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21화 (21/193)

정비(2)

잠에서 깬 앨런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캡슐 호텔이라 손바닥이 천장에 바로 닿았다.

‘몸이 평소보다 훨씬 가벼워.’

매번 기상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잡아당기는 기분을 느꼈는데, 오늘은 랑카를 빠져나온 후 처음으로 활력이라는 단어를 체감할 수 있었다.

꽃이 뿌리를 내렸던 팔뚝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수많은 제약 공방 중 웨스턴스카이를 선택한 건 좋은 결정이었다.

솔도스 연방 기준으로는 서쪽에 있는, 동방대륙이라 불리는 땅에서 오랜 세월 집대성한 약학의 결정체는 앨런의 몸에 잘 맞았다.

‘아니면 요화 사장님의 능력이겠지. 이제 한 계단 올라섰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고 볼 순 없지만, 제설차가 뚫어놓은 길을 따르듯이 천천히 전진하면 언젠간 목적지에도 다다르리라.

벌집 같은 객실에서 빠져나온 앨런은 캡슐 호텔을 나섰다. 아침이라 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일터로 향하는 미궁탐험가들은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앨런은 그들을 가로질러서 브레이커로 향했다.

저층에 머무르는 탐험가를 응대하는 5층 건물은 출근을 마친 직원들로 가득했다.

2층에 있는 상점에 들른 앨런은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눴던 직원을 찾았다. 하얀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은 그도 앨런을 알아봤다.

“오셨군요. 지난번에 부탁하신 오토마톤의 껍데기는 저기 구석에 있습니다.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하셨는데, 벌레보다는 포유류의 형태가 좋다고 판단해서 표범으로 준비했습니다. 혹시 제가 실수했는지요?”

“아닙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탐험가 상점에는 흥미를 끌만 한 물건이 많음에도 앨런의 눈동자와 목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오토마톤만 보였다.

앨런은 목이 깔끔하게 잘린 표범을 바라봤다. 사실 철판에는 아무 무늬도 없어서 지하인들이 어떤 고양잇과 맹수를 생각하고 만들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수레를 펼치고 그 안에 담으려 하니, 직원이 옆으로 달라붙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실례지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오히려 탐험가가 직원에게 물어보지, 직원이 탐험가에게 질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앨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직원이 오토마톤을 함께 들어주며 물었다.

“먼저 개인적인 호기심임을 알려드립니다. 오토마톤은 꽤 오래 연구해서 추가적인 연구 주제도 정하기 힘들 텐데, 굳이 찾으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아, 혹시 애완로봇으로?”

“아뇨. 미궁을 함께 내려가려고 합니다.”

“아, 전투 파트너로 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말로는 수긍했으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아직 심중에는 의혹이 가득해도 상사의 눈초리로 인해 밖으로 나가는 앨런을 붙잡지 못했다.

직원이 미심쩍어하는 이유는 타당했다.

오토마톤은 기계라 통증을 느끼지 않으니 온몸을 던지며 거칠게 싸웠다. 그렇기에 우리 편으로 만들어도 금방 부서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마석의 공급 문제도 있어서, 강화하지 않은 오토마톤을 미로에서 써먹는다는 건 여러모로 투입대비 산출이 좋지 못한 행위였다.

남들에게는 배보다 배꼽이 큰 바보짓이지만, 앨런은 마력과다증이지 않은가. 통제하기 힘들어서 몸을 망칠 만큼 마나는 흘러넘쳤다.

마석의 문제는 해결해도 파손 문제가 남았지만, 앨런은 마법공학자라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투로 혹사당한 오토마톤을 수리하다가 정 안 되면 쓰러트린 적에게 영혼석을 끼워서 부리면 될 일이었다.

‘왠지 소환술사나 조련사 같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앨런은 그들과 달리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다는 것이다. 조련사가 부르짖는 우정과 유대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토마톤을 하수인으로 써먹겠다는 계획은 잘 짜인 것 같아도 그 전에 해결할 일이 있었다.

바로 별문자 서적을 기초로 영혼석을 조작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캡슐 호텔은 말만 호텔이지 겨우 잠만 자는 장소고, 그렇다고 공원처럼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될 장소는 싫었다.

도로를 건넌 앨런은 3성 호텔로 향하며, 탈출하고 비토가 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왜 용사가 강한 줄 알아?’

‘선택받은 사람이라서요?’

‘아니. 세계파멸이 코앞에 닥쳐서 그래. 안 망하게 하려면 전력을 쏟아야지. 아이가 위험하니 부모가 괴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떠돌잖아. 그거와 비슷해.’

앨런이 호텔을 선택한 건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것저것 소비하느라 통장이 가벼워진 시점에서 호텔에 오래 머무르면 앨런의 계좌에도 파멸이 찾아온다. 그 한계가 앨런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체크인을 마치자 직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301호로 가시면 됩니다. 저희 호텔을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레에 담긴 오토마톤을 보고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직원. 앨런은 평소처럼 평정을 유지하며 객실로 향했다.

내부를 살필 시간도 없기에 바로 표범을 분해, 머리만 남기고 케이블을 길게 빼서 동력원과 연결했다.

‘이러면 실수하더라도 못 움직이니, 호텔의 가구는 안전하겠지.’

침대에 걸터앉은 앨런이 영혼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니, 희뿌연 연기 같은 입력창이 떠올랐다. 방에 불을 꺼놔서 별문자가 진짜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다.

앨런은 별문자 책을 옆에 펼쳐놓고 전투 관련 구문을 살폈다. 지하인들이 잘 짜놔서 건들 필요가 없었다.

앨런이 손봐야 할 구문은 아군 인식과 음성명령 수용이었다.

먼저 아군 인식. 마력을 머금은 앨런은 손가락이 작은 별들을 단번에 으스러트렸다.

공격 제외 대상 문구를 지우고, 입력창을 켠 상태로 동력원에 마력을 주입하자 표범의 눈이 있는 부분이 하얗게 물들었다.

“여기 보세요.”

앨런의 음성에 반응한 표범의 안광이 옆으로 쏠렸다. 사람으로 치면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과 비슷했다.

하얀 안광이 붉게 물들기 전, 앨런은 영혼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탁!

살짝 벌어지려던 턱이 닫혔다. 표범은 앨런을 보고도 안광이 그대로였고, 만져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제는 책에 적힌 대로 음성명령을 입력하면 되나, 기초 서적이라 ‘멈춰, 공격, 따라와.’ 같은 짧은 명령만 가능했다.

별문자를 새긴 앨런이 다시 동력원에 마력을 불어넣자, 표범이 안광을 빛내며 턱을 벌렸다.

“멈춰.”

딱딱!

그러나 표범은 명령에 따르지 않고 앨런을 향해 이빨을 보였다. 목만 덩그러니 있어서 공격할 순 없어도 금속 턱을 위아래로 거칠게 부딪쳤다. 명백히 적대적인 반응이었다.

“분명 제대로 입력했는데···.”

고민은 길게 이어졌다. 평소라면 몸을 생각하며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 테지만, 오늘만은 그러지 못했다.

별문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앨런은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렸다. 해가 뜨며 햇빛이 무릎에 닿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 해를 피하고자 살짝 움직이는 도중에도 앨런은 별문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

아주 작게 숨어있는 점 하나를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탄성이 빠져나왔다. 바짝 붙어있는 별문자 사이에 끼어 있어서 여태 찾지 못했던 오점이었다.

“왜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지 알겠어.”

옷이나 신발에는 흙탕물이 조금 튀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별문자는 그렇게 무심하지 않았다.

정교하고 복잡한 문자였다. 구름이 조금만 껴도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마력감응력이 낮은 사람은 별문자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별문자는 입체적인 형상인데 너무 2차원적으로만 생각했나?’

그때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룬문자도? 면에만 새긴 지금까지와 다르게 공간에 겹쳐 새길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의 진전이 없었다. 이제 룬문자 하나를 다루는 앨런에게는 무언가 까마득한 세상의 이야기였다.

다시 별문자에 집중한 앨런은 점심쯤 문제를 전부 해결했다. 허리를 쭉 펴자 통증 대신 뻐근함이 몸을 살짝 두드렸다.

꽃의 효능이 느껴졌다. 예전이었다면 밤을 새울 엄두도 못 냈다. 아니, 그 전에 피곤한 몸이 침대 위로 저절로 쓰러졌겠지.

약효만 믿고 몸을 혹사하는 건 미련한 행위였다. 충분한 영양과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밖에 나가기 위해 얼굴을 씻던 앨런은 거울을 보며 뺨을 문질렀다. 왠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인가?’

아니면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리라.

룬문자와 별문자는 뇌세포를 고문하는 어려운 학문이었지만, 앨런은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

칼슨은 룬문자와 별문자를 동시에 공부하는 앨런을 보며 대학원 두세 개를 동시에 다니는 미친 사람 같다고 했지만, 대학을 다녀본 적이 없는 앨런은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학 다니다가 진학하면 대학원 아닌가?’

앨런의 관심은 온통 마법공학이 앗아갔기에 그런 의문도 금방 잊혔다.

*

미궁 3층, 운 좋게 사람이 없는 고정 맨홀을 발견한 앨런은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3층의 오토마톤을 상대하게 해서 표범이 얼마나 강한지 판단하려는 의도였다.

원래 밋밋하던 철판에는 작은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얼핏 보면 표범의 가죽에 있는 무늬와도 흡사했다.

무늬의 정체는 [경화]

앨런이 룬펜으로 철판 하나하나마다 룬문자를 새긴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싸울 때마다 수리할 수는 없으니,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효과가 좋으면 계속 반복. 아니면 오토마톤은 소모품처럼 사용해야지.’

오토마톤의 골격과 장갑에 마력철이나 좋은 합금을 사용하면 모를까, 아직 앨런에게는 그것들을 다룰 만한 자금과 기계가 없었다.

맨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개선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도중.

푸슉!

맨홀이 열리며 사마귀를 닮은 오토마톤이 튀어나오자, 수레 옆에 엎드려 있던 표범이 반응하며 몸을 일으켰다.

앨런 역시 표범 뒤에 서서 지팡이를 겨눴다.

슥슥!

날붙이가 달린 앞 다리 두 개를 교차하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던 사마귀가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접근했다.

진짜로 다리 많은 벌레였다면 징그러웠을 수도 있지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오토마톤이 저러니 썩 봐줄 만했다.

앨런은 여전히 가만히 있는 표범을 보며 레이저포인터를 꺼냈다. 붉은 점이 사마귀의 몸통에 찍히자.

눈이 붉게 물든 표범이 돌진했다. 사마귀는 정직한 움직임을 보며, 높이 든 앞 다리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카앙!

낫과 표범의 등판이 부딪치며 불똥이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뚫렸을 철판은 훌륭하게 공격을 흘려냈다.

사마귀의 공격이 허무하게 끝났으니, 당연하게도 다음은 표범의 차례였다.

고개를 치켜든 표범이 배와 연결되는 홀쭉한 부분을 강하게 물어뜯었다.

콰직!

표범이 머리를 흔들자 사마귀가 두 동강이 났다. 케이블을 내장처럼 질질 흘리며 바닥에서 발버둥 쳤다.

마력 탄환을 발사해서 사마귀를 마무리한 앨런이 입을 열었다.

“멈춰. 이리와.”

앨런을 바라보는 표범의 안광은 사마귀를 인식했을 때와 달리 하얗게 빛났다. 앨런의 개조가 훌륭하게 작용했다는 증거였다. 저렇게 사마귀를 박살 낸 건 조금 아쉽지만.

‘지네와 달리 왜 표범은 바로 적으로 인식했을까? 영혼석을 개조해서 풍기는 기운이 달라졌나?’

앨런은 떠오르는 의문을 접어두며 표범의 상태를 살폈다. 등 쪽의 철판이 우그러진 것만 빼면 훌륭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혼자서도 파티를 맺었을 때처럼 더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앨런은 표범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는 드워프 아저씨에게 자리를 팔고 다음 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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