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1화 (11/193)

교환(2)

오른팔이 의수임을 숨기지 않은 포니테일의 여성이 노박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다녀오세요.”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선임이니 애들을 잘 다독여라. 뭐, 며칠 출장 가는 것도 아니고 새벽이나 아침에는 돌아올 테니 문제는 없겠지.”

“아무 문제 없게 잘 단속하겠습니다.”

“그래. 너도 조금만 노력하면 졸업 기준이 되니 더 정진하고.”

여성은 사장의 칭찬에 어찌할 줄 몰라했다. 미소가 어찌나 환한지 노박을 배웅하기 위해 1층으로 올라온 조수들에게도 모두 보였다.

노박은 선상 파티를 향해 출발하고, 조수들은 당직만 남기고 지하로 내려갔다.

앨런과 비토는 으슥한 통로에 모여서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봤냐? 그 가증스러운 새끼.”

비토는 모든 사실을 안 후, 노박에게 사장님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그동안의 분노를 표출하려는 듯 항상 비속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처음의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비토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아니면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방법일 수도 있고.

“나도 몰랐으면 그 눈깔의 먹이가 됐겠지. 아까 걔는 우리한테 절해야 해. 딱 보니까 다음 표적인데 우리 덕분에 살 테니. 작전은?”

“좀 기다리죠. 노박이 유람선에 합류하기 전, 보트를 타고 이동할 때쯤이 적당합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 발생해도 혼자 올 확률이 높으니까요.”

“어차피 협력자들도 죄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승냥이라 웬만하면 스스로 해결하려 할걸. 게다가 그 새끼도 꼴에 연구자라 평생 가꾼 열매를 남에게 보여주긴 싫겠지.”

“그럴 수도 있죠.”

“내 손 봐.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넌 어때? 내가 보기엔 평소랑 똑같은데.”

비토의 물음에 앨런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하얀 피부와 기다란 손가락에서는 어디에서도 떨림을 찾을 수 없었다.

“너도 독하다. 이럴 때도 차분함을 유지하네. 혹시 골렘이 인간 척하는 거 아냐?”

“글쎄요.”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 차분함은 마법공학자의 미덕이지만, 부모의 죽음으로 얻었으니 앨런에게는 오히려 상처였다.

평소보다 빨라진 심장의 맥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우선은 이것을 가라앉혀야 했다. 뜨거운 머리는 싸움이라면 모를까 신속한 문제해결에는 별 도움이 안 되니까.

속으로 시간을 재며 차분함을 유지하려던 앨런은 가라앉은 흥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제 시작하죠.”

“후우. 떨린다.”

지금쯤이면 노박은 보트에 막 탑승했거나 이동 중일 테고, 소란이 발생하면 신호를 받고 돌아올 것이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마쳐야 했다.

앨런은 뛰지 않고 큰 걸음으로 동력실을 향해 움직였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나도 알아.”

앨런은 [화염]이 새겨진 철판에 마력을 담아 동력실 문 앞에 뿌리고, 비토는 근처에 있는 화재경보기를 울렸다.

왜애앵!

사이렌이 지하를 가득 채우고, 어디를 가든지 붉은 불빛이 번쩍거렸다. 평화롭던 지하 1층은 금방 소란스럽게 변했다.

“어디야? 어디에 불이 붙었어? 빨리 찾아!”

조수와 일꾼들은 평소에 훈련받은 대로 움직였다. 소화기를 들고 각자의 담당구역을 향해 뛰어갔다.

동력실로 오는 복도 저편에서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나 우르르 달려온 조수와 일꾼들이 불을 보고 급히 멈췄다.

평소라면 당연히 불을 끈다고 몰려들겠지만, 하필 장소가 동력실 앞이었다. 앨런이 던져놓은 [화염] 철판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가장 먼저 달려온 조수는 그 속도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화염이 문밖까지 넘실거린다는 뜻은.

“동력실에 불붙었다! 전부 튀어!”

“소화기 가져왔는데 안 뿌립니까?”

“그냥 버려! 저기 폭발하면 클리닉은 통째로 날아가!”

동력실에는 마력발전기, 마나배터리, 마석 등 폭발하기 좋은 물질과 시설이 가득 쌓여있었다. 화약고와 비슷한 장소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비밀 연구실인 지하 4층이라면 몰라도, 그 윗부분은 폭발이 일어나면 그 파괴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목청 큰 조수 덕분에 그 소식은 혼란한 도중에도 제대로 전달되었다. 당연히 모두의 마음이 철렁 가라앉았다.

“뭐 동력실?”

“비켜 빨리 올라가라고! 문도 못 열어? 저리 꺼져!”

그야말로 혼비백산, 아비규환이었다. 혼란은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던 사람들까지 잡아먹었다. 공포는 쉽게 덩치를 키우고, 쉽게 냉철함을 잡아먹었다.

“달려온 놈이 겁쟁이여서 다행이야. 제대로 확인하려고 했으면 기절시켜야 했을 텐데.”

“노박이 클리닉을 쉽게 통제하려고 경험 쌓인 조수들을 죽인 일이 우리에게 도움이 됐습니다.”

처음 보러 온 조수가 세심하거나 침착한 성격이 아니어서 앨런이나 비토가 직접 나설 수고를 덜었다.

둘은 슬슬 사그라드는 불을 넘어 동력실로 뛰어들었다. 경비시스템은 출입허가가 떨어진 앨런과 비토를 막지 않았다.

모든 스위치를 끄고, 미리 마석과 마나배터리를 쌓아놓은 수레를 챙겼다.

다음 행선지는 노박의 전용 엘리베이터. 앨런은 수레를 앞에 멈춰두고 챙겨뒀던 빠루를 꺼내 들었다.

“가죠.”

“잘되겠지?”

“실패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조금만 삐끗해서 붙잡히면 편히 죽진 못할 테니까요. 아시다시피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면서도 살려놓는 방법은 정말 많습니다.”

“그래. 저어어엉말 위로가 된다.”

“그럼 열겠습니다.”

앨런은 빠루를 문 사이에 꽂고 마구 휘저었다. 딱히 큰 힘을 쓰는 것도 아닌데 문이 빠드득 소리를 내며 뒤틀렸고, 마침내 어두운 내부를 드러냈다.

“힘도 약한 게 참 요령도 좋다.”

“어서 설치하세요. 동력실이 재가동되기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하고 있잖아.”

비토는 도르래를 벽에 박아놓고 밧줄을 밑으로 던졌다. 둘은 마치 완강기를 사용하듯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엘리베이터 위에 올라탄 앨런은 아까처럼 천장의 문을 개방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뒤따라온 비토는 앨런을 위해 인공안구에서 빛을 내뿜어 엘리베이터를 환하게 했다.

“넌 뭘 부수거나 고칠 때는 진짜 빠르더라. 역시 손재주가 좋아야 룬문자도 다루는 건가.”

“집중하세요. 엽니다.”

빠루가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 문에 틀어박혔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틈 너머에서 반짝임을 포착한 앨런은 비토를 발로 밀어냈다.

“피하세요!”

드르르륵!

앨런의 목소리는 총성에 묻혀버렸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아차 하는 순간, 찢어진 휴지처럼 변해버렸다.

원인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감시 포탑이었다. 포탑은 뜨거워진 총구를 식히고 있었다.

벽에 매미처럼 딱 붙어서 숨을 고르던 비토가 곁눈질로 복도를 바라봤다.

“외부동력이 따로 있나 본데. 저건 내가 처리할게.”

비토는 바로 헤드기어형 에비에 두 손을 올렸다. 마나가 회로를 따라 흐르자 헤드기어 내부에서 약한 빛이 번쩍거렸다.

끼이익!

뒤이어 금속 비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천장에서 들려왔다. 엘리베이터를 겨누던 포탑의 총구는 천장을 향하도록 구부러져 있었다.

“단단하네. 저렇게만 해놓으면 총질은 못 하겠지. 포탑이 하나 더 있는데 저건 어떻게 해? 염동력을 재사용하려면 좀 기다려야 해.”

“저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앨런은 바로 콘택트렌즈를 착용했다. 눈을 감자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여태까지 고생해준 쥐 형태의 정찰 골렘은 환풍구에서 앨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렘은 환풍구를 빠져나와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렇게 총구를 피해서 포탑에 달라붙었다.

펑!

확인할 것도 없었다. 앨런은 케이블이 끊어져서 무력화된 포탑을 무시하며 비밀 연구실 내부를 내달렸다.

“추가 보안은 이게 끝이야? 생각보다 쉽네.”

“나머지는 제가 골렘으로 정리했습니다. 미리 준비해둬서 도화선에 불붙이듯 마력만 불어넣으면 끝나는 일이었죠.”

중앙에 도착한 앨런은 수조에 달라붙은 마나케이블을 뭉텅이로 제거했다.

“야, 그거 엄청 무거워 보이는···. 아니네.”

얼른 달라붙어서 수조 밑을 두 손으로 받치던 비토가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물이 아니라 액화마력이구나. 어쩐지 물 치고는 조금씩 반짝거리더니.”

액화마력은 공중의 것보다 고밀도였다. 고출력이 필요하거나, 지금처럼 귀중한 물건이나 재료를 보관할 때 사용하곤 했다.

당연히 가격은 어마어마했다.

“진짜 애지중지하는 물건이구나. 이 정도면 네 말대로 거래할 수 있겠어.”

“잘 되길 바랄 뿐입니다. 일단 수조를 보여주면 대화는 할 수 있겠죠.”

앨런은 수조를 밧줄에 묶고 도르래를 이용해서 위로 올렸다. 다시 수레가 있는 층까지 도달한 둘은 수조를 클리닉 옥상까지 운반했다.

클리닉을 둘러싼 공터에서는 조수들의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사실은 한 사람의 윽박지르기에 가까웠다. 포니테일 여성이 가장 먼저 소리를 질렀던 조수에게 으르렁거렸다.

“동력실에 불이 붙었다며? 왜 아직도 멀쩡한데?”

“그럼 네가 들어가 보던가. 난 절대 못 해!”

옆에 있던 조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노박의 말도 있으니 선임 여성의 말을 들었을 테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라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겁쟁이 새끼들. 사장님이 오시면 전부···.”

“저기 봐! 앨런하고 비토잖아!”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이상한 수조에 이것저것 둘둘 묶는 행태는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쟤네 뭐 하는 거야? 저 원통은 뭐냐?”

“2층 실험실에도 저런 통은 없어. 저런 게 있을 만한 장소는 사장님의 비밀 연구실 정도?”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웅성거림은 호통 한 번에 제압되었다. 클리닉의 주인이 등장하자 모여있던 조수와 일꾼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추가적인 작업을 마친 앨런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예상대로 노박은 혼자였다.

‘지역유지나 카르텔 인간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겠지.’

지금은 웃는 낯으로 서로를 신경 써주는 척하지만, 약점을 노출하면 누가 물어뜯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모인 연회의 장소였다. 괜히 떠벌려서 웃음거리가 되긴 싫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한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누구나 궁금해하는 법, 노박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향했다.

“앨런, 비토? 잠깐···.”

둘의 가운데에 있는 수조. 갑자기 울린 경보 신호.

노박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심사가 뒤틀린 얼굴 곳곳에서 핏줄이 흉악하게 튀어나왔다.

그 살벌함에 비토는 시선을 피했지만, 앨런은 평소대로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당당히 두 눈을 직시했다.

“전부 공터 밖으로 물러나라.”

노박은 부하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수조는 비밀 중의 비밀. 장기 말에 불과한 것들 따위에게 보일 물건이 아니었다.

그들이 멀찍이 물러나자 노박이 이를 갈았다.

“목걸이가 불만이었나? 내 때가 되면 어련히 풀어주려 했건만 이렇게 배신을 해?”

“···.”

앨런은 말없이 수조를 두드렸다. 그 모습에 노박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뭘 원하지?”

“자유.”

“말이 짧아졌구나. 음흉한 놈!”

“사람에 따라 다르지.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용서를 빌···.”

“뻔한 대사는 하지 말고. 여기에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있나? 너조차도 그냥 내뱉는 말이잖아.”

노박은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허리춤의 공간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앨런은 그가 무엇을 하기 전에 수조를 가리켰다.

“그만. 이걸 자세히 봐라. 뭐가 보이지?”

앨런의 말에 노박의 인공안구가 고배율로 바뀌며 수조 표면을 자세히 훑었다.

[화염]이 적힌 철판, 거기에 화력을 더해줄 마석이나 마나배터리가 줄줄 감아져 있었다.

“내가 그 용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나? 네놈 머리통을 날릴 화력으론 흠집도 안나!”

“그럼 해보든가.”

앨런은 아예 보란 듯이 머리를 수조 옆에 붙였다. 평소의 무표정이 이번 경우에는 상당한 이점이었다.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도 없어서 단순한 허세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빌어먹을.”

노박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다. 장난감에게 당했다는 굴욕에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그렇다고 수십 년을 갈아 넣은 연구성과를 날릴 수는 없었다.

결국, 노박은 열쇠를 땅에 던졌다. 앨런에게 자신의 목숨은 가장 큰 가치지만, 노박에게는 수조 안에 들어있는 결과물이야말로 인생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원래 이런 싸움은 가진 게 많은 쪽이 지고 들어가는 법이었다.

노박의 마력이 요동치자 인공안구에서 사나운 광망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헛짓거리하면 둘 다 찢어 죽일 거다. 아니, 머리통만 남겨서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주겠다.”

앨런은 비토의 염동력으로 가져온 열쇠를 바로 목걸이에 꽂았다. 여태 목을 가리던 족쇄가 사라지자 차갑고 상쾌한 바람이 피부를 어루만졌다.

“드디어···. 받으세요. 그리고 시동 거시고요.”

비토는 자신의 목걸이를 해제하고 클리닉 뒤편으로 뛰어 내려갔다. 노박은 참을성 없이 소리를 질렀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조금만 기다려.”

곧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앨런은 프로젝터의 전원을 발끝으로 눌렀다.

동시에 비밀 연구실에서 노박이 어떤 실험을 자행했는지, 그 재료가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찍힌 영상이 허공에 떠올랐다.

앨런이 준비한 또 다른 폭탄이었다. 공터 밖으로 물러났던 조수와 일꾼들이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노박의 다그침도 소용없었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자 이번에는 그들이 모여있는 곳에 열쇠를 던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서로 먼저 구속을 떨쳐내고자 달려들었다.

노박은 혈압이 걱정될 정도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앨런은 재빨리 옥상 뒤편으로 내달리다가, 마침 밑을 지나가던 픽업트럭의 적재함 위로 뛰어내렸다.

쿠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나엔진은 원래 조용하지만, 운전자나 보행자를 위해 가상의 엔진음을 입힌 것이다.

앨런은 낙하의 충격을 참으며 적재함과 좌석을 연결하는 작은 문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달리세요! 지금 거리를 벌려야 합니다!”

“노력 중이야!”

앨런이 사라지자 노박은 다리를 살짝 굽혔다. 그의 허벅다리와 종아리가 부풀어 오르며 멋들어지게 빼입은 양복바지의 실밥이 터졌다.

대번에 클리닉 옥상으로 발돋움한 노박은 자신의 인생을 담은 수조를 살폈다.

띠띠띠.

60, 59, 58···.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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