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1)
보통 서점을 생각하면 어떤 분위기가 떠오르는가?
앨런은 차분함과 학구열을 생각했다. 책장마다 가득 꽂힌 책들이 특유의 종이 냄새를 물씬 풍기고, 눈에서 지성이 넘치는 사람들이 관심 있는 테마에 집중하는 그런 광경 말이다.
그런데 앨런이 오늘 방문한 서점은 좀 달랐다. 책장은 쇠로 뒤덮여서 금속 냄새를 뿜어내고, 사방에 배치된 골렘이 차가운 시선으로 손님들의 동태를 살폈다.
별문자와 관련 있는 코너에 방문한 앨런 역시 따가운 시선을 뒤통수로 받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슬쩍 돌리니 벽 근처에 세워진 골렘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이곳은 평범한 서적을 파는 책방이 아니었다. 마력에 관련된 비전서와 마법공학 전문서 등 정말 귀중한 도서를 취급하는 서점이었다.
운이 좋다면 견본으로 놓인 책을 읽을 기회가 있을 줄 알았으나, 그건 턱도 없는 소리였다. 서서 읽을 수 없게 책장 자체를 튼튼하게 봉인해 놨다.
요새는 인공 안구 성능이 워낙 좋아서 책을 빠르게 넘겨도 이미지화해서 보조기억장치에 저장해버리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기도 했다.
앨런은 이런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기에 별문자 코너에 있는 직원 호출 버튼을 눌렀다.
10초 정도 지나자 회색 원반에 탑승한 직원이 나타났다. 평범한 직원이라고 하기에는 풍기는 기세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래도 응대의 기본은 갖추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카탄의 별문자 입문서를 사고 싶어서요.”
“아, 스테디셀러 말이군요. 별문자의 해독가인 위대한 카탄은 숨을 거뒀지만, 그의 책은 개정을 거듭해가며 아직도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흥미가 있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포기한 기억이 있군요.”
처음의 기세는 차가웠어도 설명을 하는 말투에는 열정이 묻어있었다.
잠금장치를 해제한 직원은 금속으로 만든 덮개를 열고 앨런이 말한 책을 꺼냈다. 바로 건네주지는 않고 말을 걸어왔다.
“또 찾는 책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결제하고 싶은데요.”
“그럼 바로 결제를···. 뇌 확장 시술을 안 받으셨군요. 카드가 있다면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앨런이 탐험가 신분증을 건네자 직원의 푸른 안광이 박혀있는 작은 수정에 집중되었다.
잠시 후, 직원은 살짝 웃으며 신분증과 책을 동시에 건네줬다.
“결제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방문도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직원이 사라지고, 앨런은 표지만 살짝 넘겨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50만 코인짜리 책을 사서 그런지, 아니면 갈증을 채울 생각에 흥분해서 그런지 손이 살짝 떨렸다.
‘잘못 만들어진 책은 구매하신 서점에서 교환해드립니다.’라는 문구까지만 확인 후, 등에 멘 가방에 책을 집어넣었다.
지금 여기에서 펼쳤다간 다음 일정에 차질이 생길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책에 집중하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안 되니 숙소에 갈 때까지만 참자. 음, 뇌 확장 수술이라···.’
앨런은 서점을 나서며 ‘뇌 확장’에 대해 생각했다. 불편한 점이 있긴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정작 받고 싶다 해도 왼쪽 눈을 차지한 녀석 때문에 시술자들이 거절할 확률이 높았다.
안 그래도 민감한 뇌를 건드는 작업인데, 뇌를 칭칭 감고 있는 시신경까지 피해야 한다면 그 어려움은 천정부지로 뛸 테니.
앨런은 빌딩 사이사이로 롤러코스터처럼 달리는 모노레일을 탔다. 의자에 앉자마자 가방에 손이 갔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며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회색의 숲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를 가나 보이는 건 빌딩, 사람, 빌딩, 사람의 연속이었다.
이곳에도 위성도시들은 있었지만, 점점 확장을 거듭하는 메이즈시티에 삼켜져서 지금은 구역으로 격하되었다.
그렇게 도시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덩치를 불려 나가는데도 어딜 가나 사람이 가득했다.
미궁이라는 끝도 없는 자원의 보고가 존재하고, 파생 산업이 우후죽순으로 몸을 일으키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회색만 가득하던 동공에 자그마한 녹색이 깃들 무렵, 앨런은 모노레일에서 내렸다.
역에서 십 분 정도 걸어가니 거대한 식물원이 앨런을 반겼다.
‘웨스턴스카이’라는 이름의 식물원은 일반 관광객을 받지 않았다. 이곳은 앨런이 오고자 했던 제약 공방 중 하나였다.
내부로 들어가자 적당히 촉촉하고 따뜻한 공기가 앨런을 맞이했다. 온갖 기화요초를 살피던 앨런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유리가 아니었네.’
햇빛을 투과하는 투명한 판은 유리가 아니라 커다란 나무에 달린 잎이었다. 껍질이나 내부 목질도 투명해서 수액이 이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나무 아래에서 자라는 접시 같은 풀잎은 물방울을 머금었는데, 마치 거울처럼 주변을 비췄다.
앨런이 물방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웬 나비 하나가 어깨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날아가지 않는 나비를 신기해하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쿡!
웬 이쑤시개 같은 물건이 뺨을 가볍게 찔렀다.
“바보. 바보.”
“누구십니까?”
“페어리, 페어리.”
앨런의 물음에 나비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손바닥보다 작은 여자아이가 작은 포크를 들고 있었다.
“여긴 일반인 금지야. 얼른 나가.”
“손님입니다. 사장님을 뵙고 싶은데요.”
“그럼 나랑 숨바꼭질해주면···.”
페어리가 말을 하는 도중, 그녀의 머리 위로 작은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머리카락이 푹 젖은 페어리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관음증! 변태! 할머니!”
그에 호응하듯이 물방울이 훨씬 많이 떨어지자, 페어리는 화들짝 놀라며 앨런의 가슴에 딱 붙었다.
“놀지 말래. 나빠. 직진!”
앨런은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쾌활하게 웃는 페어리의 말에 따랐다. 나중에는 머리 위에 앉아서 거대 골렘 조종사처럼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페어리의 조종에 따라 도달한 구역에는 작은 오두막으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굵은 나무 한 그루만 덜렁 있었다.
“이제 마녀가 나올 거야. 운 좋게 손님 없어.”
페어리는 그렇게 말하며 포르르 사라졌다.
“건방진 녀석.”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앨런이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자, 나무가 열리며 하얀 원피스를 입은 부드러운 인상의 여성이 나왔다.
옷의 재질은 직물이나 화학섬유가 아니라 백색의 꽃잎이었다.
여성이 감았던 눈을 뜨며 고개를 드니, 검고 비단 같은 머릿결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손님이 왔구나.”
“알라우네이신가요? 아니면 드라이어드?”
앨런의 질문에 여성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며 부드러웠던 인상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난 화백(花魄)이야. 네가 방금 언급한 알라우네 그리고 드라이어드의 사촌쯤 되는 종족이지. 이름은 요화. 보다시피 이곳의 주인이야.”
“미궁탐험가인 앨런입니다. 실례했습니다.”
“사과는 받아줄게. 엘프와 드루이드의 약초학으로도 범접할 수 없는 내 약이 필요해서 온 거지?”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꽃의 요정이면 식물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요화의 자신감 있는 발언은 퍽 어울렸다.
요화가 손뼉을 치니 덩굴이 나무함을 앞으로 가져왔다. 요화는 그 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복용보다 주사 약효가 빨라. 그냥 팔뚝에 꽂으면 돼. 사용법도 쉽지?”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바늘을 보니 마나배터리를 충전하느라 울긋불긋했던 팔뚝이 떠오르기도 했다.
“미궁에서 사용하려는 약이 아닙니다. 몸이 좀 약해서 그에 맞는 약을 찾으려고 왔습니다.”
“아, 보신? 탐험하는 아이들은 내 정원에서 죄다 각성제 종류만 찾길래 착각했네. 그럼 잠시 만져볼게.”
처음에는 덩굴이 앨런의 팔목을 감싸더니, 잠시 후에는 요화가 직접 다가와서 만져봤다. 뭔가 징그러운 손길이었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이끼가 피부 위에서 꿈지럭대거나, 원통형의 식물이 몸통을 덮기도 했다.
시간이 좀 흐르자, 잠시 다른 곳에 갔던 요화가 깨처럼 작은 씨앗을 가져왔다.
“놀라지 마.”
씨앗은 앨런의 피부에 닿자마자 속으로 파고들더니 순식간에 붉은 꽃을 피웠다. 그리고 앨런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바짝 마른 꽃잎은 잘게 부서지며 떨어졌다.
“음···.”
“신기하지? 몸은 어때?”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는데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이 정도면 수레를 끌고 다녀도 아무 문제 없으리라.
“마력을 먹는 대신, 영양을 주입하는 꽃이야.”
“효과는 확실하네요. 부작용 같은 건 없죠?”
“내 정원에 대해 검색도 안 해보고 왔니?”
삼라만상에서 찾은 방문자 리뷰의 별점 4.5는 장식이 아니었다. 비싼 가격 때문에 낮은 별점을 준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5점에 가까웠다.
앨런은 계좌의 잔액을 떠올리며, 각오하고 질문을 던졌다.
“가격은 얼마나 하나요?”
“한 송이에 300만 코인. 방금 건 서비스했다고 칠게.”
“···.”
저절로 말문이 막히는 금액이었다. 미궁에서 열흘 넘게 야영하며 벌어온 금액 대부분을 요구했으니까.
앨런이 말을 잃으니 요화가 삐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눈으로 보니 상처받겠어. 원래 부유한데 건강은 잃은 노인네들을 타깃으로 만든 꽃이니 그 정도의 가격 책정은 당연한 거야. 내가 없는 효과로 사기 쳐서 가격 부풀린 것도 아니잖아.”
“그건 반박할 수 없군요.”
“아까처럼 씨앗을 피부에 붙이면 돼. 사용법도 간단하지?”
“잠깐만요. 마력을 상당히 빨아들이는 꽃인데, 아픈 노인들에게 사용한다고요?”
“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마력을 충당할 수 있으니까.”
하긴, 돈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었다. 몸도 뇌만 빼고 통째로 갈아 끼울 수 있는 판국에 마력쯤이야.
“꽃 이름은 뭐죠?”
“정식이름은 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안 지었어. 출시하기 전에는 정해야 하는데 어렵네.”
그때, 앨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어서, 일부러 요화의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설마 임상시험이 완전히 안 끝났나요? 믿음으로 장사하는 제약 공방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실망입니다. 설마 별점도 조작하셨나요? 부자시니 리뷰 아르바이트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겠죠.”
“날 뭐로 보고! 임상시험은 예전에 끝났어. 그런데 마침 몸이 허한 손님이 와서 이번 기회에···.”
“그게 아니라 마력과다증이라 그랬겠죠.”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노박도 자신을 몇 번 만져보더니 마력과다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법공학자도 아는데 사람의 몸을 수십 년 넘게 치료한 요화가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증상도 물어보지 않고 딱 알맞은 약을 가져왔지 않은가.
요화는 뜨끔하며 앨런을 쳐다봤다. 자신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내던 청년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이었다.
전설에 나올법한 절맥증과 비교하면 마력과다증은 흔하다곤 해도, 그건 상대적인 비교일 뿐이었다.
600만 명 중에서 1명꼴로 마력과다증이 태어나니, 메이즈시티에는 대략 5~6명이 존재할 수 있었다.
아니면 확률의 문제라 앨런 혼자만 있을 수도 있고,
요화는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이대로 보내기에는 아까웠다.
“내 사전에 공짜는 없어. 그러니 너에게는 원가 30만 코인만 받겠어. 싫으면 다른 곳 알아봐.”
“기간은요?”
“1년.”
“3년···.”
“2년!”
요화가 말을 딱 잘랐다.
“대신에 씨앗을 사러 오는 날은 내 연구를 도와주고,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말하거나, 꽃을 양도해줘도 안 돼.”
“좋습니다.”
미궁탐험가는 한정된 자원으로 역경을 헤쳐나가는 존재. 그들의 여정에서 치료약은 굉장히 중요했다.
그러니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기보다는 요화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말 나왔으니 이쪽으로 와.”
“···.”
옛 기억에 잠깐 멈칫하니, 요화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는 노인네처럼 행동하더니 이번에는 꼭 치과 가기 싫어하는 아이 같네. 그냥 여기에 앉아만 있으면 돼.”
땅속에서 덩굴이 튀어나오더니 누워 앉는 의자로 변했다. 마침 손님들도 정원에 들어오고, 앨런과 비슷한 계약을 맺었는지 덩굴 의자에 앉은 사람도 있었다.
앨런은 마음을 편히 가지며 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폈다.
“이거 가져가.”
“···?”
“벌써 저녁이야. 문 닫을 시간이라고.”
독서를 금방 시작한 것 같았는데 요화의 말대로 하늘이 깜깜했다.
“괜히 스모그 집어먹고 몸에 탈이 나면 정보수집에 차질이 생기잖아.”
“감사합니다.”
앨런은 코와 입 주위만 가리는 방독마스크를 받아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센서처럼 붙어있던 넝쿨들은 저절로 떨어졌다.
“필터는 몸에 좋은 식물로 만들었으니까 쓰고 다녀. 그리고 좋은 약도 과용하면 독이 되는 거 알지? 씨앗은 열흘에 한 번씩 사용하고, 방문은 한 달에 한 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앨런이 식물원을 완전히 나가기 전, 유리로 만든 자동문에 얼굴이 비쳤다.
마스크를 쓰니 희미하고 약해 보이는, 학자 같은 인상이 조금은 단단하게 변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