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빈국의 아이(1)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요소가 두 가지 있으니, 바로 불과 마력이다.
불은 안 쓰이는 곳을 찾는 게 이상할 정도고, 마력은 개인의 수련을 넘어 생활 전반에 깊숙하게 침입했다. 굳이 예를 하나 들자면 열-마력 변환 마법진이 설치된 발전소가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둘의 아성을 넘보는 새로운 강자가 출현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미궁.
미궁이 발견된 후 백여 년. 그 시기 동안의 변혁은 그 이전의 수천, 수만 년보다 급격했고 찬란했다.
*
천연자원을 가득 담은 화물열차는 밤에도 멈추지 않았다. 열차가 만드는 바람이 기찻길 옆으로 죽 늘어선 판잣집들을 차례대로 흔들었다.
이러다가 집이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샘솟는 장면이지만, 누구 하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곳의 거주민들에겐 익숙한 현상이었다. 바느질 자국이 가득한 이불 위에 누워있는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달빛과 별빛을 전등 삼아 책을 봤다. ‘마법공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겉표지는 너덜너덜했다.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소년이 얼마나 자주 들춰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탁탁탁.
소년은 익숙한 신발 소리가 들리자마자 책을 이불 아래로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자는 사람의 느릿한 호흡을 흉내 내기도 했다.
곧 문이 열리며 남녀 한 쌍이 안으로 들어왔다. 후줄근한 행색과 피곤한 표정은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남자가 문 옆의 빨랫줄에 외투를 거는 사이, 여자는 천장에 매달린 동그란 구체에 손을 뻗었다.
딸깍!
조잡한 솜씨로 만들어진 동그란 마석등이 빛을 뿜어냈다. 매우 작은 집의 내부가 여자의 망막에 맺혔다.
그것도 잠시, 여자의 시선은 하나, 아니 한 명에게 고정되었다. 고단한 표정도 이 순간만은 활짝 핀 꽃처럼 변했다.
“당신, 앨런이 자고 있잖소. 눈부시다고 잠에서 깰라.”
“아직도 아들을 그렇게 몰라요? 이 답답이.”
남편의 궁둥이를 몇 차례 토닥인 여인은 소년에게 다가갔다. 마석등을 등지며 생긴 그림자가 이불 대신 앨런의 얼굴을 덮자, 눈썹 근육이 반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요 녀석.”
여인이 자식의 흑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모른 척하던 앨런은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그 안에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앨런, 엄마가 뭐라고 했지?”
아들의 인사에도 여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침묵이 계속되니 이불 끄트머리로 살짝 삐져나온 책을 두드렸다.
잘 숨긴다고 했는데 왜 매번 걸리는지 의문이었다. 앨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마석등 아끼지 말라고요.”
“그래. 엄마, 아빠가 아무리 가난해도 마석등 킬 돈은 있어. 그러니까 달빛에 의지해서 힘들게 책 읽지 말고 그냥 사용하렴. 알았니?”
“메리. 일단 씻읍시다.”
“네, 알았어요. 약속한 거다?”
메리는 아들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는 나무통이 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천장에 매달린 빨랫줄에서 누런 수건을 꺼내 물에 적시고, 얼굴부터 닦기 시작했다.
아내가 씻는 사이, 이번에는 남편이 앨런에게 다가갔다.
“나무통의 물이 깨끗하더구나. 양도 많고.”
“근처 강이나 펌프는 더러워서 멀리까지 갔다 왔어요. 그래도 엄청 힘들지는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앨런. 몸이 약한 건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편하게 있어도 돼.”
“진짜 괜찮아요. 이거 보세요.”
앨런은 이불 근처 벽에 기대진 물체를 가리켰다. 누더기를 잡아당기니 바퀴 두 개가 달린 수레가 나타났다.
“접이식? 혹시 네가 만든 거니?”
“맞아요. 저기 쓰레기장에서 멀쩡한 것들 주워서···.”
“로빈슨, 메리. 집에 있나?”
누군가의 부름이 앨런의 말을 끊었다. 로빈슨은 상반신을 세우고 있는 아들을 이불 위에 눕혔다.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 테니 일단 자렴.”
부부가 밖으로 나가자 집은 조용해졌다. 마석등의 빛이 사라지자 달빛이 다시 집 안으로 손을 뻗었다.
앨런은 얼굴을 간지럽히는 손길을 피하고자 옆으로 돌아누웠다. 자신이 만든 접이식 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몸이 약해서 또래의 친구들처럼 일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부모님을 위해 깨끗한 물을 가져올 수 있었다. 앨런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랑카’는 가난한 섬나라이기에 노인, 어른, 아이는 빵 한 덩어리를 위해 온종일 노동에 매달려야 했다. 풍부한 천연자원은 가난한 국민의 소유가 아니었다.
구름을 뚫는다는 마천루, 저 하늘의 달에 연구기지를 세운다는 소식, 날아다니는 자동차 등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랑카의 국민은 먹고살기 바쁘니 외부의 상황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신기한 뉴스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진 않으니까.
그나마 앨런의 부모는 마나배터리를 충전하는 노동자여서 일꾼 중에서는 상위계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일당은 넉넉하진 않아도 부족함을 잠시 잊게 해줄 수준은 됐다.
덕분에 10살의 앨런은 일하지 않아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남은 시간과 여력을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몸이 약해도 책장은 넘길 수 있는 법. 호기심이 무척 강한 앨런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쓰레기장에서 어쩌다 발견하는 책은 앨런의 보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앨런은 일터로 나가는 부모님을 배웅하고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다쳤다가는 부모님이 걱정할 테니 조심조심 움직였다.
“책이다! ······못 읽는 글자네.”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책이라 안타까움이 샘솟았다. 외국어를 알려줄 사람도 없고, 그림도 없어서 이해할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아쉬움 가득한 동작으로 책을 내려놓은 앨런은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쓸만한 고철이나 폐자재를 가득 짊어진 친구들이 앨런에게 손을 흔들었다.
“비실이!”
“안녕!”
“지난번처럼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때 집까지 너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건 미안하고 고마운데 오늘은 이게 있어서 괜찮아.”
앨런이 수레를 가리키자 친구의 눈동자가 커졌다. 쓸만한 도구는 전부 어른들이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났어? 설마 만들었어?”
“지난번 일도 있으니까 재료 찾으면 너도 만들어줄게.”
“정말? 약속한 거다! 쟤는 맨날 비실거리는데 신기하게 ··· 뭐였더라? 물건 잘 만드는 단어가 뭐지?”
“손재주.”
“맞아. 손재주는 참 좋단 말이야.”
친구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쓰레기장 입구로 향했다. 밥을 먹으려면 쓰레기를 여러 번 운반해야 하기에 잡담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앨런은 더 깊이 들어갔다. 오늘의 진짜 목적은 폐품 수집 따위가 아니었다. 목적지에 다다르니 노쇠한 목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개 같은 독재자! 좆같은 침략자들!”
쭈글쭈글한 노인이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고함을 질렀다. 미치광이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여긴 우리 땅이야! 우리 땅이라고! 왜 쓰레기를 버리고 가냔 말이야! 얼른 치워야 해!”
노인은 앙상한 팔로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나름대로 청소한다는 행위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위치만 약간 바꾸는 것과 똑같았다.
‘어차피 여기는 쓰레기장이니까.’
사방이 폐기물이었다. 산이라는 표현도 오물의 집합체 앞에서는 겸손한 단어였다.
앨런이 직접 본 적은 없어도 소문으로는 몇 번 들었다. 기차보다 커다란 선박이 쓰레기를 몽땅 버리고 간다고. 그 대가로 윗대가리는 돈을 받는다고.
어른들의 푸념을 떠올린 앨런은 노인에게 집중했다. 젊은 시절에 외국의 공장에서 일했다는 노인은 외국어를 알았고, 누렇게 변색한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귀쟁이들이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나무를 만들었다고? 그러면 여기는 왜 이리 많은 건데! 가난한 나라라고 차별하는 거야!”
“오크 비적(飛賊)들이 독재자의 궁전에 융단 폭격을? 혁명! 그래. 혁명은 폭탄과 피로!”
물론 정신 사나운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노인의 관심사는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갔지만, 짤막한 소식이라도 알게 된다는 점이 앨런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될수록 앨런의 호기심은 단비를 맞이한 새싹처럼 꿈틀거렸고, 무엇보다 상상은 공짜였다. 그 누구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한참을 떠들던 노인은 버려진 냉장고에 기댔다. 기력을 소모해서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앨런은 그나마 깨끗한 비닐봉지에 빵 쪼가리를 넣어서 둘둘 말고는 노인의 발치에 던졌다. 엄마에게 배운 대로 이야기 값을 치른 것이다.
노인은 봉지를 열어서 빵을 발견하자, 단숨에 씹어 삼키는 대신 무릎을 꿇고 하늘을 쳐다봤다.
“그 위에서 나를 보고 있는 거니? 배곯는 아비를 위해 천국의 음식을 나눠준 거니? 미안하다. 나 때문이야. 네 말을 듣고 이 지옥에서 얼른 탈출했어야 했는데···.”
내전에서 자식을 잃고 미쳤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 앨런은 노인을 뒤로하고 쓰레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앨런에게 전환점이 찾아왔으니.
“로빈슨과 메리의 아들이라고?”
“네.”
경비는 앨런의 손에 들린 도시락 꾸러미를 보다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적였다. 무전기에 대고 몇 마디를 하자 부부가 입구로 걸어왔다.
“굳이 가져다줄 필요는 없었는데···. 아들, 괜찮니?”
“문제없어요. 그건 뭐예요?”
앨런의 시선이 메리의 조끼에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부착된 직사각형의 은회색 물체에.
“그게 마나배터리예요?”
“그래, 맞단···. 세상에 땀 좀 봐.”
메리는 대답하다 말고 소매로 아들의 이마를 훔쳤다. 자신의 옷 따위가 축축해지든지 말든지 팔을 움직이는 사이.
띠링!
마나배터리에서 맑은소리가 들렸다. 앨런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등 뒤로 감췄다.
“혹시 문제가 생겼어요? 고장 난 거 아니죠?”
메리는 불안해하는 아들과 배터리를 차례대로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완전히 충전되었다는 의미야. 이상하네. 평소라면 30분 정도는 추가로 힘을 써야 하는데 왜 갑자기 이럴까?”
메리가 고민에 빠진 사이, 로빈슨이 앨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혹시 어디 아프진 않니?”
“전혀요.”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 마나배터리 충전은 마력이 있는 어른도 힘든 일이야. 그런데 방금은 네가 손을 대니 충전이 됐고.”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긴 했어요. 어? 그러고 보니 숨쉬기가 편해졌어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물론 마나 자체가 노동자에 불과한 로빈슨이 이해할 수 없는 에너지기도 했다.
충전도 로빈슨이 직접 하는 게 아니라 헌혈하는 것처럼 배터리가 몸에 있는 마력을 빨아들일 뿐이었다. 그 증거로 부부의 팔뚝에는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했다.
로빈슨의 걱정에도 앨런은 눈을 빛내며 좋아했다. 드디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저도 여기에서 일할래요.”
““안 돼.””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마나는 불가해의 힘이었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언제든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은 몸도 약하지 않던가.
앨런은 이대로 부모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며칠 지켜볼게요. 그러다가 문제없으면 다시 올게요. 어때요?”
“앨런···.”
“일을 시작하고 몸이 아프면 바로 그만둘게요. 약속해요. 제발요. 네?”
이쯤 되니 부부도 아들을 말릴 수 없었다. 스스로 음식을 구하는 또래와 달리 집에서 가만히 있는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기에.
메리가 앨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약속한 거다. 아프면 바로 말해야 해. 절대로 저번처럼 숨기다가 끙끙대면 안 된다.”
“네.”
앨런이 대답하자 로빈슨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옥수수 전병에 채소와 고기가 말려있었다. 식사를 마친 가족은 경비실 근처의 나무 그늘에서 몸의 열을 식혔다.
바람을 만끽하던 앨런이 아빠에게 물었다.
“안 들어가도 괜찮나요?”
“점심시간은 30분이나 돼서 아직 남은 시간은 충분하단다.”
“그럼. 우리가 일하는 공장은 복지가 좋은 편이야.”
메리가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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