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24화 (24/193)

특이개체(3)

7층에 도착한 앨런은 지나온 길을 힐끔 돌아봤다. 다행히 늑대 기수들은 아래층까지 쫓아오지 못했다.

‘기사가 특이 개체였구나. 그렇다고 흩어지길 기다리자니 떠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검은 안개 너머, 저 위에서는 아직도 붉은 안광들이 번쩍거렸다. 기수들은 다른 장소로 떠나지 않고 아예 주둔해버렸다.

‘강한 탐험가들이 지원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나?’

사실 가장 정답에 가까웠다. 미궁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파헤치려는 대기업이나 탐험가조합에서 특이현상이나 개체를 가만히 놔둘까?

심지어 심층도 아니고 미로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적당히 강한 탐험가만 빠르게 파견해도 됐다.

그런 탐험가가 저것들을 정리하기까지는 아무리 늦어도 하루를 넘기지 않겠지만, 다르게 말하면 앨런은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의미였다.

앨런은 검은 안개 속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곳은 삼거리, ‘감히 살아서 돌아가겠다고?’라고 묻는 것처럼 하나의 통로에서 붉은 안광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위로 솟은 날카로운 뿔이 먼저 포착됐다. 이번에는 물소를 닮은 놈들인데, 덩치가 어찌나 큰지 두 마리가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통로가 꽉 차 보였다.

당연히 저것들이 돌진하면 앨런은 피할 장소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는 육포가 될 테고.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앨런은 약간의 지체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수레를 기울여서 오토마톤의 무거운 골격은 전부 버리고, 표범과 연결했다.

수레에 탑승한 앨런은 짧게 외쳤다.

“달려.”

명령을 인식한 표범이 달리기 시작했다. 9층에서 잡았다던 표범은 앨런이 개조까지 한 상태라 수레를 달고도 제법 잘 달렸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잘 달린다는 뜻이 물소보다 빠르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앨런은 배낭에 손을 쑥 집어넣어서 얇은 철판 조각들을 꺼냈다. 헤드랜턴의 불빛 아래에서 철판에 새겨진 룬문자들이 반짝였다.

‘꽤 무겁네.’

아무리 얇아도 철판은 철판. 다른 물질과 비교하면 질량이 꽤 됐다.

앨런은 철판을 트럼프카드처럼 옆으로 펼쳤다. 마법공학자이자 마력과다증인 앨런의 독특한 룬문자 응용법이었다.

얼핏 보면 동양의 무당이나 음양사가 다루는 부적을 닮기도 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부적은 종이인데 이쪽은 철판. 아직 앨런의 능력이 모자라서 약한 재질에는 룬문자를 새기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룬문자 상태는 전부 괜찮아 보여.’

철판을 빠르게 훑은 앨런은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손가락에 끼운 철판을 휙휙 던졌다. 약간 묵직한 카드가 잘 날아가듯이 철판도 꽤 멀리까지 비행했다.

방향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미로는 양옆으로 벽이 있어서 전문가가 아닌 앨런이 대충 던져도 엉뚱한 곳으로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핑그르르 날아간 철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쿵쿵쿵!

물소의 발굽에 바닥이 진동하니, 철판도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철판에 적힌 룬문자는 [자성], 오토마톤의 몸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앨런이 미리 준비한 룬문자 중 하나였다.

‘언젠가 써먹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금방 사용할 줄은 몰랐지. 차라리 기사를 상대로 쓸 걸 그랬나···.’

번민은 잠깐. 앨런은 현 상황에 집중했다.

바닥에 떨어진 철판에 부여된 마력이 잉크처럼 번지고, 마침내 [자성]까지 물들이자 거침없이 달려오는 물소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챙!

뿔과 뿔이 맞닿는다. 뒤를 이어 동체와 동체가 달라붙으니 다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사람처럼 머리를 써서 발을 맞출 수도 없으니, 그 결과는 넘어짐으로 나타났다.

콰득!

그리고 뒤를 따르던 오토마톤들의 발굽에 의해 납작하게 변했다. 동족 의식이 아예 없는 오토마톤은 발밑에 깔린 고철에 무관심했다.

그 사이 앨런은 수레에 새로운 룬문자를 새겨넣었다. 그 단어는 [부유]. 바퀴가 살짝 들렸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무게가 덜어지니, 표범이 속도를 한층 끌어 올렸다.

그 후로도 과할 정도로 출현하는 오토마톤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던 도중.

“제발 죽어!”

저항하는 탐험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레가 더 전진하자, 사거리 중앙에서 오토마톤 하나를 막 쓰러트린 남자가 보였는데.

“아직도 남은 새ㄲ···.”

남자는 표범을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가 수레에 탑승한 앨런을 보고 멈췄다. 아니면 뒤에서 쫓아오는 물소들을 보고 놀랐을 수도 있고. 사실 그럴 확률이 제일 높았다.

검은 비니를 쓴 남자는 반사적으로 수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건 불을 보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당연한 반응이었다.

앨런은 고민했다. 남자를 태우면 수레는 느려진다. 그러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오토마톤에게 잡히기 쉬워진다.

남자를 미끼로 놓고 달아나는 길이 가장 상책이다. 앨런에게 죽음은 익숙했고, 그것이 일면식도 없는 남자에게 찾아간다면 어떠한 가책도 받지 않으리라.

‘그런데 꼭 그래야 하나?’

노박에게서 도망갈 때 도와준 비토가 있었다. 사실 그의 목걸이에는 위치추적 기능만 있어서 노박이 포기할 정도로만 멀리 달아나면 됐다.

게다가 비토는 앨런의 체질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갈라지면 노박이 앨런을 쫓을 게 뻔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함께했다.

마지막에 기절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앨런은 크든 작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베푼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올라타기 좋게 감속하는 수레, 앨런이 뻗은 지팡이. 남자는 눈치가 좋았다.

재빨리 탑승한 남자는 수레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고마워. 그쪽 상황도 안 좋아 보이는데···.”

“원거리 타격 수단 있습니까?”

“아, 잡담할 시간이 아니지. 아쉽지만 없어. 일행들이 죽으면서 에비도 함께 망가졌거든. 관통 특화 매직미사일이 내장되어 있어서 큰 힘이 됐을 텐데···.”

“마나는 다룰 수 있습니까?”

“작지만 마나하트가 있긴 해.”

고개를 끄덕인 앨런은 구석에 있는 배낭을 턱짓했다.

“그 안에 마나피스톨이 있을 겁니다. 다른 건 건들지 말고 그것만 꺼내세요.”

“마나하트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정말 작아···.”

“지금은 따질 상황이 아닙니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불평은 그만하고 자세 잡으세요. 마석 끼워도 작동하는 물건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네.”

앨런의 분위기가 남자에게도 옮았는지,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제 색을 되찾았다.

앨런의 말대로 마나피스톨을 꺼낸 남자는 수레에 쪼그려 앉은 상태로 사방을 휘휘 둘러봤다.

“나도 쏠까?”

“후방 견제는 지금도 충분하니, 전방에서 적이 오는지만 확인해주세요.”

앨런이 룬문자를 계속 던지며 오토마톤을 견제하는 사이, 다시 한번 교차로를 지나게 됐다.

영원히 따라올 것 같던 물소들은 우회전하며 사라졌다.

“천천히.”

표범에게 명령을 내린 앨런은 이제야 숨을 골랐다.

“이상하군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요?”

“어딘가에서 폭음이 작게 들렸거든. 그걸 따라갔을 거야.”

“어떻게 아십니까?”

앨런이 쳐다보니 남자가 비니를 벗었다. 그 안에서 검은색 토끼 귀가 쫑긋 올라왔다.

“보다시피 남들보다 청각이 예민하거든. 폭음은 지금 미로에서 싸우는 탐험가가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증거겠지. 혹시 지원군이 도착한 걸까?”

“속단하기엔 이릅니다.”

섣부른 희망이 꺾이면 더욱 커다란 절망으로 변한다.

붕 떠오른 몸. 박살 난 선체. 몸을 쥐어짜는 와류. 그리고 물거품. 앨런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이기에 남자의 얼굴이 약간은 밝아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엄청나게 차분하네. 누가 보면 안드로이드인 줄 알겠다. 마스크 때문에 더 그런가?”

“···.”

“아니지?”

“멀쩡한 사람입니다.”

“그래, 룬문자를 실시간으로 다루는 건 사람밖에 없지.”

천천히 움직이는 수레 안에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그을음이 묻은 손바닥을 보더니 옷에 슥슥 문지르고 다시 악수를 청했다.

“내 이름은 유타. 덕분에 살았어.”

“앨런입니다.”

마침 수레는 공터라고 부를만한 장소에 도착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오토마톤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덧 7층의 끝이었다.

이곳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쫓아오는 오토마톤도 없으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앨런은 이제야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근두근. 꼭 청진기에 귀를 댄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입으로 내쉬는 호흡의 소리도 매우 컸다.

그리고 푸슉!

앨런과 유타는 이 소리를 잘 알았다. 심지어 머리 위에서 들려왔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둘은 말없이 몸을 뒤로 날렸다.

카가가각!

천장의 어둠 속에서 날아온 톱날 대검이 바닥을 긁으며 불똥을 뿌렸다. 그 속에 피까지 섞여 있는 매우 선명한 붉은 빛이었다.

앨런과 달리 유타는 운이 나빴다. 오른쪽 어깨가 물어뜯긴 듯이 너덜너덜했다. 근육, 뼈, 혈관 등 장기가 완전히 바스러졌다.

뇌가 쇼크를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지만, 어차피 저대로는 출혈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렇다고 앨런이 그의 상처를 살필 상황도 아니었다.

멀쩡한 몸으로 나타난 기사는 유타에게 관심을 끄고 앨런을 노려봤다.

‘기사가 또 있나? 아니면 수리해서 나타난 같은 개체?’

앨런은 왼손에 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고, 오른손에는 룬문자 카드를 슬그머니 쥐었다.

붉은 꽃 덕분에 일시적으로 일반인보다는 나은 몸이 됐다지만, 정면 상대는 멍청한 짓이었다. 놈이 톱날 대검을 휘두르면 스티로폼처럼 썰리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앨런은 육탄전에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오토마톤을 부리는 것이다.

“공격.”

음속은 대략 초속 340m. 앨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표범이 기사의 옆구리를 덮쳤다.

까드득!

[경화]로 도배한 표범의 장갑은 금방 썰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의 문제일 뿐, 결과는 같았다.

케이블을 내장처럼 죽죽 흘리는 표범이 무너지고, 기사는 앨런을 바라봤다. 오토마톤 특유의 붉은 안광 없는 모습이 오히려 무서웠다.

물론 공포가 앨런의 마음을 잠식하는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명경지수에 어울리는 심경은 잠잠했다.

쿵!

기사가 앨런을 향해 움직였다.

쿵! 쿵!! 쿵!!!

소리가 점점 커졌으나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일은 없었다. 기사는 제자리에서 다리만 강하게 구르고 있었다.

원인은 주변에 깔린 룬문자 카드들. 앨런의 마나를 머금은 [자성]이 미약한 빛을 흘리며 주인의 뜻을 따랐다.

기이잉!

기사는 미친 듯이 회전하는 톱날 대검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손에서 빠져나간 대검은 기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앞에서 멈췄다.

그곳은 [자성]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감옥이었다. 룬문자에 담긴 법칙이 사방에서 기사를 잡아당겼다. 소가 끄는 밧줄에 사지와 목이 묶인 사형수와 같은 꼴이었다.

앨런은 지팡이를 기사의 가슴에 겨눴다. 출력제어기가 없는 지팡이는 푸른 포탄을 토해냈고, 이번에도 기사가 피하는 일은 없었다.

“후···.”

앨런이 숨을 내쉼과 동시에 [자성]의 불이 꺼졌다. 룬문자의 효능이 다하니, 억지로 붙들려 서 있던 기사도 무릎을 꿇었다.

‘안심하긴 이르다.’

멀리서 [비행]이 적힌 카드를 날렸다. 기사의 몸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처박히길 수차례.

한시름 덜어낸 앨런은 기사에게 천천히 접근해서 지팡이로 툭툭 두들겼다. 기사의 몸에서 깡통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끝났···.”

그 순간 뻥 뚫린 기사의 가슴이 꿈틀거렸다. 그 속에서 작은 무언가가 튀어나오다가.

깡!

앨런이 반사적으로 휘두른 지팡이에 얻어맞고 바닥에 축 늘어졌다.

“까치? 까마귀?”

둘 중 하나를 모티브로 삼은 듯한 새였다. 꽁지가 있는 부분이 망가져 있었는데, 그 틈 사이로 금 간 마석이 보였다.

새를 챙긴 앨런은 기절한 유타에게 얼른 다가갔다. 어떻게 조치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우선 앨런은 요화에게 구매한 지혈제를 뿌렸다. 정확히는 씨앗이었는데, 찢어진 어깨 사이로 스며든 씨앗은 피 웅덩이를 양분으로 삼아서 덩굴로 변했다.

지상으로 갈 때까지 무사하길 바라며 유타를 수레에 옮긴 순간, 다수의 불빛이 이쪽으로 접근했다.

익숙한 얼굴이 앞으로 나섰다. 모히칸 스타일의 엘프였다. 그는 앨런과 기사를 번갈아 보더니 징그럽게 웃었다.

“오토마톤들이 이상행동을 멈춘 이유가 있었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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