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눈물 없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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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눈물 없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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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눈물 없는 그리움
2023.06.19.
모처럼 집에 일찍 귀가한 소연과 식구들이 거실에 모여 앉은 여유로운 저녁이었다.
“아.”
“암!”
유모인 제시카가 감기 기운이 살짝 있는 현우에게 약을 먹였다. 언제나 약이라면 질색하며 도망치는 아이가 쓴 약을 넙죽 받아먹으니 신기할 따름인 소연이 눈썹을 크게 둥글렸다.
“우와! 우리 현우, 이제 쓴 약도 잘 먹는 거야?”
“웅! 회장 할부지는 뭐든 잘 먹는 혀누가 좋대떠요.”
낯선 이를 친근하게 표현하는 현우의 말에 다소 놀란 소연이 연희에게 물었다.
“회장 할아버지? 엄마, 지금 현우가 뭐라는 거예요?”
“아, 내가 깜빡하고 말 안 했네. 오늘 오전에 엘스텔라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지 뭐니. 태 회장님이 네 아빠 대신에 나랑 식사 한번 하고 싶어 하신다고. 그래서 점심때 회장님과 식사하고 왔어.”
“혀, 현우도 같이요?”
식겁한 표정을 애써 감춘 소연이 다시 묻자 연희는 푸근한 미소와 함께 이야기했다.
“그렇단다. 한데, 회장님도 그렇고, 현우도 서로 스스럼이 대하지 뭐니. 어른과 아이의 대화인데도 잘 통하는 게 누가 보면 친할아버지인 줄 알겠더라니까.”
친할아버지…… 짙어진 소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냥 식사만 하신 거예요? 별다른 일은 없었고요?”
“서로 안부를 묻는 거 말고 뭐가 있겠니. 좋은 음식 대접해 주시기에 아주 잘 먹고 왔단다.”
엄마의 얘기에 덜컥한 심장을 겨우 추스른 소연은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동안 연희가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현우가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다고 하니, 회장님은 네가 며느릿감으로 참 탐이 난다고 하시더라. 아이 눈이 정확하다잖니. 현우가 잘 따르는 것만 봐도 태 회장님이 참 인자하신 분이시긴 하지. 편견도 없으시고.”
“…….”
연희 말에 소연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조금 전 덜컥했던 것과 다른 의미의 두근거림이었다.
그냥 재벌도 아닌 재계 서열 1위의 최고재벌.
그 어마어마한 배경, 당연히 녹록한 사람들이 아닐 거라는 선입견으로 태서준을 포기했다. 현우를 지키려면 그와 헤어지는 것만이 답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엄마 말대로 그의 부모님이 인자하고 자애로우신 분들이라면…….
적어도 엄마와 아이를 떨어뜨릴 생각이 전혀 없는, 현우의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 애써 주실 분들이라면…….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이 너무 섣부르게 판단한 것이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이미 늦은 걸 알지만.
불가능하다는 것도 너무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소연은 시간을 스페인에서 떠나기 직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후회와 실낱같은 희망이 마구 뒤섞여 가슴 깊숙이 자작자작 스며들었다. 그러나 조용히 소용돌이치는 그 마음을 그녀는 꾹 눌렀다.
더없이 다정했던 그가 말라가를 벗어나며 일순 차갑게 돌변했다. 그 일이 다시금 떠오른 소연은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절단된 그와의 관계에서 뭔가 바라는 자신이 어리석은 거니까.
***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서준은 일주일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운동하거나 그마저 지겨울 땐 밤낮 가리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진탕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
몸을 굴리고 혹사해도 지치지 않는 갈망은 더해만 갔다. 무기력해진 자신이 싫어 차기작 시나리오를 들춰 보았으나 성에 차고 말 것도 없이 활자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대충 끝낸 서준은 조금 전 채 대표가 놓고 간 <키하젤> 중요문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신약 연구비용만 수백억을 날려 먹은 <바이오휴>는 더 끼고 있어봤자 흑자를 기대할 수 없는 애물단지였다. 그 사업체 이외에도 <키하젤> 산하로 들어온 굵직한 회사는 많았기에 채 대표는 그 제약 회사를 매각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서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잠깐 손해를 봤다고 바로 처분하는 게 온당한 처사냐며 채 대표에게 자신만만한 의문을 던진 건 이 주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 황금알을 낳는 회사로 급반전한 <바이오휴>.
그 엄청난 성과가 고스란히 담긴 서류가 서준의 손안에 있었다. 축배라도 들어야 할 일이지만 서준은 별 감흥이 없었다. 좋은 일이 생겨도 그저 무미건조할 뿐이었다.
서류뭉치를 휙 던져버린 서준은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을 옮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벗은 몸은 마른 듯도 했으나 그 덕에 각진 근육은 더 뚜렷해지고 전신의 유려한 굴곡은 근사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툭 털며 욕실을 나온 서준은 가운만 걸치고 거실로 이동해 오디오를 켰다.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 서준은 묵직한 첼로 선율에 청각을 의지했다. 하지만 반도 타지 않은 장초는 이내 버려지고, 손에는 어느새 붉은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잔이 들려 있었다.
“엄소연…….”
서준은 와인 빛깔로 붉게 물든 입술로 깊은 그리움을 적막한 공간에 툭 던졌다.
와인을 음미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이름을 느릿하게 여러 번을 부르는 동안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가지고 싶어 가져버렸다.
하지만 한순간 얻은 만족감은 더 큰 욕망을 불러들였다.
그런데 그 모든 갈망의 시작인 그녀는 지금 없다.
제아무리 머리와 가슴에서 지우려 해도 좀체 사라지지 않는 엄소연. 그녀를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겠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다.
서준은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녀가 없는 하루하루는 무의미할 뿐이라는 걸. 그녀를 향한 마음과 감정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는 걸. 그녀의 빈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 했던 자신이 무척이나 어리석었다는 걸.
“엄소연…… 엄소연…….”
후회를 곱씹으며 그녀의 이름을 혀에 감고 뱉어낼 때마다 포도 향과 알코올이 뒤섞인 입맛은 향긋하면서도 썼다. 빈 잔을 다시 채우고 디캔터를 내려놓는 길고 곧은 손가락의 움직임이 섬세했다.
그 손으로 와인 잔을 들어 올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삐딱한 시선이 인터폰 쪽으로 돌아갔다.
자정에 가까운 이 시간, 음악도 끊긴 이 고요한 공간의 적막을 깬 건 때아닌 초인종 소리였다.
서준이 간단한 터치로 현관문을 열자 얼마 안 있어 거실에 모습을 드리운 구원후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서준 옆으로 털썩 앉았다.
“갑자기 뭐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원후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놀랍지도 없는 서준이 피식 웃으며 또 다른 잔에 와인을 채웠다.
“나 오늘 선봤다.”
“맞선녀랑 이제까지 같이 있었으면 꽤 괜찮았나 본데, 왜?”
“아주 괜찮아서, 일찌감치 헤어지고 나 혼자 술 좀 마셨다!”
“아, 별로였군.”
“…….”
답답한 듯 슈트 상의마저 벗어버린 원후가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소파에 드러눕듯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본 서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
“미친! 나한테 대나무밭이 너밖에 더 있냐. 그래서 왔다, 왜?”
“저런, 맘에 안 든 맞선녀가 당나귀 귀였어?”
서준의 장난스러운 말투 때문인지 원후가 웃음 끝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모님 성화에 질질 끌려다닐 바에야 고백이나 해 볼까 봐. 결과가 어떻게 되든.”
뜻밖의 얘기에 위를 향한 서준의 시선이 옆에 있는 원후에게 돌려졌다.
“……너, 좋아하는 여자 있었어?”
“어.”
“누구.”
“나중에. 대시해 보고 성공하면 말해 줄게. 거절당하면 쪽팔리니까.”
“그러든가.”
더는 관심 없다는 듯 서준은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끔뻑끔뻑, 그러다 또다시 고개를 돌려 원후를 빤히 쳐다본 서준이 입을 열었다.
“너, 혹시…….”
“혹시, 뭐?”
강렬한 눈빛에 떠밀린 원후의 안면이 뒤로 쓱 물러났다.
구원후의 고백. 그것을 여러 번 곱씹던 서준은 왠지 모르게 엄소연이 뇌리에 스쳤다.
“아니다.”
하지만 그 직감을 음성으로 내진 않았다. 저와 구원후가 사촌인 걸 뻔히 아는 엄소연이 그런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진 않을 거라는 일말의 믿음은 있어서였다.
“자식, 싱겁긴. 그나저나 내일 시간 있냐?”
내일이 <태양의 주인> 첫 방영이 있는 날이었다. 원후는 회사 시청각실에서 그 드라마를 다 같이 모여 시청할 거라는 계획을 서준에게 알려주었다.
“맘 있으면 너도 같이 보자고.”
태서준이 그 시시한 모임에 어디 나타날 사람인가. 하지만 원후는 혹시나 하며 말했고, 역시나 서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절이었다.
“됐다. 거길 내가 왜.”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맘 바뀌면 오든가.”
“안 간다니까.”
짜증이 섞인 서준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곳에 가면 또 엄소연을 마주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제작보고회 때처럼 그녀를 그냥 보내진 못할 것 같았다.
그 혼탁한 화심에 뛰어들 생각이 전혀 없는 서준은 와인을 옆으로 치우고 다른 잔에 코냑을 부어 마셨다.
진한 알코올을 넘긴 목 안이 몹시 뜨거웠다.
더는 못 견딜 만큼.
***
아장아장, 그보다 훨씬 커진 보폭.
두 살에 헤어져 네 살에 다시 만난 아기는 부쩍 성장해 있었다. 이제는 아기가 아니라 작은 꼬마가 되었다. 또래 아이보다 좀 더 큰 키와 긴 팔다리를 지닌 현우는 제법 움직임이 빨랐다.
“현우야, 그러다 다쳐! 엄마랑 같이 가야지!”
뒷산 오솔길 산책로를 신나게 뛰어 소연을 앞질러 가던 현우가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제자리에 섰다.
“이리 와, 안아 줄게.”
아이가 뒤를 돌아보자 소연이 어서 안기라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이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신바람 나게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 뛰었다.
그 모습이 마냥 강아지처럼 귀여운 소연은 서 있는 곳에서 부러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같으면 벌써 달려가 아이를 안았겠지만, 키를 낮추고 아이가 자신의 힘과 의지로 와주길 진득이 기다렸다.
드디어 보송보송한 아이의 몸이 엄마에게 와락 안겼다.
뿌듯한 미소가 새하얀 얼굴에 가득 번진다. 소연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 안긴 아들을 꽉 끌어안고 굽혔던 다리를 곧게 폈다.
“재밌어?”
“키킥…….”
사랑스러운 아이의 눈에 시선을 맞춘 소연이 묻자 그렇다는 작은 고갯짓이 단박에 돌아왔다. 바둑알처럼 크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 웃으니 더욱 예뻤다.
“이제 엄마랑 걸을까?”
“웅!”
누굴 닮은 건지, 온순한 아이는 꽤 영특했다. 영어에 익숙한데도 번역기를 돌리듯 이내 조그만 입술로 한국어를 곧잘 읊어댔으니.
“엄마 손 잡고 걸을래요.”
“그래. 그러자.”
보드랍고 쫀득한 뺨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한 소연은 아들을 땅에 내려주며 작고 작은 손을 꼭 그러잡았다. 아이의 걸음에 맞춰 사부작사부작 걷는 모습은 소녀처럼 앳돼 보였으나 누가 뭐래도 그녀는 엄마였다.
소연은 행복했다.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 순간을 간절히 바라며 기다렸던 만큼. 보고 싶어도 안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아파하며 견뎠던 그 시간마저 소중해질 만큼.
그러나 딱 한 가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빈자리가 소연의 표정을 차츰 어둡게 만들었고, 기분은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소연은 자신에게 문뜩문뜩 수도 없이 자문했었다. 과연 태서준을 밀어낸 게 잘한 일이냐고. 후회하진 않느냐고. 그때마다 그녀는 ‘물론’이라고 자답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연은 힘주어 입술 끝을 당겨 올렸다.
눈물 없는 그리움.
눈물이 말라버린 체념 어린 미소였다.
여름 끝자락을 아들과 함께 걷고 있다. 그 사실이 암울한 기분을 꽤 많이 희석해주었다. 현우의 손을 꼭 쥔 소연은 약간 상기된 눈시울로 파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오늘따라 참 좋은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