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25화 (25/193)

특이개체(4) [삽화]

먼 옛날, 엘프는 긴 수명과 아름다운 용모를 겸비한 자연의 수호자로 불렸다. 필사적으로 수련하지 않아도 긴 삶은 강대한 힘을 부여했고, 미모는 지성체들의 호감을 사기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두 발로 걷는 지성체들은 땅과 숲의 부산물이 필요했다.

숲과 공존하는 요정들은 무분별한 발전을 성역에 대한 중대한 침범으로 간주했다.

그에 따른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숲이 불타고, 강이 붉게 물들고, 메마른 땅은 그 어떤 식물도 포용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하나하나는 강해도 수가 적었던 엘프는 끝내 패배하고 문명사회와 화해했다. 때로는 부족 전체가 도시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피가 섞이고 섞여서 기대 수명이 120년 정도로 짧아졌다. 소위 말하는 명문가는 혈통을 보존해서 훨씬 오래 산다지만 극히 일부.

어쨌든 보통 엘프는 인간에 비하면 1.5배를 살지만, 사회에 적응하다 보니 이제는 도시에 찌들었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살짝 길고 끝이 뾰족한 귀를 가리면, 약간 잘생기고 조금 예쁜 인간과 똑같았다. 탐욕과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인간 그 자체였고.

모히칸 머리 스타일의 엘프는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렸다.

다른 단검에 비해 실용성에 문제가 있는 도구지만, 날에 새겨진 룬문자, [예리] 덕분에 얇은 철판은 쉽게 가를 수 있는 흉기로 탈바꿈했다.

휘릭, 탁!

엘프가 날 끝으로 앨런을 겨눴다. 단검의 날이 헤드랜턴의 빛 아래에서 새파랗게 번뜩였다.

“보아하니 그쪽이 저걸 잡았고, 우리는 허탕을 쳤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좆 빠져라 달려왔는데 누가 홀딱 집어먹었으니 맥 빠지잖아. 안 그래 친구들?”

엘프의 껄렁한 물음에 일렬로 퍼져있는 탐험가 다섯이 고개를 끄덕였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는지, 종족을 가리지 않고 인상들이 험악했다.

동료들의 응원에 힘을 얻은 엘프가 앨런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지 잔뜩 찌푸려진 미간은 덤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미궁에 한 번 들어오려면 이것저것 소모하는 게 많잖아. 시간은 삭제되고, 탐험물자 사느라 계좌는 텅텅 비고.”

“···.”

“그쪽은 혼자, 아니 반송장까지 둘인가?”

수레를 슬쩍 쳐다본 엘프는 쓰러진 기사가 있는 장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앨런이 제지하지 않으니 아예 발끝으로 툭툭 차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쪽보다 세 배는 돈을 많이 썼다, 이거지. 그래, 저 새끼는 금방 뒤질 거 같으니 인심 써서 여섯 배.”

“전리품을 달라는 뜻입니까?”

“정답이야. 이 깡통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서 제값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특이 개체 정도는 챙겨가야 우리도 수지타산이 맞겠지.”

“···.”

앨런이 침묵하자 엘프는 다시 인상을 쓰며 나이프를 빙그르르 돌렸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자못 살벌했다.

“내 설득력이 모자랐나? 아니면 네가 멍청한 거냐?”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엘프의 으름장에 놈의 동료들도 무기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미궁에 시체를 가만히 놔두면 늪에 잠기는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시체가 없어지면 어떻게 죽었는지 알기 불가능하고, 목격자도 치우면 완전범죄였다.

앨런은 다섯, 엘프까지 합치며 여섯을 힐끔 바라봤다. 놈들은 철저하게도 부채꼴 형태로 서 있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래야 너도, 나도 편하지. 거기에 있는 표범도 두고 가고. 어차피 망가져서 필요 없잖아. 내가 대신 처리해 줄게.”

잠깐 멈칫했던 앨런은 유타가 실린 수레를 끌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벽에 붙어서 공터를 크게 도는 와중, 엘프가 다시 한번 지껄였다.

“생각해보니까 힘겹게 수레를 끌고 가는데 장비도 있으면 너무 무겁지 않을까? 운 좋은 줄 알아. 죄다 벗겨 먹으려는 놈들만 있는 메이즈시티에서 이렇게 선량한 사람 보기 힘드니까.”

“···.”

앨런은 그래도 움직였다. 보내줄 것 같던 태도는 기사가 전투에 휘말려서 망가질까 봐 걱정한 탓이었다.

엘프가 목소리를 재차 높였다.

“어이! 안 들려?”

미로는 마력을 사용한 신체강화가 형편없는 앨런이 맨몸으로 버틸 수 없는 장소였다.

심지어 이곳은 7층의 끝. 사람이 가득한 3층까지 올라가려면 네 개의 층을 돌파해야 했다. 그러니 장비를 내놓고 올라가라는 말은 자살과 동의어였다.

“멈춰!”

목소리가 다시 커지는 순간, 앨런은 수레를 8층 내리막길 쪽으로 밀며 엘프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엘프의 발목 근처에 있는 표범을.

“물어.”

“끄악!”

동시에 터진 비명. 표범은 몸통이 반절로 나뉘어서 기동력만 상실했을 뿐, 드릴 송곳니가 박힌 턱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불의의 기습에 엘프의 발목은 갈가리 찢겼다. 운 좋게 회복한다 해도 영구적인 장애가 남을 만한 상처였다.

“죽ㅇ···끅!”

엘프에게 벌어진 참상을 목격한 탐험가 하나가 총구를 돌리다가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이제 남은 적은 넷. 한 놈의 에비에서 빛이 번쩍하는 모습을 본 앨런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쐐액!

원래 앨런이 있던 자리를 무형의 칼날이 훑고 지나갔다.

그 사이, 균형을 잡은 앨런은 [자성]이 적힌 카드를 휙휙 던졌다. 총이라는 물건은 금속으로 만들고, 저층에서 사용하는 종류는 마법저항력도 없었다.

기사를 구속했던 룬문자가 다시 의지를 발현했다. 앨런을 겨누던 총구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투투투!

사격의 방향은 바뀌었으나, 탐험가가 당기던 방아쇠는 그대로였다. 에비로 마법을 날렸던 적이 몸에서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제 셋. 아니, 둘.’

장비가 [자성]에 끌려가서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앨런의 마나피스톨이 하나의 생명을 추가로 꺼트렸다.

오토마톤보다 이쪽이 상대하기 훨씬 쉬웠다. 동력원을 망가트리기까지 죽어라 달려드는 오토마톤과 달리, 사람은 탄환 하나면 충분했다.

“후···.”

앨런은 끝내 놈들을 정리했다. 허벅지에 구멍이 뻥 뚫렸지만,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동맥이 상하지 않았길 바라며 지혈초의 씨앗을 구멍에 집어넣자, 안쪽에서 발생한 기묘한 꿈틀거림이 통증을 유발했다.

“···.”

이를 악문 앨런은 혼자 남은 엘프를 향해 걸어갔다.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해도 허벅지의 통증 때문에 시야가 흔들렸다.

“너, 이 개자식···.”

“그냥 서로 좋게 헤어졌으면 좋잖아. 그쪽 머리는 사고기관의 역할을 상실한 것 같으니 제거해줄게. 지상에 올라가면 새로 달든지 해.”

그때 들려오는 발소리.

공터로 들어오는 통로는 세 개였고, 그곳에서 대략 스무 명이 우르르 달려왔다. 오토마톤도 본다면 기겁하고 도망갈 숫자였다.

벌써 대기업이나 탐험가조합에서 지원군을 보냈나 싶지만, 불행하게도 놈들을 보는 엘프의 표정이 환해졌다.

“빨리 와! 나 죽는다!”

엘프는 고통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악을 썼다.

몇은 죽은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고, 몇은 앨런에게 무기를 겨눴다. 정작 앞으로 나선 건 한 명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앨런에게는 그 이상도 아깝다는 듯이.

푸른 빛을 발하는 총구. 당겨지는 방아쇠.

앨런의 시간이 길어졌다.

휘~~~익!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뿜어지는 파란 섬광 그리고.

통!

빈 깡통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으로 튕겨 나가는 마력의 탄환.

어느새 앨런의 앞에는 검은 옷에 새까만 망토를 두른 검사가 서 있었다. 날개뼈 아래까지 닿는 회색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저건 또 뭐야!”

“머저리들아 전부 갈겨!”

갑작스러운 등장에 혼란도 잠시, 적들은 하나로 단결하며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머릿수 덕분에 샘솟은 용기가 밖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휘익!

다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스무 명의 몸이 맹수의 울음에 겁이라도 집어먹은 사람처럼 뻣뻣해졌다.

앨런 역시 피부를 오싹하게 만드는 진동을 느꼈지만, 적들과 달리 움직일 수 있었다.

검사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손목을 움직이면, 탐험가가 픽픽 쓰러졌다. 약하게 들썩이는 가슴을 보면 죽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검사는 앨런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앨런의 감사 인사에 회색 머리의 여성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가슴께에 달고 있는 배지가 반짝거렸다.

깨진 유리를 형상화한 듯한 배지는 브레이커의 직속 탐험가란 뜻이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맹인?’

의문도 잠시, 아래로 굴린 수레를 떠올린 앨런은 여성에게 양해를 구했다.

“부상자가 있어서 잠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이번에도 여성은 고개만 움직였다.

다행히도 유타와 수레는 무사했다. 앨런이 수레를 끌고 돌아왔을 때, 공터는 사람들로 붐볐다.

기절한 탐험가들은 체포되었고, 시체는 그들이 가져온 수레에 실렸다.

“이건 네 거지?”

옆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은 기척도 없이 서 있었다.

앨런은 그녀의 발치에 널브러진 기사와 표범을 봤다. 마지막까지 주인의 명령을 따랐던 표범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앨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경우에도 제 소유권이 인정되는 겁니까?”

“어디에서 등록했어?”

“브레이커입니다.”

“그럼 잘됐네. 다른 곳은 몰라도 브레이커는 그래. 만약 필요하면 정당한 대가를 치르면 되니까.”

온갖 협잡이 가득한 메이즈시티에서 가장 커다란 탐험가조합다웠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면이 있든지.’

사실 웬만한 대기업과 비견되는 브레이커에 흠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문뜩 떠오른 생각일 뿐, 앨런이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은 없었다.

여성은 수레에 실린 유타를 가리켰다.

“파티원?”

“아닙니다. 오토마톤에게 쫓기다가 협력했습니다.”

“생면부지인데 그 상황에서도 감쌌다고?”

눈꺼풀을 감고 있어도 왠지 그 속의 눈빛이 어떨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침묵. 일단의 무리가 인파를 헤치고 나타날 때까지 지속 되었다.

이번에도 브레이커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도착했습니다.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둘, 치료해 줘.”

“알겠습니다.”

그들의 조치는 신속했다. 앨런을 바닥에 눕히더니 허벅지에 주사를 놓고, 지혈초와 탄환을 손쉽게 뽑아냈다. 웬 물약까지 마시니 신체에 활력마저 돌았다.

“모두 끝났습니다.”

“수레와 부상자는 너희들이 본사까지 옮겨. 전리품은 이 사람 앞으로 달아놓고.”

“알겠습니다.”

“넌, 나를 따라와.”

앨런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 입었던 부위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네가 스스로 해결했으면 모를까, 내가 도와줬으니 경위 조사 정도는 해야 해. 동의해?”

“동의합니다.”

“곤란한 질문을 던지진 않을 거야.”

그 말대로 여성은 지상을 향해 올라가는 동안 간단한 질문을 했다.

몇 층에서부터 사건이 벌어졌냐,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느냐, 저 그룹과 어떻게 마찰이 생겼느냐 등.

너무 대답하기 쉬워서 조사가 맞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금방 끝나서 침묵의 시간도 길어졌고.

지상까지 올라온 앨런은 마스크를 벗었다. 요화가 먼지 먹지 말라고 항상 쓰고 다니라고 했지만, 지금은 탁한 공기가 정겹게 느껴졌다.

앨런은 여성을 따라서 요새의 성벽을 올라갔다. 일반 탐험가는 올 수 없는 장소였다.

위에 마련된 착륙장에는 유선형 몸체의 항공차량이 있었다. 메이즈시티 내에서 항공차량을 타려면 비싼 세금을 내야 했다.

앨런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도 조사가 남았습니까?”

“아······.”

침묵이 유달리 길었다. 항공차량에 부착된 붉은 라이트가 그녀의 뺨도 붉게 물들였다.

“어차피 왔으니까 타고 가. 목적지는 본사야.”

“저도 그쪽으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자주 묵는 숙소도 그 근처에 있어서 가야 했다. 좌석은 서로 마주 보는 형태였다.

공중에는 신호도, 교통체증도 없기에 항공차량은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착했다.

브레이커의 본사는 앨런이 평소에 드나드는 5층 건물보다 뒤에 있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옥상 착륙장에 먼저 발을 디딘 여성이 앞장서고, 앨런은 그 뒤를 따랐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아서 별이 잘 보였다.

여성 역시 눈을 뜨고 별을 관찰하고 있었다. 분명 눈동자가 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맹인이 아니었어?’

앨런과 눈이 마주친 여성은 다시 눈꺼풀을 닫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특이 개체, 기사는 우리에게 팔아주면 좋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성에게는 권유일지 몰라도 앨런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브레이커 측에서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괘씸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물론 앨런의 감이 기사보다 작은 새가 진짜라고 소리치는 이유도 있었다.

“그럼, 잘 가.”

그렇게 헤어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여성의 목적지도 1층이었고, 둘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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