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5화 (5/193)

노박 클리닉(1)

앨런은 잠에서 깨어났다.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옷 소매로 쓱 닦고는 똑바로 누워 천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날 것 그대로의 콘크리트 천장이 보였다. 판잣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고 깔끔했지만, 비가 들어오지 말라고 나무를 덧대놓은 지붕이 그리운 이유는 왜일까.

잠들었을 때는 길몽이지만 깨어나면 악몽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기억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땡땡땡!

쇠가 쇠를 때리는 요란한 소리가 앨런을 회상에서 억지로 끄집어냈다. 몸을 일으켜서 3층 침대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방 안의 가구는 1층 침대와 3층 침대, 후줄근한 옷장이 전부였다. 바닥마저 콘크리트라서 냉기가 마구 솟아올랐다.

앨런은 1층 침대 옆에 서서 이불 덩어리를 내려다봤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알아···.”

군데군데 실밥이 풀린 이불 속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런이 다시금 재촉하니 이불이 살짝 걷히며 날카로운 눈매가 드러났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어휴.”

고저 없는 목소리에 소년을 갓 벗어난 청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토 님.”

“알았다고.”

비토는 말로만 짜증을 냈다. 일꾼이라고 함부로 대하기에는 앨런의 목걸이에 새겨진 표식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 같은 조수에게는 도구로 쓰라고 일꾼을 세 명 배정해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마지막 한 녀석이 특별취급을 받는 녀석일 줄이야.

그렇다고 부러운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저 표시는 소중한 실험체라는 뜻이니까. 사장님의 흥미를 채워주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비토 님.”

“귀 안 먹었으니까 제발 그만 부르···.”

비토는 앨런과 눈을 마주치더니 부르르 떨었다. 지하가 추워서 그랬다기에는 죽은 눈깔이 마음에 걸렸다. 채워지지 않을 공허가 그 안에 있었다.

비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앨런을 포함한 일꾼 셋이 그 뒤를 따랐다.

지하에 있는 공동식당에서 빵과 마테차로 배를 채운 비토는 오늘의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오전, 오후에 도시를 돌아다니며 고장 난 매직웨어와 마도구를 수리할 거다. 내 선에서 불가능한 물건은 수거할 거니까 너희들은 수레 꺼내오고.”

““네, 알겠습니다.””

“일이 빨리 끝나면 휴식시간도 넉넉하게 줄게.”

비토가 내민 당근에 소년 일꾼 두 명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앨런은 그들과 다르게 무표정했다. 고요한 눈빛으로 목을 긁는 비토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그의 목덜미에 있는 목걸이를.

앨런의 것보다 훨씬 가볍고 가느다랬다. 폭발 기능은 없애고 위치추적 기능만 남은 조수 전용 목걸이였다.

조수나 일꾼이나 모두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건 노박 클리닉의 사장인 노박이 그 누구도 깊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야!”

비토가 앨런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듣고 있어?”

“네.”

“정신 차리고 따라와.”

추가로 꾸짖지는 않았다. 원래 비토의 성격상 아무 이유 없이 때리지 않을뿐더러, 앨런만큼 영특하고 빠릿빠릿한 일꾼이 없는 탓이었다.

몸이 약하다는 흠이 있지만, 스펀지 같은 지식 흡수 속도와 재빠른 눈치는 단점을 상쇄하고도 충분했다.

비토는 어제 앨런과 했던 문답을 떠올렸다. 일부러 지엽적인 부분을 물었음에도 대답이 곧잘 돌아왔다. 어떤 부분은 비토도 몰라서 앨런의 눈치를 보며 책을 슬그머니 볼 때도 있었다.

‘내 밑에 들어오고 한 달 지났나? 1년 정도 제대로 배우면 조수가 될 수 있을지도···.’

고아원에서 똑똑하다고 소문났던 비토 자신도 5년이 걸려서 조수가 되었으니 다섯 배나 단축한 속도였다.

물론 모든 걸 결정하는 건 스승이자 사장인 노박. 비토는 뺨을 두드리며 일꾼들을 이끌었다.

드르륵!

철문이 위로 열리고 지상으로 향하는 비탈길이 나타났다. 앨런은 다른 일꾼보다 작은 수레를 끌고 비토의 뒤를 따랐다.

대문을 나서니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노박 클리닉은 산비탈을 따라 계단 형식으로 늘어선 도시에서 가운데쯤에 있었다.

앨런의 뒤에서 나타난 갈매기 편대가 부두를 향해 활공했다. 초승달 형태로 건설된 항구도시 ‘아로마아’의 전경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에 있는 부두에는 선박이 수시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이나 지게차도 열심히 움직였다.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장면이었다. 공허한 마음에 조그마한 감탄이 싹을 틔웠지만, 비토의 불퉁거림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달아나버렸다.

“아, 이거 왜 이래?”

비토는 작은 유리 조각을 옷에 몇 번 문지르더니 입으로 바람을 후후 불었다. 해에 잠시 비춰보더니 헤드기어 형태의 에비 포트에 조각을 끼웠다.

기억수정이라 불리는 저장장치였다. 에비는 기억수정에 새겨진 주문을 사용자 대신 캐스팅하는 기능도 있었다.

단순한 출장수리인데 마법이 왜 필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탕!

먼 곳에서 들려오는 총성이 의문을 싹 날려버렸다.

앨런만 잠시 그쪽에 시선을 던졌을 뿐, 비토와 일꾼 2명은 새소리라도 듣는 사람처럼 무관심하게 제 갈 길을 갔다.

앨런은 비토의 옆으로 얼른 따라붙었다. 그의 얼굴 앞에는 오늘 방문할 장소의 목록이 반투명한 창의 형태로 떠 있었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세보던 비토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왜?”

“몇 곳이나 방문해야 하는지 궁금해서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뭘···.”

성큼성큼 걸어가던 비토는 넓은 정원이 있는 저택 뒤로 돌아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부가 뒷문을 열어줬다.

“안녕하십니까? 노박 클리닉에서 정기점검 나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마침 사용인들의 세탁기와 냉장고가 고장 난 참이었어요.”

“급히 수리해야 합니까? 그래도 주인분의 마도구 먼저 살펴봐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그렇게 해주세요.”

비토는 가정부의 안내를 받아 저택으로 들어갔고, 앨런과 일꾼들은 담벼락 근처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수리 장면을 지켜보고 싶었던 앨런은 어쩔 수 없이 창고 벽에 기댔다. 집주인 눈에 띄지 말라는 주의를 들어서 구경하러 다닐 수도 없었다.

지루함을 잊고자 최근에 읽고 있는 마법공학 서적을 떠올리려는 순간, 끼익-하고 빡빡한 경첩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앨런의 시선이 저절로 넓은 창고 안쪽으로 향했다. 한쪽 벽에는 정원을 가꾸는 도구가, 다른 쪽에는 먼지 쌓인 가정용 마도구들이 있었다.

창고 중앙에 놓인 세탁기와 냉장고가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거나 덜덜 떨린다고 해서 가전(家顫). 그래서 가전제품이라고 불렀다.

안쪽으로 성큼 들어간 앨런은 먼저 세탁기를 살펴보다가 허리춤에서 드라이버를 꺼냈다. 함께 구경하던 일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뭐 하려고?”

“일단 뜯어보게요. 안쪽을 보면 어디가 고장 났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마력회로이론 공부한 지 한 달도 안 됐잖아. 괜히 손대서 크게 고장 나면 비토 님에게 혼날 거야.”

“여러분도 알겠지만 열어보기만 하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평생 그 자리에 머물겠죠. 혼자 했다고 보고하면 되니까 정 불안하면 밖에 나가 계세요.”

앨런의 담담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일꾼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물론 지금은 경우가 다르긴 했다. 수리 훈련용 회로도 아니고, 고객의 가전제품으로 연습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린 일꾼들이 재차 만류하려고 입을 열었다.

“비토 님이 왜 마지막으로 밀어놨겠어? 우리에게 기회를 주려고···. 벌써 분해했네.”

앨런은 어느새 덮개를 분해하고 커넥터를 떼어내고 있었다. 자동드릴을 쓰는 것도 아닌데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물건 옮길 때는 비실대면서 왜 이럴 때만 빨라···.”

일꾼들은 앨런의 옆으로 슬금슬금 붙었다. 어차피 분해했으니 꾸중은 예정된 순서였다. 운명이 예정되었으니 공부라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겉으론 아니더라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초짜인 앨런의 지식이 자신들을 벌써 따라잡았다는 사실을.

앨런은 그들이 구경하든지 말든지 세탁기 조사에 집중했다.

“마나 콘센트는 문제없어 보이고, 회로기판도 멀쩡해 보이고···.”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앨런은 코드를 손에 쥐고 마나를 방출했다. 정확히는 마력과다증으로 인해 몸 안을 꽉 채운 마나가 빠져나가는 과정이었다.

우웅!

세탁기의 모터가 돌아가다가 멈췄다.

“모터나 커패시터 문제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앨런은 벽에 붙어있는, 먼지 쌓인 세탁기에 드라이버를 들이댔다. 그 사이 일꾼들은 분해한 세탁기 내부 회로를 자세히 관찰했다.

“커패시터가 뭐냐?”

“진심으로 묻는 거야?”

“···.”

“마나가 과하게 흐르면 회로가 망가지니까 일정하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부품이잖아. 제발 책 좀 읽자.”

“그럼 너는?”

“잠깐 비켜주세요.”

앨런은 티격태격하는 둘을 밀어내고 뜯어온 부품과 세탁기의 부품을 교체했다. 다시 코드를 손에 쥐니 이번에는 모터가 제대로 돌아갔다.

“진짜 고쳤네. 그런데 왜 그냥 두는 거야? 조립은?”

“비토 님에게 검사받아야죠.”

“아···.”

그제야 허락도 없이 뜯었다는 생각이 일꾼들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창고 내부의 서늘함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 중, 새로운 그림자가 안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뭐야? 누가 이랬어?”

비토의 물음에 일꾼들의 고개를 한쪽으로 돌아갔다. 앨런은 뜨거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디가 고장 났는지 살펴보다가 커패시터를 교체했더니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검사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면 알겠지.”

비토는 일꾼들을 물리고 자신이 세탁기를 점검했다. 앨런처럼 부품을 하나하나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조수라서 앨런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다기보다는.

삐삐!

눈금과 바늘이 달린 장치가 부품의 이상을 대신 확인했다. 정상이면 초록색 불이 들어오고, 아니라면 붉은색으로 깜빡였다.

바늘을 세탁기 회로 어디에 가져다 대도 녹색만 검출되자, 비토는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줘.”

앨런은 군말 없이 고장 났다고 판단한 커패시터를 넘겨줬다. 비토가 바늘로 부품을 살짝 건드니 어두운 창고가 붉게 물들었다.

“내부 회로가 끊어졌나 보네. 제대로 고치려면 클리닉에 있는 정밀 장비가 필요하겠어. 잘했다.”

한마디를 건넨 비토는 그대로 창고를 나가서, 기다리는 가정부 앞에 섰다.

“일단 사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부품만 갈아 끼웠지만 동작에는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이쪽으로···.”

“혹시 그 물건 때문입니까?”

“네. 이번에 몇 개가 들어와서요.”

가정부가 비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심조심 말하면서도 눈동자는 덜덜 떨렸다.

“그럼 복귀하는 길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네.”

그렇게 비토는 일꾼들과 함께 목록에 적힌 주소를 차례대로 방문했다. 그리고 다시 저택에 방문했는데, 이번에는 가정부 대신 험악한 인상의 하인이 그들을 저택과 멀리 있는 으슥한 창고로 안내했다.

돌아가는 앨런의 수레에는 하얀 천이 덮여있었다. 경사진 도로를 따라 내려온 바람이 붉은 얼룩이 가득한 천을 살짝 들췄다.

안에는 사람이 들어있었다. 앨런은 애써 무시했다.

노박 클리닉은 겉으로만 보면 나이에 비해 정정한 노인이 운영하는 수리점 및 치료소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뒤 세계 사람들을 위한 병원이자, 자금세탁소 그리고 장물아비의 소굴이었다.

앨런이 운반하는 시체가 지하로 옮겨지면, 노박의 신뢰를 받는 조수들이 몸에 박힌 매직웨어를 전부 빼낼 것이다. 그리고 수리와 세탁을 거쳐 상품으로 팔려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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