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1)
앨런은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햇살이 눈을 콕콕 찔러서 더 이상 잠을 청하기 힘들었다.
“으으···.”
딱딱한 갑판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권투선수에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한껏 기지개를 켜며 수평선을 보고 있으니, 타륜을 잡고 있던 로빈슨이 말을 걸었다.
“일어났구나. 잠자리는 어떻더냐?”
“자다 보니 적응되네요. 아예 배 위에서 살아도 되겠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하다고 부모님이 걱정하는데 ‘아파죽겠어요.’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이럴 때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이 존재했다.
로빈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넘어가는지는 본인만 알리라.
앨런은 딱딱하고 맛이 엉망인 보존식, 아니 영양소 덩어리를 침으로 살살 녹이며 조타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잡을게요. 벽에 기대서 쉬고 계세요.”
“그러마.”
로빈슨은 바로 자리를 비켜줬다.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할 정도로 바다가 잠잠했기에 누가 타륜을 잡아도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로빈슨이 진짜로 마음을 놓거나 편히 쉬지는 않았다. 부인 옆에 앉아서 마나배터리와 연결된 바늘을 팔뚝에 꽂았다.
부부에게 마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탈출을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였다. 화석연료가 모자라도 마나만 있으면 엔진은 어떻게든 굴러갈 테니까.
사실 둘 뿐이었다면 여기까지 오는데도 훨씬 긴 시간이 걸렸을 테지만, 마력노동자 5~6명분의 힘을 쏟고도 멀쩡한 앨런 덕분에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앨런은 아빠가 가르쳐준 대로 나침반과 태양을 살피며 배를 몰았다. 낡은 지도가 있긴 했지만, 땅이 보이질 않아서 쓸모가 없었다.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 보는 풍경에 커졌던 호기심과 모험심은 한껏 가라앉은 상태였다. 매번 같은 경치라 이제는 신기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기대감이 꿈틀거렸다.
‘책과 신문,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간접 체험하던 세상을 직접 만날 수 있어.’
랑카가 이끼 가득한 좁은 우물이었다면, 외국은 푸른 하늘과 태양이었다.
앨런은 우물에서 만족하기 싫었다. 끝내 그곳을 기어 올라가서 더 넓은 하늘을 보길 원했으며, 우물 밖의 세상을 직접 체험하길 소망했다.
‘쓰레기장에 있던 마도구는 고장 나서 버려진 것들뿐. 이제 그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직접 볼 수 있어.’
당연히 뭍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상상은 자유지 않은가. 게다가 긍정적인 마음이 커진 만큼 몸에서도 기운이 넘쳤다.
즐거운 마음으로 항해를 하던 앨런은 정오가 돼서야 엄마와 자리를 교체하고 조타실을 빠져나갔다.
갑판에서는 로빈슨이 바닷물로 식수를 만들고 있었다. 구하기 가장 힘들었다는 담수화 장치는 끝없이 해수를 빨아들였다.
앨런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보다 많이 만드시네요?”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거든.”
“바람도 잘 안 불고, 파도도 굉장히 약했죠. 맞아요. 조종하기 진짜 편했어요. 젊었을 때 어부로 일했다던 아저씨 말로는 바다가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봐요.”
“아니야. 그 말이 맞다.”
로빈슨은 허리를 쭉 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조타실에 잠시 들어가서 낡은 지도를 가져왔다.
“지금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이 우리의 대략적인 위치일 거다. 해룡(海龍) 해협이라 불리지.”
“해협은 육지 사이에 있는 바다라고 들었는데 땅은 하나도 안 보여요.”
“수백 킬로미터라도 육지 사이에 있으니 해협은 해협이지. 아까 왜 식수를 많이 만드냐고 물어봤지?”
“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풍랑의 방해를 덜 받았지만, 이제는 다르기 때문이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여유가 있을 때 비축하는 거다. 파도가 배를 뒤집으려고 하는데 물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로빈슨의 말대로였다. 해룡 해협은 지금까지 지나왔던 바다보다 훨씬 거칠고 사나웠다. 타륜도 거의 로빈슨이 맡았다.
앨런은 조타실 내부에 앉아서 메리와 함께 마나배터리를 충전했다. 멀미 때문에 속이 실시간으로 뒤집히는 도중에도 궁금증이 싹을 틔웠다. 바로 아빠의 조종 실력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빠가 되게 베테랑 같아요.”
“어렸을 때 어부였거든.”
메리의 시선을 눈치챈 로빈슨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원래 집안 대대로 어부였어. 시아버님, 그러니까 너에게는 할아버지도 그랬지.”
“할아버지 이야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했잖아요.”
“바다가 전부 앗아갔으니까. 아버지도 형제들도, 몽땅. 어머님도 충격을 받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고.”
아사자가 많은 랑카에서도 일가족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은 전쟁이 아니고서야 흔치 않았다.
앨런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빠와 엄마를 잃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불길한 망상을 떨쳐내고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디로 간다고 했었죠?”
“저번에 이야기 해줬···.”
메리는 아들의 얼굴을 지긋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도스 연방의 세력권으로 갈 거야.”
“솔도스···.”
랑카의 실질적 주인이자 내전을 일으킨 강대국이었다. 그곳으로 간다니 마음이 절로 싱숭생숭해졌다.
“솔도스는 기회의 땅이야. 가장 비천했던 사람도 용의 날개를 달 수 있는 곳이지. 왜냐고? 미궁이 있으니까.”
강대국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미궁이 국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미궁에서 찾는 원료와 기술은 나라를 저절로 부강하게 만들어줬다. 미궁 근처에 사람이 몰려서 세워지는 도시는 훌륭한 세금 공급원이었다.
“끊임없이 자원이 솟아나니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거겠지.”
“우리도 그곳에 갈 수 있을까요?”
“미궁은 위험한 곳이야.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평화로운 도시나 마을에 정착하는 편이 좋아. 특히 남서쪽에 있는 도시는 날씨가 화창하고 사람들도 유하다고 하더구나. 거기에서도 충분히 꿈을 펼칠 수 있을 거야. 자, 바다가 거치니 이제 우리도 집중하자꾸나.”
메리는 적절한 시기에 말을 끊었다. 긍정적인 면모만 알려줘도 부족한데, 굳이 부정적인 측면까지 설파할 필요는 없었다.
솔도스 연방이 ‘기회의 땅’이라고 불린다는 말은 맞지만, 그건 소수에게나 해당하는 문구였다. 빈손으로 타국에 불법 입국해서 성공을 거머쥐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감시를 피해 무사히 밀입국해도 문제였다. 학력의 불균형,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1~2년으로는 힘들었고, 무엇보다 합법적인 신분을 얻기 전에는 활발한 활동이 힘들었다.
여러 문제점이 산적해 있지만 메리는 말을 아꼈다. 괜한 말을 보태서 안 그래도 힘들 아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다.
“윽···.”
거친 해류 때문에 앨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엄마의 마음 같아서는 대신 아파주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이 역경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기도할 뿐.
엘런은 엄마와 시선이 마주치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메리 역시 미소를 보냈다.
‘여기에서 괜한 말은 꺼내지 말자.’
영특한 앨런은 알고 있었다. 10살이었어도 알았을 텐데 16살이 된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장에서의 경험과 독서 덕분에 외부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모른 척했다. 희망도 있는데 불행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까.
후드득!
앨런의 고개가 저절로 위를 향했다. 시커먼 밤하늘이 굵은 빗방울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마저 지랄 맞은 만큼 위장도 뒤집혔다.
그래도 참았다. 엔진이 꺼지지 않게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마력을 불어넣으며 울렁거리는 속을 달랬다.
거의 본능적인 행위였다. 잠결에 눈을 감았다 뜨면 상황이 확확 변해있었다. 비가 그치기도,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마침내 해가 떠올랐다. 그리고 육지까지 보였다.
“후우···.”
지금까지 타륜을 잡고 있던 로빈슨이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긴장과 우려가 날숨에 빠져나가고, 다행과 평온이 들숨을 타고 들어왔다.
“고비는 넘겼군. 당신도, 앨런도 고생했어. 밤새 덜덜 떠느라 몸이 아프고 속도 울렁거릴 테지만, 여정을 견디려면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해.”
로빈슨 역시 영양소 덩어리를 물에 녹여 먹으며 지도를 펼쳤다.
“육지가 보이지? 바다뱀 군도라고 불린다.”
“이 근처는 전부 해양생물의 이름이 붙었네요.”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먼 옛날에 이곳에 해룡의 둥지가 있었다고 하더구나. 해룡은 바다생물을 부리니 어찌 보면 알맞은 명명이지. 저 군도 근처는 암초가 많고 물살도 거세서 함부로 접근하면···.”
피곤함을 애써 몰아내며 이것저것 설명하던 로빈슨이 말을 멈췄다. 벽에 걸린 망원경을 꺼내서 먼 곳을 응시했다.
선박 하나가 보였다. 속도가 빠르고 선원 여럿이 타고 있었는데, 먼 거리라 선원의 얼굴이 흐려 보임에도 험악함이 느껴졌다.
거친 바다 생활을 견디다 보면 저렇게 변하기 일쑤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게다가 아침 햇살에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길쭉한 모양새를 보니 총구가 분명했다.
해적이었다.
“빌어먹을!”
로빈슨은 망원경을 던지듯이 앨런에게 맡기고 다시 타륜을 잡았다. 마력 소비효율을 무시하며 배의 속도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투다다다!
전력을 뿜어내면 사람은 금방 지치기 마련이다. 엔진도 마찬가지라 괴롭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앨런은 망원경으로 해적을 살폈다. 해적선과 어선의 크기 차이는 확연했다. 마치 덤프트럭과 경차를 떠올리게 했다.
‘들이받기만 해도 반으로 쪼개지겠어.’
심지어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어선이 한 발짝 앞서나가면, 해적선은 세 걸음 뒤쫓아왔다.
로빈슨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대로 바다를 내달렸다가는 꼼짝없이 잡힐 판이었다.
“안 돼. 제발.”
괜히 해적이 해적이겠는가. 노예로 팔리거나 그들의 하인이 되는 편이 차라리 행운이었다. 운이 없다면 심심풀이 과녁이 되어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랑카를 떠나왔는데, 이제 육지도 보이는데, 해안선만 따라서 올라가면 되는데, 이대로 붙잡힐 수는 없었다.
로빈슨은 타륜을 돌렸다. 뱃머리가 군도 쪽으로 향했다. 잡혀서 가축이 되거나 죽느니 일말의 희망에 도박을 거는 편이 나았다.
바다뱀 군도를 감싼 해역의 명칭은 ‘해룡의 심술’. 과연 그 이름답게 해류가 거세게 흐르기 시작했다.
해류라 함은 정해진 방향이 있을진대, 그것마저 무시하며 시시각각 머리를 틀었다. 덕분에 작은 어선은 혈관에 알코올을 직접 들이부은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앨런! 거리는?”
앨런은 아빠에게 배운 대로 손을 쭉 펴고 엄지를 세웠다. 해적선과 엄지손톱의 크기를 비교했다. 저 정도 크기라면.
“500미터에요!”
다행히 희망은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됐다. 군도 사이로 진입하면 암초가 많기에 어선보다 큰 해적선은 뱃머리를 돌려야 하리라.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로빈슨은 손바닥의 땀 때문에 미끄러운 타륜을 강하게 잡았다.
‘제발. 제발.’
그 순간 배가 높이 떠올랐다. 묵직한 파도가 선박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앨런은 벽을 붙잡았다. 정신이 없었다. 곧 어선이 하강하며 뱃속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가슴이 철렁 가라앉은 기분이랄까.
배가 뒤집히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앨런의 눈에도 한층 가까워진 군도가 보였다. 과장 좀 보태서 나뭇잎 개수도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콰앙!
그러나 뒤를 이은 충격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져서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원인은 암초였다. 어선을 높이 들어 올린 파도가 암초에다가 그대로 꽂아버렸다. 허리와 척추를 박살 내는 레슬링 기술인 백브레이커처럼.
어선은 산산조각이 나며 탑승객들을 바다로 뱉어냈다. 앨런 역시 짠물 속에서 허우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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