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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8화 (18/193)

미궁(3)

눈을 뜬 앨런은 짙은 회색 돌로 만들어진 미로 천장을 바라봤다. 흔히 볼 수 있는 벌레조차 없는 대신,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벽 너머에서 유체가 꿀렁이는 듯, 무언가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돌 내부에 파묻혀있으리라 짐작하는 파이프에서 종종 들려오기에 위험의 전조는 아니었다.

침낭에 파묻혀있던 앨런은 누운 자세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영혼석을 꺼내 들었다.

납작하고 투명한 기억수정과 비슷한 형태이나 차이점이 있다면 내부에 불투명한 기류 같은 것이 떠다녔다.

‘영혼석 언어 혹은 별문자.’

루나에서 유래한 룬문자에 대응해서 별문자라 부르지만, 사실 둘 사이에 상관관계는 없다.

대신, 별문자는 룬문자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고급 지식이기에 삼라만상을 뒤져봐도 유료 서비스밖에 없었다.

상체만 일으킨 앨런은 영혼석을 침낭 밖으로 꺼내서 두드렸다.

영혼석 언어에 대해 짤막하게 풀린 지식이 있긴 하지만 시험 삼아 건드려보니 전부 거짓이거나 겉핥기식 공개라 앨런의 지식욕을 만족시킬 순 없었다.

그래도 알려준 패턴대로 영혼석에 마력을 집어넣으니 언어 입력창이 열리긴 했다. 평면이 아니라 3차원인 입력창이.

희뿌연 안개가 튀어나오더니 앨런의 정면을 동그랗게 감쌌다. 그 모습이 마치 하얀 보자기를 뒤집어쓴 유령 같기도 했다.

별문자는 안개 안에 점자처럼 박혀있었는데, 마치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를 연상케 했다.

“일어나자마자 공부야? 너도 참 대단하다.”

원통 형태의 난로 마도구 근처에 삼각형으로 놓인 침낭, 그중에 완전히 빠져나와서 앉아있던 칼슨이 입력창을 손으로 가리켰다.

“벌써 다룰 줄 알아? 우리가 벌써 책을 살 정도나 벌었나?”

“아뇨. 삼라만상에서 찾을 수 없어서 책을 사려고 하는데 기초입문서 가격만 50만 코인이 넘더군요.”

“지식은 귀하지. 대학원 교재도 엄청 비싸서 몇 권 사면 일반 직장인 월급이 그냥 사라지더라.”

“맞습니다. 미궁탐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쌓아 올린 금자탑을 보려면 그만한 이용료를 지급해야겠죠.”

“불법 복사본도 있긴 할 테지만, 사실 여부를 가리기 힘드니 기왕 지출한다면 정품을 사야 해. 잘 생각했어.”

“안 그래도 이번 수입 정산을 마치면 바로 서점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앨런은 계속 별문자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콕콕 찌르면 별이 사라질 때도, 나타날 때도 있었다.

“별문자는 모른다며?”

“그냥 이것저것 실험해보는 중입니다. 이쪽 줄을 지우면 지네가 발을 못 움직이고, 이곳을 지우면 공격성이 사라집니다.”

별문자의 쓰임을 처음부터 알았겠는가. 전부 앨런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은 것이다.

그때, 침낭에서 잠을 자던 아웅이 상체를 일으켰다. 덩치는 큰데 어미 품을 찾는 강아지처럼 손과 얼굴이 저절로 난로로 향했다.

그러다가 눈꺼풀을 힘겹게 뜨며 충혈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불침번 칼슨 차례. 앨런. 밤 깼다?”

“깼다가 아니라 ‘밤을 새웠나?’가 맞는 표현입니다. 그냥 일찍 일어난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 푹 자야 좋다.”

둘과 함께 한지 십일. 이제는 야영도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낯설게만 느껴졌던 미로의 어둠도 친숙해졌으나, 그렇다고 긴장을 풀진 않았다.

4층부터는 오토마톤이 튀어나오는 맨홀이 계속 위치를 옮기기 때문에 아차 하는 순간 기습 혹은 포위에 당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전투 합이 잘 맞고, 제 역할에 익숙해졌기에 첫날보다는 답답함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앨런은 언젠가 이들과 헤어져야 했다. 칼슨은 가을학기를 맞아 대학으로 복귀하고, 아웅은 마나하트를 만들 때까지 1~3층에서 안전한 탐험만 한다고 했다.

에비로 마법을 사용하려면 그리고 더 깊이 내려가고자 한다면 마나하트가 있어야 했다. 마나하트의 유무에 따라서 마법 횟수와 재사용 대기시간이 개선되니까.

앨런은 입력창에 둥둥 떠 있는 별들을 만지다가 원래대로 되돌리고, 영혼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앨런이 야영한 장소는 5층과 6층의 경계 근처. 내리막길 부근은 숙영지의 역할도 했기에 어두운 미로 어딘가에서 다른 탐험가의 기척이 들리기도 했다.

이곳에서 묵은 흔적을 정리하고 있으니 칼슨이 슬쩍 말을 꺼냈다.

“6층에 내려가 볼까?”

“용기. 죽음이다.”

“용기가 아니라 만용. 내가 근거 없이 지껄이는 게 아니라 앨런의 실력을 믿어서 그래. 저기 봐봐.”

수레를 가리키는 칼슨의 손가락을 따라 아웅의 시선이 옮겨졌다. 수레에는 금방 움직일 듯한 모습의 지네가 롤케이크처럼 돌돌 말려있었다.

“감이 좋은 건지 투시 능력이 있는지 동력원 근처의 회로만 딱딱 쏴서 맞추잖아.”

“동의. 음···. 좋다.”

다수결이라면 꼼짝없이 내려가야 할 차례지만, 둘은 앨런을 보며 의견을 구했다.

앨런은 잠시 그들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만난 솔도스의 사람들은 대체로 선량했다. 성정이 거친 랑카 사람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

다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본성? 부? 교육? 환경?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앨런은 만나본 사람도 별로 없고, 그냥 지금까지 운이 좋았겠거니 하고 넘기며, 동료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미로의 생김새는 큰 변화가 없지만, 6층부터는 오토마톤의 종류가 달라진다고 하니 한번 가봅시다. 대신에 계단 근처에서만 탐험하는 거로. 이의 있으십니까?”

“나야 좋지. 사실 깊이 가긴 걱정되고, 슬슬 올라가서 데이터도 정리해야 하고.”

의견이 모이니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아웅이 수레를 끌고, 칼슨이 보조하고, 앨런은 주변을 경계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삐~.

층을 넘을 때의 기묘한 감각이 앨런을 덮쳤다. 아깝게 놓친 모기가 마치 책상 밑에 숨어있는 듯한 찝찝함이 느껴졌으나 지금까지 딱히 문제는 없으니 넘겼다.

‘미궁 이명증’이라고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주로 발생하는 증상은 내리막길을 벗어나면 완전히 사라졌다.

6층은 5층과는 확연히 달랐다. 고작 한층 내려왔을 뿐인데도 다른 탐험가의 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위층에서는 탐험가의 수적 우위로 오토마톤은 샌드백 신세였지만, 이제부터는 처지의 역전이 기정사실이었다.

계속 입을 열어서 심심함을 달래주던 칼슨조차 침묵을 유지하던 도중, 저 앞에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가장 먼저 발견한 칼슨이 팔을 들어 올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적 발견. 기병 형태. 하나.”

오토마톤과 일행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적의 형상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침입자를 발견한 오토마톤이 몸을 일으켰다. 탑승물은 늑대를 닮았고, 탑승자는 마네킹이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밋밋한 마네킹의 얼굴, 특히 하얀 빛을 발산하던 눈 부위가 시뻘겋게 물들더니.

철컥철컥!

바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늑대의 금속 발이 미로의 바닥과 마찰하며 거친 쇳소리와 불티를 사방으로 흘렸다.

미로는 장정 둘이 양팔을 한껏 벌리고 서도 될 만큼 넓었기에 기병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칼슨이 방패의 역장을 펼치며 땅에 박아넣었지만, 앨런이 보기에는 돌진력을 충분히 막기 부족해 보였다.

“아웅! 수레를 앞으로!”

“흡!”

열흘 동안 함께 다녔기에 추가적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아웅은 수레를 옆으로 돌려서 칼슨의 앞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기병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늑대가 수레를 뛰어넘으려는 것처럼 몸을 위로 날리더니, 벽면을 박차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칼슨이 샷건으로 놈을 저지하려 했으나, 철판에 작은 구멍이나 파인 자국만 생길 뿐,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몸을 살짝 낮췄던 기병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아웅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텅!

다행히 ‘바람의 벽’이 시기적절하게 공격을 막아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반발력에 창을 놓치거나 낙마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오토마톤은 모든 충격을 버티며 아웅에게 몸을 날렸다.

정확히는 역할을 나눴다. 기병은 아웅을 덮치듯 점프했고, 늑대는 뒤에 있는 앨런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앨런의 눈은 전장을 넓게 포착했다. 칼슨이 방패를 앞세워 기병에게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늑대만 해결하면 됐다. 앨런은 지팡이를 그대로 휘둘렀다. 사실은 번트하는 것처럼 가만히 내민 동작과 비슷했다.

깡!

지팡이의 끝과 늑대의 콧잔등이 격돌했다.

평소 앨런의 몸이라면 이대로 무기를 놓치고, 저릿한 감각에 괴로워하며 바닥을 구르겠지만.

쿵!

정작 소리는 엉뚱한 천장에서 났다. 지팡이 끝에 새긴 [비행]이 늑대의 몸을 위로 날린 것이다.

마무리하려고 눈에 마력을 불어넣은 앨런은 동력원의 위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저항력이 미약하지만 있다.’

그래도 처리하긴 쉬웠다. 늑대는 아직 천장에 붙어있고, 앨런은 방아쇠만 당기면 됐으니까.

전투가 끝나고 칼슨이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흘러내리는 양을 보니, 교전 시간은 짧았지만,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려주는 지표였다.

“와, 고작 한층 내려왔는데 차이가 이렇게 심해? 약속했던 대로 바로 돌아가자.”

“맞다. 우리. 무리.”

“무리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은 거지?”

“내 말···.”

“내 말이 그 말이라고? 이제 정리하자.”

아웅은 수레를 다시 옮겼고, 칼슨은 분해된 오토마톤을 수레의 빈 곳에 차곡차곡 채웠다.

“이제 더 실을 공간도 없어. 위로 올라가다가 오토마톤을 만나면 마석이나 영혼석만 챙겨야지.”

앨런과 일행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겨우 하나로도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겪었으니, 그 수가 둘이 되고 셋이 되면 결과가 썩 좋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왜 6층부터는 사람의 수가 확 줄어드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5층으로 향하는 길이 점점 가까워지는 만큼 위기감도 서서히 옅어질 무렵,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철컥철컥.

삼거리에 멈춰선 앨런은 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저렇게 금속이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건 오토마톤밖에 없었다.

그 예상대로 어둠 너머에서 붉은빛 세 개가 번뜩였다. 처음에는 빛만 보이더니 곧 윤곽이 뚜렷해졌다.

아까 만났던 늑대 기병, 그것도 셋이 이쪽을 향해 무기를 치켜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나?”

“이동속도에서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포착당한 순간, 남은 선택지는 전투밖에 없습니다.”

“하나도 힘겹게 잡았잖아. 아니면 묘수라도 있어?”

“···.”

앨런이 침묵하니 덩달아 칼슨과 아웅의 얼굴에도 근심이 깃들었다.

물론 앨런은 평소의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말을 꺼냈다.

“지네 좀 앞에 내려주실래요?”

“망가짐.”

“알고 있습니다.”

앨런의 침착함이 마음을 달랬는지, 아웅은 재빨리 요구를 들어주고 마법을 준비했다.

철컥철컥철컥!

곧 놈들이 돌진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앨런은 평소대로 뛰는 심장을 느끼며 영혼석을 동력원 근처에 끼워 넣고, 끊어진 회로를 룬펜으로 복원했다.

몸을 일으킨 앨런은 돌돌 말린 지네를 발바닥으로 밀었다. 발바닥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지네의 동력원을 자극하기도 했다.

기병들은 데굴데굴 굴러오는 지네를 아군으로 인식했는지 옆으로 비켜나며 돌진하려 했지만.

콰득!

그건 오산이었다. 몸을 펼친 지네가 날카로운 턱으로 기병의 목을 물어뜯었다.

그제야 놈들이 지네를 향해 창을 찔러댔으나, 그들이 주의해야 할 건 지네만이 아니었다.

칼슨의 샷건, 아웅의 마법 그리고 앨런의 마력 탄환이 뭉친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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