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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나 좀 봅시다 (50/51)


50화. 나 좀 봅시다
2023.06.23.


흙장난에 먼지투성이가 된 현우를 씻기느라 엄마와 제시카는 욕실에 있었다.

그사이에 주방에서 아들이 즐겨 먹는 간식을 능숙한 솜씨로 재빠르게 만들어낸 소연은 깨끗하게 씻고 나온 현우를 엄마에게서 인계받아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낮잠을 재우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다녀올게요, 엄마. 회사에서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회사에서 드라마 첫 방영을 다 같이 시청하기로 한 터라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마친 소연은 현관에서 엄마의 배웅을 받았다.


“그래. 애 걱정은 말고 잘 다녀와. 아차, 아직 말을 안 했네. 난 내일 제주도에 갈 거야.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 집에 꼭 들러야 한다고 소린이가 계속 성화를 부려서 말이야.”

“나도 따라가고 싶은데. 작은 언니랑 형부랑 조카도 보고 싶고요.”

“아서라. 넌 일이 있잖니. 현우랑 나만 다녀오마.”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온 연희는 웃는 입술에 진심 어린 조언을 담뿍 담아냈다.


“회사에 괜찮은 사람은 없든? 연애하기 좋을 때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한창 꽃같이 예쁠 네 나이에 너무 혼자만 있어도 못써.”

“엄마도 참, 제가 왜 혼자예요? 이제 현우도 같이 사는데.”

“이것아! 애 말고 남자를 말하는 거 아니니. 내가 적어도 한 달은 더 한국에 머물 거니까, 넌 그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해. 가령 연애라든가, 데이트라든가, 소개팅이라든가 그런 거 말이야.”

“풉…… 다 같은 얘기면서. 아무튼 엄마 때문이라도 노력은 해야겠네요.”

맘에도 없는 소리로 연희를 안심시킨 소연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시 후, 차를 끌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소연은 삼성동 방향으로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그 순간이었다.

쾅!

뒤따라오던 차가 소연의 차를 들이받은 거였다.

아파트 근처라 서행했고, 우회전하면서 당연히 더 조심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접촉사고가 난 거였다. 뒤에 차는 한눈에 봐도 흔하지 않은 고급세단. 그 차에서 내린 남자가 소연에게 다가와 차창을 두드렸다.

톡, 톡.


“엄소연 씨.”

“!”

남자가 소연의 이름을 알았다.

한편, 소연도 이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

어둑한 밤, 성북동 구 회장의 자택 차고로 고급 차 한 대가 쓱 진입했다.

조금 전 소연의 차를 뒤에서 박았던 그 세단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여사님.”

너른 정원을 거쳐 유리온실로 들어온 수행인이 고개를 숙였다.


“…….”

풍란꽃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정의 손은 가위를 쥔 채였다. 무언가에 골몰했는지 한동안 잠자코 있던 그녀가 느리게 시선을 들었다.


“그래, 내가 말한 대로 따끔히 일러줬나요?”

무겁게 움직이는 입술이 냉랭한 기운을 내뱉자 남자는 한 번 더 고개를 조아렸다.


“네. 분부하신 대로 여사님 뜻을 전했습니다.”

“그래?”

“네.”

“…….”

그렇게까지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사람 감정이야 한철에 피고 지는 꽃처럼 금세 사그라드는 것. 사람이든 무엇이든 말이지.

화병에 꽂고 있던 보라색 장미를 다시 손에 든 여정이 줄기의 가시를 하나씩 톡톡 잘라내며 물었다.


“그 아가씨는 뭐랍디까. 이번에도 아니라고 딱 잡아떼던가요?”

“여사님이 오해하신 거라고 재차 말하더군요. 꽤 황당해하는 낯빛이었습니다.”

“흠…….”

길게 한숨지은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움직였다.


“봉투는? 차 수리비에 더 얹어서 넉넉히 넣었는데.”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차 수리도 본인이 알아서 한다고 하더군요. 성격이 그런 모양인지 화를 내면서도 차분하게 말하는데, 조목조목 이치에 맞는 말만 골라 하니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시 가서 건넬까요?”

수행인이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며 묻자, 잠시 고상하게 빗어 올린 머리를 매만지던 여정은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럴 것까진. 싫다는데 별수 있나. 그 정도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그냥 넣어두라는 건 알겠는데, 넙죽 받기엔 큰돈이었다.


“그러면 이건 어떻게……?”

“그건 수고비 해요.”

살짝 미소를 내비친 여정이 인자한 어조로 말했다.


“비서실 회식이라도 하든가.”

“회장님이 아시면…….”

“그래서 드리는 거 아닙니까.”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특히 구 회장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아, 예…….”

그러니까, 이거로 입막음하시겠다? 떳떳하지 못한 일을 시킨 건 아는 모양이다.

돈 봉투를 도로 집어넣은 수행인이 유리온실에서 물러가자 여정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며 아까처럼 난초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태서준에 대한 기사가 세상에 뿌려졌다. 육중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자루가 툭 터져버리듯 말이다.

그와 함께 태서준의 옛 연인이 유정화였다는 폭로까지 온갖 포털 사이트에 떴으나 그 스캔들 기사는 이틀도 못 가 깨끗이 지워지고 묻혀버렸다.

사실 태 회장이 그리되도록 손 쓴 거지만 역시 과거는 현재의 쨍한 빛을 이길 수 없는 것인지 태서준과 유정화의 일을 크게 신경 쓰는 이도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대신 엄소연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과 로열패밀리인 태서준의 쇼킹한 배경은 두 사람이 출연한 드라마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크게 한몫했다.

어쨌든 그건 남의 사정이고.

여정이 제일 기분 나쁜 건 태서준과 구원후의 이종사촌 관계부터 언니의 집안과 제 집안을 비교한 기자들의 얄궂은 저울질이었다.

태 회장 집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계 서열 1위인 건 맞지만, 그로 인해 제 집안과 아들이 다른 누구의 화려한 빛에 가려지는 건 자존심 상할 수밖에 없는 일.

이게 바로 이인자의 설움이려나.

풍란 잎사귀를 매만지며 여정은 몇 개월 전 엘스텔라 호텔에서 엄소연을 처음 맞닥뜨린 그 시점을 떠올렸다. 한 계절이 지나도록 여정은 꺼림직한 그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서준의 룸에 있던 엄소연을 원후는 뭔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그 아가씨는 서준만 바라봤었고. 그 순간 기가 막혔던 건 마치 삼각관계처럼 서로 물고 무는 세 사람의 묘한 시선이었다.

한낱 연예인인 주제에 내 아들을 무시해?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제 아들은 안중에 없는 엄소연의 시선을 눈여겨본 여정의 기분은 몹시 불쾌했다.

그 일이 내심 신경 쓰여 아들의 행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주얼리숍에서 구원후가 주문한 반지에 새긴 이니셜이 그 계집애 이름의 약자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니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아빠도 모르는 아이를 덜컥 낳은 그 계집애를 제 아들이 맘에 두고 있다는 게 실로 언짢은 여정은 미연에 약을 치듯 오늘 일을 벌인 거였다.


“하! 많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 애 딸린 계집애냐고!”

제 성질에 못 이긴 여정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한 풍란의 꽃봉오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평소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난꽃이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그것을 보면서도 여정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리 곱고 예쁜 꽃이어도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거니까.

***

소연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조인하와의 불미스러운 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구원후.

근래 들어 소연이 두 번이나 차여정에게 불려간 건 그의 병실을 한동안 들락날락했던 탓이었다. 그때 저를 반강제로 태워 조용한 장소로 데려갔던 그 차와 그 기사였다.

여정에게 엄한 말을 들은 소연은 아니라고 정확히 말했지만, 여정은 작정한 듯 몰아붙였다.

아니라고 잡아떼지만 말고 제 아들과 진짜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괜히 오해받지 말고 회사를 떠나라고.

그리고 두 번째로 불려갔을 땐 대화 자체가 없었다. 여정은 소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고, 소연도 더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한데, 오늘은 고의적인 사고에 돈 봉투까지 건넸다. 모멸감을 주려고 한 차여정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간파한 소연은 기분이 영 찜찜했다.

하지만 이까짓 일쯤이야.

당신이 구 대표님 엄마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웃기지 마!

한 번만 더해 보라지, 나도 당하고만 있진 않을 테니까!

강하게 맘먹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CN 사옥 주차장에서 범퍼가 깨진 차를 한참 응시하던 소연을 눈을 돌려 이만 그곳을 벗어났다. 시청각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가슴도 콩닥콩닥 뛰었다.

이제 곧 드라마 첫 데뷔를 한다. 나, 엄소연이.

시무룩했던 소연의 입술이 짐짓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

오후 10시.

시청각실 안에는 CN 소속 배우뿐만 아니라 여타 배우들까지 모여들어 매우 붐볐다.

태서준이 없는 관계로 오민정이 그들의 축하를 독차지했다. 물론 엄소연을 찾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고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소연은 드라마가 시작하기 1분 전, 스크린 뒤쪽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시작한다!”

누군가의 외침이 있자마자 웅장하게 흘러나온 드라마 오프닝 곡과 함께 고퀄리티 CG로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잘 살려낸 박진감 넘치는 화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도저히 100일간의 작업물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성도 높고 현실감 넘치는 장면들이 마치 스크린 밖까지 튀어나오는 듯도 했다.


“……!”

소연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 커진 건 주인공도 아닌 저가 시작부터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더구나 이것이 편집의 위대함일까. 그저 허허벌판에서 찍은 것이 전부였는데, 판타지적 효과가 실사처럼 덧씌워진 영상은 가히 예술이었다.

산 중턱,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아슬하게 서 있는 소여화. 그녀는 위기에 처한 영지를 고즈넉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사를 상징하는 붉은 베일에 반쯤 가려진 얼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비로운 여신 그 자체. 커다란 눈시울에 맺혀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모두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만큼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박!”

“아니, 시작부터 이리 정신을 쏙 빼면 어쩌냔 말이지!”

“역시, 윤지완 감독님 솜씨는 알아줘야 해.”

스크린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은 절로 돋은 소름과 짜릿한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제일 앞줄에 앉아 있는 오민정만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정지된 표정에 짝짝이로 구겨진 눈매는 기분 나쁨을 여지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주인공이 저인데도 첫 화면에 나오지 못한 게 심히 못마땅했다. 또한, 드라마 시작부터 엄소연의 존재감에 자신이 밀리고 치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였다.

엄소연으로 시작해 엄소연으로 끝나는 1화의 영상 스케일은 오민정이 상상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휘잉―.

어딘가에서 불어온 돌풍에 새빨간 옷자락이 피의 강처럼 길게 물결쳤다. 큰 무리를 이룬 하얀 새들이 소여화의 주위를 에워싼 건 시작에 불과했다. 곧 거대한 형체가 장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바위 아래쪽에서 훅 치솟았으니까.

그 비룡의 등에 서슴없이 뛰어올라 하늘 높이 솟구쳐 마을 광장으로 날아간 소여화는 전설의 용을 제 몸처럼 다루는 여전사였다.

거짓말처럼 하늘에 크나큰 용이 뜨자 하던 일을 멈추고 그것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왕실 앞까지 모여들어 삽시간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창공을 배회하던 비룡이 땅에 착지했고, 높은 용의 등에서 그녀가 크게 외쳤다.


“난 소명 왕의 딸, 소여화다!”

비운의 운명을 당당히 받아들인 여인, 하녹국 공주의 귀환이었다.


“너희들을 위해 내가 왔다! 하녹인이여 더는 울지 마라! 우린 다시 일어설 것이다!”

소여화의 아름다운 모습에.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무엇보다 당차고 강렬한 여전사의 모습에 압도당한 군중들은 감격에 찬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왕을 잃고 노예로 전락한 동족을 바라보며 찡하고 먹먹해진 소여화는 더욱 단단한 음성으로 외쳤다.


“반드시 이 나라와 백성들의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나, 소여화가 반드시!”

와아아아아…….

군중들이 외치는 함성이 왕궁 안까지 울려 퍼지자 어느 순간 왕실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문에서 나온 흑색 갑옷에 흑마를 탄 남자가 하녹국을 암흑으로 만든 마왕 기천율이며 세상을 발밑에 둔 강력한 지배자였다.


“그러자면 나부터 쓰러뜨려야 할 것인데. 환영하오, 소여화 공주.”

스산하게 미소 짓는 강한 눈빛이 소여화 공주를 단칼에 베는 듯했다.

서로를 마주한 엄소연과 태서준의 모습이 크게 클로즈업되며 드라마의 배경 음악이 묵직하게 깔렸다.

곧이어 현대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루프톱에서 태서준과 오민정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에서 화면이 정지되었다.

이것이 <태양의 주인> 첫 화의 엔딩이었다.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분위기였으나, 시청각실 뒤편에 앉아 있는 소연은 조용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콩콩거리던 가슴의 울림도 어느새 사라졌다. 대신, 그 가슴을 채운 건 주체할 수 없는 막막함이었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한 시간 내내 화면 속의 태서준만 바라보고 있자니 더 그런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

아래로 망연하게 고정됐던 소연의 눈길이 갑자기 들려졌다. 빠르게 주위를 더듬는 눈동자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가 왠지 이곳에 와 있는 것 같아서. 아닌 걸 알면서도 저를 어딘가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아서. 소연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역시였다.

느낌은 느낌일 뿐이었다.

다시 스크린을 향한 눈.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잠시나마 스쳐 간 가느다란 희망은 지독한 후회로 바뀌어 있었다.

전시장에서 멀어지는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말 걸. 전화가 왔던 그때 보고 싶었다는 말이라도 해볼 걸, 하는 때늦은 후회 말이다. 머리로는 태서준과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가슴은 아직 그를 포기하지 못한 거였다.

소연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자막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시청각실의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드라마야, 영화야?”

“헐, 미쳤다!”

“완전, 찢었다!”

장대한 스토리와 뛰어난 그래픽 영상이 모든 이의 시각과 청각을 모조리 압도해버렸으므로.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저 나쁜 기천율이 소여화를 죽이는 거야, 살리는 거야?”

“그러게. 여기서 자르면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리라고.”

“내 말이. 난 내일까지 1화만 무한 반복으로 볼 것 같아.”

다들 입 모아 이야기하는 사이에 잠자코 있는 소연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가 당도했다.


[나 좀 봅시다. 밖으로 나와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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