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8화 (8/193)

연구실(1)

앨런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차갑고 두툼한 금속의 감촉이 노예의 신분을 재확인시켜줬다.

폭탄목걸이가 채워져 있는 한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배움이 자의적인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노박의 필요로 뿌려지는 사료와 똑같았다.

현시점에서 앨런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방.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폭탄목걸이였다.

‘하지만 어떻게···.’

앨런의 생각과 생각이 우로보로스처럼 꼬리를 물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끊임없이 경험에 의한 단서를 뱉어내고 재조립했다.

‘우선 노박.’

나이에 안 맞는 정정한 육체와 커다란 덩치를 보면 강화시술을 받았거나, 매직웨어로 몸뚱이를 채웠을 가능성이 컸다.

맨손으로 곰과 붙여놔도 오히려 당하는 쪽은 곰이 되리라. 곰보다 허약한 앨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면승부는 불가능. 다른 수단으로 타격을 줘야 해. 아, 그전에 목걸이.’

앨런의 손가락이 목걸이의 아래쪽을 훑자 열쇠 구멍이 만져졌다.

조수 중에는 앨런 그리고 일꾼들은 전부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열쇠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진 않을 터.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뒀겠지. 훨씬 깊은 지하에.’

앨런은 노박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지하 2층 밑에도 버튼 몇 개가 있었다.

조수라도 지하 2층까지만 출입할 수 있을 뿐, 그 아래는 클리닉의 주인만이 알고 있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어떻게 잠입해야 하지?’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있으니 직접 행동 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열쇠를 찾는다고 해도 아무렇게나 놔뒀을 일도 없었다. 노박의 성격상 특수한 인증이 필요한 보관함이나 금고에 넣어뒀을 확률이 높았다.

찌익!

콘크리트 벽 속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아련하게 전달되는 공구 소리도 전부 무시하던 앨런이 고개를 홱 돌렸다.

철사를 대충 구부려 만든 네모난 덫 안에 쥐가 갇혀있었다. 녀석은 주먹밥 부스러기에 잡혔다는 사실이 분한지 앞니로 철사를 마구 긁어댔다.

호시탐탐 식사를 노리며 신경을 긁던 범인의 처우를 고민하던 앨런이 눈동자만 데구르르 움직였다

그곳에 환풍구가 있었다.

“좋아. 넌 살려줄게.”

계획의 윤곽이 잡힌 앨런은 쥐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창고 문을 잡아당기자 쇠사슬이 절그럭거렸다. 사람은 어림없지만 쥐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찌이익!

덫을 상하좌우로 마구 흔드니 쥐가 비명을 지르다가, 앨런이 속박에서 풀어주니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자유를 찾아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짐작되는 찰진 욕설이 들려왔다.

“아! 시발! 쥐새끼!”

비토는 자신의 추태를 눈치챘는지 헛기침으로 무마하며 창고 문틈으로 눈을 쏙 내밀었다. 시체는 무덤덤하게 넘기면서 쥐에게 성질을 부리는 모습은 아이러니했다.

“설마 보고 있었냐? 흠! 저녁은 내가 가져왔어. 네 밑에 있는 애들이 생각보다 걱정 많이 하더라. 네가 항상 존댓말만 써서 우습게 볼 줄 알았는데 말이지.”

“처음 조수가 됐을 때는 그런 기미가 있긴 했습니다.”

“어떻게 해결했는데? 네 성격상 주먹질하진 않았을 테고.”

“작업에서 배제하고 단순 노동만 시켰습니다.”

“오···.”

일꾼들은 모두 조수가 되길 원했다. 미약하긴 해도 신분 상승이고 모든 사람에게는 상승 욕구가 존재하니까. 그건 매우 당연한 이치였다.

또 남들에게 뒤처진다는 느낌은 누구도 참기 힘들었다. 특히 그게 동기 일꾼처럼 비슷한 처지였다면.

앨런의 방식에 감탄하던 비토가 문틈으로 주먹밥을 건넸다.

“아, 몸은 괜찮아? 그렇게 내가 그냥 놔두라고 했잖아. 그래도 사장님이 많이 화난 것 같진 않더라. 만약 나였으면 이 안에 몇 달은 가뒀을걸. 강등시켰을 수도 있고.”

“전 멀쩡합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됐어. 그 사람은 사장님이 직접 손댔으니 잊고 밥이나 먹어. 여기 물도 마시고. 혹시 요강도 필요하냐?”

“결국 그렇게 됐군요···. 신진대사 정도는 조절할 수 있으니 호의만 받겠습니다.”

마력수련법을 배우면 음식 흡수율이 상승해서 노폐물이 줄어든다. 게다가 작은 주먹밥만 먹으니 쌓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턱을 몇 번 오물거리자 밥알이 몽땅 사라졌다. 물로 입까지 헹군 앨런은 통을 밖으로 내밀었다.

“휴식시간일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뭘···. 아, 내 정신 좀 봐. 오늘 외부에 수거 업무 나갔던 애들이 습격받았어. 3팀 중에서 1팀만 돌아왔더라.”

노박 클리닉의 주 거래처인 카르텔이 항구도시 아로마아의 가장 큰 폭력조직이지만 어디에나 왕관을 노리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이 바닥에서 먹고살고 있으니 예견된 일 아닙니까?”

“맞지 그런데 사고 발생 지역이 우리 구역이야. 그래서 카르텔 간부가 직접 찾아와서 사장님과 의견을 나누더라.”

“흥미롭네요.”

“반응이 심심하다. 이러다가 조직간 전쟁이 날 수도 있다니까.”

“설령 패배해도 우리는 기술자이자 의사니 웬만하면 놔두겠죠. 사장님은 머리니 잘리겠고요.”

“사장, 아니, 주인만 바뀐다는 소리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클리닉과 손잡은 친구의 덩치가 워낙 커야죠. 안 그래요? 어설픈 자들이었다면 뒷골목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겠죠.”

“반박할 수가 없네. 난 간다.”

“네. 좋은 밤 되세요.”

앨런은 몸을 돌렸다. 이제 집중을 깨트릴 사람도 없으니 추상적인 계획을 밖으로 끄집어낼 차례였다.

이 창고가 휴지통이라고 불릴지라도 랑카의 쓰레기장과 비교하면 보물의 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맹금류 모양의 골렘드론, 쥐를 닮은 고양이용 장난감, 텅 비어버린 기억수정, 녹슨 도구 등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앨런은 먼저 엄지손톱 크기의 기억수정을 집어 들었다. 수정이라고 진짜 육각형 모양은 아니고 얇고 작은 투명 플라스틱 같은 형태였다.

부디 멀쩡하길 바라며 다음 물건에 손을 뻗었다. 손목을 비트니 매를 닮은 정찰용 드론의 껍데기가 순식간에 분해되었다.

그중에서 회로판을 챙긴 후 복도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에 이리저리 돌려봤다.

‘회로판의 부품이 전부 불타서 수리는 어렵겠는데. 이참에 룬문자를 새겨볼까?’

룬문자.

마법공학자의 존재 이유였다. 마법사들만이 사용했던 신비의 언어는 마법공학자의 손을 빌려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량 생산되는 부품으로 조립하는 양산형 마도구와 달리 마법공학자가 회로판에 직접 새긴 룬문자는 훨씬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다.

마도구에 새겨진 룬문자가 많아질수록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대신, 하나하나가 늘어날수록 작업의 어려움은 제곱으로 상승했다.

지금 앨런의 한계는.

‘아마도 하나···.’

하나라도 꽤 훌륭했다. 몇 년을 조수로 보낸 이들조차 룬문자 하나 그리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지금 갇힌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실패하더라도 남의 눈치 볼 것 없고, 일주일이라는 여유시간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앨런은 코드가 잘린 마법공학용 인두를 집어 들었다. 억지로 마력을 불어넣으니 금속 부분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집중하자. 실패해도 기회는 많아. 지금 필요한 룬문자는 [기록]이다.’

룬문자를 새기는데 필요한 능력은 손재주와 실시간으로 변하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이었다.

손재주는 이미 타고났고, 감지능력은 클리닉에서 배운 마나수련법 덕분에 획득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시계방향으로 힘을 주고···. 실수···. 침착하게.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앨런의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거의 멈추기도,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이기도 했다. 약한 빛 아래에서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앨런이 드디어 허리를 쭉 폈다.

다음 차례는 고양이용 쥐 장난감이었다. 벽에 부딪히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능이 있어서 드론의 회로와 조합하면 꽤 쓸만하게 변할 것이다.

쥐, 회로판, 기억수정의 조립을 마친 앨런은 마력을 불어넣었다.

끼익.

이것저것 짜깁기하느라 엉망으로 생긴 쥐는 다행히도 반응을 보였다. 바닥에 내려놓으니 살금살금 움직였다.

앨런은 환풍구 속으로 쥐를 집어넣었다.

‘제발 룬문자가 제대로 작동되기를.’

환풍구는 보이지 않는 장소에도 연결되어 있기에 정보를 분석하면 노박의 비밀 연구실이나 정보 보관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안다고 지금 당장 들어갈 수는 없지만, 뭐라도 알아야 대비책을 세우지 않겠는가.

앨런은 넘어진 냉장고에 기대앉았다. 정찰이 금방 끝나진 않을 테니 이대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해방의 날.

앨런은 환풍구에서 꺼낸 쥐의 몸에서 기억수정을 빼냈다. 나머지 부품은 따로 흩어놔서 흔적을 지우기도 했다.

뇌 확장 시술을 받은 사람이라면 귀 뒤나 목 근처에 소켓이 있어서 수정을 꽂으면 되겠지만 앨런은 순수 육체라 다른 장비의 도움이 필요했다.

‘감시의 위험이 있으니 다른 단말기를 구하면 확인해보자.’

생각을 정리한 앨런은 비토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복도로 나갔다.

“반갑지?”

“저랑 친하게 지내면 사장님의 눈 밖에 나는 거 아닐까요?”

“괜찮지···않을까? 그때 사장님은 그렇게 화난 기색이 아니었으니···.”

비토는 확신을 못 하는지 말을 얼버무렸다. 대신 복도를 걷는 동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습격자들은 전부 정리했대. 다른 조직의 공격이 아니라 외부에서 멋도 모르고 들어온 강도인 모양이야. 수레에 매직웨어가 실려있었으니 탐났겠지.”

“그럼 다시 수거하러 다니겠네요.”

“너도 포함이야. 오늘부터.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다시 내근으로 돌려주겠지.”

“차라리 외근이 나을 수도 있죠.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참 알뜰한 사장이었다. 앨런은 괜히 목걸이를 매만졌다. 목걸이의 기능을 믿기에 일주일 동안 가둬놨던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내보내는 것이리라.

앨런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클리닉 내부에서는 감시카메라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지만, 밖에서는 일꾼 3명만 조심하면 됐다.

앨런은 방에 들러서 장비를 챙긴 후 밖으로 나갔다. 비토의 말대로 앨런의 일꾼들은 클리닉의 공터에서 수레를 챙긴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앨런은 일꾼들의 인사를 받아줬다. 그들은 진심으로 앨런을 반겼다. 통상적으로 일꾼은 어깨너머로 눈치껏 배우지만, 앨런은 질문에 성심껏 대답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럼 출발합시다.”

일꾼들이 먼저 움직이고, 앨런은 천천히 뒤를 따랐다. 엉망인 머리를 최대한 깔끔해 보이게 정돈하며 시선을 내렸다. 항구도시는 속이 어떻든 여전히 활기차고 아름다웠다.

목록에 적힌 장소를 순서대로 방문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떴다. 마침 앨런과 일꾼들이 도달한 장소는 부촌 중간에 있는 공원.

일꾼 하나가 앨런에게 물었다.

“앨런 님. 12시 30분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잠시 쉬죠.”

“어디 가십니까?”

“화장실에요.”

앨런은 공원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다가 일꾼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방향을 틀었다. 굳이 점심시간에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부유한 이들이 버리는 마도구를 챙기기 위함이었다.

커다란 쓰레기통 내부를 빠르게 훑으며 원하는 물건이 있나 찾던 앨런이 네 번째 통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영상 재생용 단말기를 찾은 앨런은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았다. 뜯어보니 큰 고장은 아니고 배터리와 연결된 선의 피복이 벗겨져 회로에 닿아있었다.

‘이건 고장도 아니지. 선만 옆으로 살짝 치우면. ···됐다.’

다시 뚜껑을 덮고 챙겨온 기억수정을 단말기에 꽂았다. 그러자 픽셀아트로 만든 듯한 흑백 영상이 화면에 흘러나왔다.

영상을 빠르게 넘기던 앨런의 손가락이 멈췄다. 지하 4층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층 하나가 연구실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 누가 봐도 귀중하게 생긴 원통 수조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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