“서준아.”

“원후야.”

장대처럼 큰 키의 두 남자가 격조 높은 응접실에 들어서자, 아들을 기다리던 여진과 여정은 음성을 한껏 낮춰 이리 오라 부산스럽게 손짓했다.

그녀들답지 않은 호들갑이 이상하긴 했지만, 서준과 원후는 일단 어머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형들은 벌써 와서 회장님과 서재에 있어.”

서준에게 앉으라 눈짓한 여진이 더 은밀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너, 요즘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니? 아무튼, 회장님이 벼르시던 얘기를 하실 모양이다. 알고는 들어가.”

보나 마나 노발대발하실 거라는 뜻이었다.


“난 또 뭐라고.”

다 큰 자식이 여자 좀 만나는 게 뭐가 어때서 이 소란이신지. 소파에 느릿하게 걸터앉은 서준은 놀랍지도 않은 듯 유난히 선명한 입매를 끌어올렸다.


“겨우 그겁니까.”

피곤하진 않았다. 단지 짜증스러울 뿐. 아니, 이 순간에도 아른거리는 앳된 얼굴이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서준은 그 복잡한 심경을 태연한 미소에 녹여 삼켰다.


“겨우, 라니!”

남편과 맘대로 안되는 자식 사이에서 속이 타들어 가는 어미의 매운 손바닥이 아들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유려한 서준의 몸짓은 쓸데없이 민첩하기까지 했다.


“이 녀석이 그래도!”

또 한 번 헛손질한 여진은 이마를 구기며 체념한 듯 말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고집불통 네 아버지를 누가 말리겠니.”

다른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여진과 서준의 기막힌 액션이 재밌었을까. 주머니에 손을 꽂고 소파 앞에 서 있던 원후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모부는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여태 잠자코 계시더니.”

직접 끌고 오라는 태 회장의 명령에 서준을 납치하듯 데려오긴 했지만,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불길한 원후의 오른발이 슬쩍 뒤로 빠져 있는 게 괜한 건 아니었는지 여정이 제 아들에게 경고 조로 말했다.


“지금 서준이 걱정할 게 아니다, 네 아버지도 지금 형부랑 서재에 같이 계시거든.”

여정의 말인즉슨 발등에 불 떨어진 건 서준인데, 그 불똥이 저까지 튀었다는 뜻. 그러나 원후는 하던 대로 버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매는 먼저 맞아야 제맛이죠. 올라가 보겠습니다.”

원후가 2층으로 향하자 서준도 두말하지 않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

단단히 입단속을 했건만,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냄새를 제대로 맡은 기자들은 스캔들에 단 한 번도 노출된 적 없는 태서준의 과거 연인과 현재 고급클럽에 종종 나타난다는 그의 행적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또한 국내외 부동산은 물론 세계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경제계 거목인 태석호 회장의 막내아들이 태서준이라는 것까지 모두 알아버렸다.

특종이라면 악마와의 거래도 불사할 그들은 재계의 한 획을 긋는 구 회장의 아들, 구원후의 사생활까지 새삼 들먹이며 두 집안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그 입들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했다.

해서, 태 회장은 이참에 할 말이 있어 자식들 전부를 본가로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크나큰 가회동 저택에 걸맞은 큰 서재의 원목 테이블에 둘러앉은 젊은 남자들은 모두 네 명.


“난 내 아들이 지저분한 구설에 오르는 거 딱 싫다.”

구 회장이 먼저 하나밖에 없는 구원후에게 호통쳤다.

수려한 외모에 대형 기획사 대표라는 수식어를 겸비한 구원후도 꽤 많은 염문설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구 회장은 그 소문을 나무라는 거였다.


“그게 다 결혼을 안 해서 그런 거 아니냐. 그래서 네 회사에 남모르게 투자했던 내 돈을 뺄 생각이다.”

“그게 무슨. 그러면 아버지가…….”

“그래. 내가 스티븐이다!”

“……!”

CN엔터테인먼트의 최대 주주가 아버지라니!

구원후는 자신의 회사 지분을 제일 많이 보유한 투자자가 외국인이 아닌 구 회장이란 것을 처음 알았다. 겉으론 아닌 척, 뒤로는 물심양면 제 사업을 지지해주었다는 사실이 원후는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감사했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

구 회장은 원후에게 당장 결혼하지 않으면 CN 엔터테인먼트 자산의 30%가 넘는 자본을 싹 다 회수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아니, 아버지! 갑자기 이러시는 게 어딨습니까!”

“내 얘기는 끝났다. 결혼하기 싫으면 회사 문을 닫든가!”

“싫다는 게 아니라 시간을 좀…… 아, 아버지, 그러지 마시고 1년만요. 네?”

2층으로 올라올 때의 그 패기는 어디로 갔을까. 이만 서재에서 퇴장하는 구 회장의 뒤를 원후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갔다.


“콜록, 흠.”

태 회장은 시동을 걸듯 얕게 기침하며 세 아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원후는 제 아비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그럼 나도 이제 얘기하…… 에헴!”

콜록콜록…….

기침을 섞어 말하던 태 회장은 가슴을 부여잡기까지 하며 심하게 기침했다.

그러나 세 아들은 채 70대도 되지 않은 아버지가 건강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물며 그런 아버지가 건강을 무기로 쓴다? 그거야말로 아들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핵폭탄을 날리기 전 기선제압부터 하려는 태 회장만의 전략적 페이크라는 걸.

구 회장이 한차례 퍼붓는 소나기였다면 곧 시작할 태 회장의 발언은 거대한 태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가진 게 많지 않냐. 하지만 죽으면 다 소용없는 것이지. 해서, 내가 살아 있을 때…… 쿨럭…….”

콜록, 콜록…….

40대 중반 때 성공적인 이식수술로 얻은 튼튼한 심장 덕에 젊은이 못잖은 혈색과 체력을 현재까지 유지한 태석호는 동안 중 동안이었다. 그 쌩쌩한 모습으로 골골대는 노인 행세를 하려니 쉽지만은 않은 일.


“그만하시죠. 그쯤이면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아버지.”

보다 못한 둘째 용준이 그냥 말씀하시라는 듯 슬그머니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데 그리 뜸을 들이십니까? 들을 각오는 이미 하고 있으니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첫째 이준 역시 실실 웃으며 한목소리를 내자 태석호는 눈살을 얄궂게 찌푸리면서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좋다, 길게 끌지 않으마. 내가 낙이 무에 있겠냐. 자식들이 화목하게 잘사는 거, 그거 하나인데, 왜! 왜, 너희들은 애를 안 낳아?”

말 그대로였다. 세 아들 모두 연년생으로 결혼 안 한 서준만 빼고 두 아들은 결혼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후사가 없다.

서준이야 미혼이니 그렇다 치고. 맏형인 이준은 병원에서 난임이란 판정을 받았으나 노력하면 얼마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둘째 용준은 아직 신혼을 즐겨야 한다며 피임을 고수하는 중이었다.

이런 사정이니 태 회장이 애가 탈 만했다.


“그래서, 너희들이 성공만 하면 각각 내 전 재산의 10%를 뚝 떼어주려고 한다! 그거 챙기고 싶으면 내 앞에 손주를 데려오란 말이다! 나도 딱 1년 시간을 주마. 그 안에 데려와! 알았냐?”

태 회장의 재산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했다. 그러니 10%라 함은. 아니, 세 아들 모두 성공만 하면 30%나 되는 거대 재산을 내놓겠다는 뜻 아닌가.

혹할 수밖에 없는 이준과 용준은 눈을 반짝 굴리며 물었다.


“그럼 서준이는요?”

“막내는 미혼이니까 해당이 안 되는 거네요, 아버지?”

“그거야…….”

의자에 긴 다리를 늘어뜨린 느른한 자세로 저와 무관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막내아들. 그런 서준을 향해 혀를 끌끌 찬 태 회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결혼이야 아이가 생긴 후에라도 하면 되지.”

“…….”

결혼보다 애가 먼저라는 얘기에도 서준은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는다.

저, 저, 저놈이…… 내 아들이지만 저리 얄미울 수가 있나! 아주, 저 혼자 세상에 나와서 저 혼자 컸지? 대체 넌 누굴 닮아서 제 멋대로인 게야!

닮긴 누굴 닮았겠는가.

차여진과 태석호의 장점만 따온 외모,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은 대쪽 같은 성품마저 부모의 판박이인 것을. 그래서 태석호가 제일 다루기 힘든 아들이 태서준이었다.


“그래만 주면 네 딴따라 일도 더는 무시하지 않으마. 이 정도면 어떠냐, 서준아.”

천불이 올라오는 걸 천천히 심호흡하며 진정시킨 태 회장은 되려 서준을 구슬렸다.


“글쎄요, 아버지.”

한번 엇나가면 골치 아픈 녀석이라 태 회장의 음성은 지나치리만큼 나긋나긋했고,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기댄 서준의 건방진 태도는 아버지의 협상에 전혀 흥미 없음을 대번 표출하고 있었다.


“허허, 이거야 원……!”

어째 시원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태 회장은 허탈한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의자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탁탁탁 두드렸다.


“아버지가 밑에 돈이 숨 못 쉬어 걱정인 건 잘 압니다만. 그렇게까지 해서 손주를 얻으셔야겠습니까?”

한쪽 다리에 반대쪽 긴 다리를 꼬아 올려 자세를 고친 서준이 목소리를 이었다.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재산이 탐이 나 저를 낳았다. 미래의 아버지 손주가 그 사실을 알면 퍽이나 자랑스럽겠습니다. 형들도 좀 그러네. 아이야 자연스레 생기면 낳는 거고, 재산이야 다들 있을 만큼 있을 텐데…… 아버지 돈에 새삼 군침이 도시나?”

서준의 말인즉슨 태 회장의 딜에 관심 없는 것은 물론, 아버지와 두 형을 대놓고 디스하는 거였다.

듣다 보니 좀……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서준의 발언에 이준과 용준은 단밤을 주워 먹다 벌레 씹은 낯빛이 되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죽으려고 환장했지!”

이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고, 화를 못 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준은 당장이라도 잡아 죽일 것처럼 서준의 멱살을 낚아챘다.


“그만해라! 정신 사납다!”

어디에서도 밀리지 않을 두 남자의 큰 체구가 응접실을 들었다 놓을 기세였지만, 태 회장의 엄중한 목소리에 용준과 서준은 도로 제자리에 착석할 수밖에 없었다.


“형들이야 아직 이루고 싶은 게 많으니 다소 이해는 가지만, 사람 개념이 다 똑같을 순 없잖아?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본데, 그걸 챙기고 싶으면 알아서들 하시라는 거지.”

교묘하게 모욕당한 것 같았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용준은 목을 길게 빼고 멀쩡한 옷깃을 펄럭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와, 이 새끼 말하는 거 봐.”

“서준이 너, 정말 재수 없는 건 알지?”

“어.”

깔끔하게 인정한 서준이 피식거리자 두 형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술은 꾹 다물었다. 분하긴 한데, 딱히 할 말도 없어서였다.


“돈으로 자식을 흔드시는 아버지가 제일 비열하시고요.”

방심하던 차에 태 회장마저 한 방 먹었다. 그러나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내려다보는 서준이 그리 싫지만도 않은 태 회장은 팔을 휘휘 저어 아들들을 내쫓았다.


“내 할 얘긴 끝났으니 다들 나가 봐!”

모두 나간 서재에 혼자 남은 태석호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회장님.

“강 비서, 그 아가씨 일 말이야. 아직인가?”

얼마 전 태 회장이 캐나다에 보낸 사람들은 별다른 수확 없이 헛걸음만 치고 돌아왔다. 알고 보니 아이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유전자 감식 의뢰는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그쪽에서 워낙 아이를 감싸고 다녀서요.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됐고!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면 진즉 말을 했어야지! 내가 직접 나설 때인가 본데, 이른 시일 안에 그쪽과 약속 잡게.”

-무슨 구실로 말씀입니까.

“내 엄 교수와 두터운 친분이 있지. 그거면 족하지 않겠나. 조 여사를 정식으로 초대하란 말일세. 자네는 식사하기 좋은 곳이나 마련해 놓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에게 지시를 마친 태 회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상의 안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안에는 꼬마 아이가 환히 부서지는 햇살처럼 까르르 웃고 있었다.


“요 녀석…….”

암만 봐도 서준이 어릴 적 모습을 그대로를 빼다 박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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