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33화 (33/193)

수문장(1)

로만 컴퍼니의 패거리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야영지에 남은 앨런은 하루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사냥과 수리의 반복이었다. 마도구 수리 수입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한동안 이곳에 눌러앉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몸과 마음이 너무 편하면 발전이 없다.’

앨런은 상승 및 발전 욕구가 불편함에서 나온다는 지론을 가졌다. 의도적으로 본인에게 채찍질을 해줘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물론 야영지가 편한 건 맞지만 여기도 미로라서 언제 맨홀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런데도 편해졌다는 의미는 앨런이 이곳에 꽤 적응했음을 알려주는 지표였다.

그래서 장사 팻말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안타까워하는 탐험가들이 있었지만, 앨런의 궁극적인 목표는 미궁 탐사를 통한 지식의 습득이지 수리가 아니었다.

내리막길에 고여있는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자 지잉하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미궁이명증은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10층에 발을 디딘 앨런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 통로를 훑어봤다.

‘수문장이 처치되면 이틀, 그러니까 최소 48시간 동안은 안 나와.’

어제 처치되었으니 30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고, 앨런의 실력도 수문장만 없다면 10층을 천천히 탐사할 수 있었다.

‘특이현상이 또 발생하진 않겠지.’

특이현상은 경험하기 드물어서 ‘특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그러니 10층을 돌아다녀도 크게 상관없으리라.

앨런은 우선 돌아다니면서 길을 좀 익힐 생각이었다. 지도로만 아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경우는 큰 차이가 있었다.

교차로라고 무조건 십자 모양만 있진 않았다. 때로는 ‘X’자처럼 기울어진 길도 있고, ‘ㅈ’자와 비슷한 형태도 있었다.

그뿐이랴. 천장의 높낮이가 다르다거나, 통로의 폭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장소도 존재했다.

앨런은 계획을 세웠다. 먼저 천천히 돌아다니며 미로의 지형에 익숙해지고, 그다음에는 오토마톤을 직접 상대해보며 강화외골격의 성능 한계를 시험하기로.

‘그리고 지상에 올라가서 제대로 준비를 마치고 다시 내려오자.’

야영지에 머물며 수리와 제작을 반복했지만, 앨런의 눈에는 장비들이 한참 모자라 보였다. 룬문자 카드도, 지팡이도, 표범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과하게 신경 쓴다고 할 수도 있지만, 미로 탐험 자체가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 벌이는 일이니 이 정도가 적당했다.

앨런은 옆에서 걷는 표범의 머리를 매만졌다. 저번에 얻은 수문장의 눈을 이식했는데 아직은 불안정했다.

‘위력은 살짝 약하고, 한 번 쏘면 망가질 가능성이 매우 크지. 확률로 따지면 90퍼센트 이상?’

그렇게 지도와 지형을 동시에 살피며 괴리감을 줄여가는 도중,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제는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익숙해진, 맨홀에서 오토마톤이 튀어나오는 소리였다.

가끔 탐험가를 속일 때도 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사람을 닮은 오토마톤이 천장에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녀석이 짧은 몽둥이 두 개를 부딪치자 화염이 치솟았다.

‘하나?’

적은 홀로 등장했다. 마침 수문장처럼 사람의 형태라 미래의 대비를 위한 최적의 상대였다.

앨런은 금방이라도 돌진하려는 표범을 말리며 앞에 섰다. 동물 형태만 상대하다가 사람을 상대하려니 생각보다 긴장되었다.

길쭉한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면서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신경 썼다.

‘어차피 타격은 별 볼 일 없어.’

통증을 느끼는 생명체가 아니다. 게다가 철갑을 둘렀기에 앨런이 지팡이를 몇 번 휘두른다고 부서질 오토마톤도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은 회피에 집중···.’

앨런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몸을 앞으로 살짝 굽힌 적이 그대로 달려 나왔다.

오토마톤의 무게와 미로의 바닥이 만들어내는 쿵쿵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앨런의 눈에는 빠르게 커지는 오토마톤의 모습만 보였다.

적의 첫 일격은 단순했다. 질량과 돌진으로 인한 운동에너지를 한껏 살리며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앨런의 눈은 적의 움직임을 확실히 포착했다.

‘왼쪽 어깨로 들이받고, 오른쪽 팔을 휘두르려는 판단이겠지.’

예상대로 묵직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뼘만큼 빗나갔다.

성공적인 회피에도 앨런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거리를 적어도 두세 배는 더 벌려야 했어.’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약한 몸뚱이 탓이다. 강화외골격으로 움직임을 보강했는데도, 눈과 뇌의 반응을 제대로 따라주지 못했다.

타고난 걸 어쩌겠는가. 그나마 피살이꽃 덕분에 차차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있으나, 근본적인 원인인 마력과다증이 남아있었다.

이번에는 몽둥이가 뺨 근처를 지나갔다. 표면에 흐르는 화염 때문에 앨런의 마스크로 들어오는 공기가 후끈해졌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집중이 필요했다. 허리를 뒤로 젖힌 앨런은 그대로 넘어지려다가 지팡이를 이용해서 겨우 균형을 유지했다.

이번에는 오토마톤이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몸으로 밀고 들어와서 회피할 장소를 없애고, 그대로 타격할 심산인 듯싶었다.

균형을 회복한 앨런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팡이의 끝이 바닥에 닿으며 미끄러졌다.

달려들던 오토마톤의 다리 사이로 지팡이가 쏙 들어가고, 앨런은 지팡이의 다른 끝을 잡은 채 그대로 전진했다.

쿵!

다리가 걸린 오토마톤은 허우적대며 앞으로 쓰러졌다.

“공격.”

앨런의 명령에 가만히 있던 표범이 순식간에 나타나서 오토마톤의 목을 물어뜯었다. 엎드린 적은 표범의 무게 때문에 꼼짝도 못 하고 그대로 망가졌다.

앨런의 마스크 내부로 뜨거운 숨결이 맴돌았다. 벗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싶었지만, 식물 필터 덕분에 진정 효과가 좋아서 그대로 놔뒀다.

‘그것 조금 움직였다고 힘드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점을 위안 삼으며 전리품을 회수했다.

계속 전진하며 같은 방법으로 강화외골격을 활용하니, 제법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앨런의 기준일뿐, 다른 탐험가가 봤다면 아슬아슬하다고 판단하리라.

한참을 돌아다니던 앨런은 익숙한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정찰 삼아 본대보다 앞서나가는 데니스가 교차로 모서리에서 얼굴만 쏙 내밀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회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나는 춤추는 줄 알았네.”

“음···.”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날랜 몸동작으로 수문장의 공격을 모두 회피하며 공격까지 곁들이던 데니스를 떠올리니 저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상심하지 마. 우리는 그 뭐냐, 주 종목이 다르잖아. 마법공학자가 몸까지 잘 다루면 내가 뭐가 되겠어?”

“저는 모두 잘하고 싶습니다.”

“어···, 기왕이면 그게 좋지.”

데니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앨런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오토마톤을 응시했다. 지팡이로 두드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원래 방식이 더 세련되지 않아? 카드를 휙 던지고 오토마톤이 균형을 잃으면 치명타를 가하거나, 원거리에서 마력탄환 쏘는 거 말이야.”

“수문장을 상대할 생각이라서요.”

“파티 들어가게? 내가 우리 쪽으로 합류하라고 할 때는 싫다고···. 설마 혼자 잡으려고?”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위험하지 않을까? 뭐, 말려도 안 들을 눈빛이긴 하네.”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데니스의 동료들도 슬그머니 나타났다.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카크다가 꼬리를 흔들고, 앨런 역시 그에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복귀하는 중이다. 너도 탐험 끝났으면 같이 돌아갈래?”

“마침 정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앨런의 말에 탐험가들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함께 다니면 앨런의 덕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무료 마도구 수리 같은.

앨런 역시 얻는 게 있었다. 데니스의 파티는 11층에 내려간다고 매직웨어를 새로 맞춰서, 앨런이 처음 보는 장비가 꽤 있었다.

방향을 틀어 10층 입구로 향하는 동안, 서로 대화를 나눴다. 주로 앨런이 질문을 던졌다.

“11층은 어땠어요?”

“장난 아니더라. 오토마톤들이 오히려 귀엽게 보여. 분명 같은 녀석인데도 지하인이 조종하니까 상대하기 두 배는 어려워지더라고.”

데니스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의 의족에는 평소보다 흠집이 많았다.

“풋내기와 베테랑의 차이라고 할까? 그 정도로 전력이 상승할 줄은 몰랐어.”

“지하인은 어떻게 생겼나요? 기억을 재생한 사진이나 영상과 같습니까?”

이번에는 카크다 대답했다. 그냥 걷기 심심했는지 데니스와 앨런 사이로 끼어들었다.

“피부가 정말 하얗더라.”

“돌처럼 거칠다는 이야기는 왜 빼먹냐? 리자드맨 기준에서는 거북이처럼 갈라진 피부도 보들보들해서 그래?”

“들었어? 이 자식이 은근히 종족 차별자라니까.”

“너도 털 빠진 원숭이라고 놀리면서.”

친하니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초면에 저런 말을 했다가는 싸움이 나는데, 보통 주먹이 아니라 총구를 들어 올릴 확률이 높았다.

앨런은 둘 사이로 끼어들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카크다가 심심한 거 같으니 설명해주세요. 지하인은 어때요?”

“우선 동공은 비슷하더라.”

“그래요?”

“원래 동굴에서 살면 적은 빛을 최대한 활용하느라 동공이 커지거나 시력을 포기할 텐데 그런 흔적이 없었어. 그것들도 마석등을 사용하니 당연하겠지만.”

“어차피 창조자가 만든 생물 아냐? 그런 세세한 설정 따질 필요 있어?”

데니스는 학술적인 대화가 싫다고 몸서리를 쳤다.

“마법사나 마법공학자나 똑같은 놈들이라니까. 으, 잉크 냄새.”

“쟤는 무시해. 또 궁금한 거 있어?”

“지하인은 어떻게 싸웁니까?”

“아직 11층만 돌아다녀서 그런지 아까 데니스가 말한 대로 오토마톤을 주로 앞세우더라고. 놈들 중에는 미궁탐험가가 남긴 마도구를 사용하기도 하더라.”

“마도구의 본래 주인이 누군지 어떻게 아나요?”

“기업 상표가 찍혀있으니까 알지. 육망성이나 북두칠성 그리고 그 외의 것들.”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미궁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자 장소였다. 그 누구도 미궁이 왜 만들어졌는지, 누가 그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지하인이 탐험가의 무기를 뺏어 쓰는 행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럼 동굴에서도 맨홀이 나오나요?”

“아니, 오토마톤과 지하인은 동굴 벽에서 튀어나와. 직접 봤는데 창자를 찢고 나오는 괴물 같더라.”

그 모습이 기괴했었는지 카크다의 꼬리가 이상한 각도로 비틀렸다.

앨런은 그들이 끌고 있는 수레를 힐끔 쳐다봤다. 오토마톤과 지하인이 사용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마도구가 실려있었다.

“결과적으로 11층은 어땠어요? 전투는 대충 들었으니, 수익 측면에서요.”

“분명 전리품 가격이 뛰어오르긴 했는데, 너무 거칠게 싸우니 수리비나 탐험물자 구매비용을 빼면 순수익이 더 낮아지더라고. 그래서 한동안은 미로를 다녀야 할지, 아니면 동굴에 익숙해질지 고민 중이야.”

앨런은 카크다의 심정을 이해했다. 자신은 수익보다 탐험이나 지식이 먼저니 가능하면 그냥 내려가겠지만, 애초에 파티는 수익을 위해 뭉친 집단이었다.

그러니 미궁 전형으로 입사하려는 카크다도 동료들의 의견에 따라줘야 했다. 앨런처럼 혼자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한참 비늘을 다듬던 카크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탐험가가 생각보다 없네. 무슨 일 있나?”

“그러게요. 야영지에서 머물 때 보니까 수문장이 없다고 많이들 내려가던데.”

“전부 11층 갔나?”

“장비나 물자의 상태를 보면 그쪽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혼자 다닐 때도 유독 인기척이 없었네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정찰하러 갔던 데니스가 돌아왔다.

“저 앞으로 가면 삼거리가 있거든. 그쪽 검은 안개 너머에서 다수의 기척이 있어. 전투 중이더라.”

그 말에 파티가 잠시 대기했다.

미궁의 불문율인 ‘타인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상대가 전투 중일 때는 특히 주의해야 했다.

이럴 때 가까이 가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이 날아왔다.

폭음과 총성이 점점 잦아들다가 완전히 사라지자, 파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니스의 말이 제동을 걸었다.

“잠깐, 무언가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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