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장(4)
전투 상대가 사람이냐, 아니면 오토마톤이냐에 따라 대응법이 확연히 달라진다.
오토마톤은 탐험가를 보면 미친 황소처럼 돌진해대니, 그 점을 이용해서 약점을 찌르면 편하지만, 사람은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강함은 크게 다를 바 없더라도 사고할 수 있다는 장점 하나만으로 난이도가 확 뒤바뀐다.
우선, 육체 계열 초인이 드문 미궁 저층에서는 총과 에비 등 원거리 화력전이 가능한 장비를 선호했다.
거리를 벌리고 공격을 퍼부어대니, 화력이 부족한 무리의 경우에는 속절없이 밀리기 마련이었다. 밀리다가 방어막이 깨지면 일방적인 학살이 기다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커지자, 앨런은 부서진 방어막 생성기에 손을 뻗으며 수레 뒤로 몸을 숨겼다. 그것도 모자라서 표범을 앞에 세우기도 했다.
‘도대체 누구지?’
생각하면서도 룬펜을 쥔 손은 쉴새 없이 움직였다. [강화]와 [경화]의 룬문자가 빼곡히 적히며, 폭발로 지워졌던 표범 특유의 무늬가 다시 나타났다.
데니스 역시 자신들의 수레를 세우고 뒤에서 몸을 웅크렸다. 붉게 칠해진 벽을 잠시 안타깝게 쳐다봤지만, 지금 다급한 문제는 다가오는 무리였다.
선한 사람은 오지 않고, 오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미궁보다 이 글귀가 잘 어울리는 장소는 드물었다. 분명 오토마톤과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왜 이쪽으로 오겠는가.
검은 안개를 주시하던 데니스의 눈이 앨런 쪽으로 잠깐 움직였다.
“아까 그놈들이겠지?”
“높은 확률···. 아니, 분명 그들일 겁니다.”
저들은 오토마톤, 그것도 10층의 수문장을 소환하는 호루라기를 지녔다. 그걸 목격한 탐험가 파티를 살려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상한 점도 한둘이 아니었다. 먼저 검은 기류에 감싸진 수문장의 모습이 첫째요, 48시간이 되려면 10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나타난 현상이 둘째였다.
대충 표범의 수복을 마친 앨런은 방어막 생성기로 손을 뻗었다. 시간이 없기에 공구 벨트에서 펜치를 꺼내서 겉을 단숨에 뜯어냈다.
“고쳐보려고? 그래도 되는 거야?”
“방금 부순 건 껍데기의 기능 말고는 없습니다. 진짜는 마력회로와 영혼석 등의 부품이죠.”
긴급 수리를 진행하는 동안, 전위 중 하나가 카크다의 에비를 빼서 머리에 썼다. 에비 자체가 마법을 펼쳐주는 마도구라서 누가 사용하든지 상관없었다.
발현속도에서 현격한 차이가 생길 테지만, 지금은 자잘한 불편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발소리가 뚜렷해질수록 데니스의 호흡도 깊어졌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선제공격하지 않고 대기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헤드렌턴이 선두에 선 스킨헤드의 머리를 비추자 유달리 밝게 빛났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빛을 피해서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강화한 수문장에게서 살아남아? 이거 예상 밖인데.”
목소리에서 여유가 흘러넘쳤다. 육각형이 촘촘하게 얽힌 방어막이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스킨헤드는 휘파람을 불며 이쪽을 살펴봤다. 방어막 대신 수레를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징그럽게 웃더니, 뒤를 보고는 손가락질했다.
“이야, 그래피티가 아주 예쁘게 됐네. 검붉은 색이 아주 인상적이야. 스프레이 페인트가 어디 회사 물건인지 알려주겠어?”
놈을 따르는 무리가 악의적인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총구를 내리지 않았고, 마법사용자들이 착용한 에비에서도 불이 번쩍거렸다.
그에 반해 앨런 쪽은 침묵을 고수했다. 방어막 생성기를 임시로 고친 앨런은 정면을 보는 척하며 지팡이로 데니스를 살짝 건드렸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데니스의 고개가 살짝 움직이는 순간, 앨런은 방어막 생성기의 버튼을 눌렀다.
반구형의 보호장이 빠르게 나타났다. 저쪽의 것과 비교하면, 색이 흐리고 육각형 격자도 촘촘하지 않았다.
앨런은 방어막이 펼쳐지는 즉시, 만지작거리던 카드를 앞으로 던졌다. 세 장의 카드가 핑그르르 날아가며 작은 불씨를 피웠다.
어차피 놈들은 이쪽을 살려줄 생각이 없고, 설령 포로로 잡는다고 해도 좋은 결말은 기대하면 안 됐다.
그러니 최선의 해결책은 선제공격. 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발로 걸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카드의 불씨가 갑자기 커지며 넓게 퍼졌다. [화염]과 [바람]이 융합된 카드에서 시작된 불꽃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넓게 퍼졌다.
방어막을 녹여버릴 정도는 아니라도 적들의 시야를 차단할 수준은 되었다.
“모이세요.”
앨런의 부름에 전위 둘이 수문장의 몸뚱이를 방패처럼 세웠다. 룬펜은 외장갑의 내부에서 신속하게 미끄러졌다.
[강화][강화][강화]···.
엄청난 속도였다. 대충 그리는 것 같은데도 미약한 빛을 머금으며 제대로 작동하니, 일행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쏟아지는 충격에 방어막이 출렁거렸다. 적들은 불꽃이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원거리 공격을 시도했다.
어차피 미로의 통로는 일자니 대충 쏘면 맞겠다는 심산이었고,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급히 살린 방어막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깨진 조각들이 반짝이며 허공에 녹아버렸고, 스킨헤드는 자신의 멀쩡한 방어막 안에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빗발치는 총탄과 마법의 향연에서 일단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수문장과 수레로 만든 방패에서 한 걸음이라도 벗어났다가는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 사실을 잘 아는 데니스는 입술을 피가 나올 정도로 깨물었다. 어떤 결심을 끝낸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미끼가 될게. 그동안 너희는 뒤쪽 통로로 도망···.”
“참으세요.”
앨런의 차분한 목소리가 비장한 말을 끊어냈다.
데니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반발심보다는 능력이 모자라서 참아야 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주먹을 부르르 떤 데니스는 앨런을 쳐다봤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려고?”
“···.”
앨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쪽 눈으로는 정면을 주시했고, 표범의 몸통으로 들어간 오른손은 마력로를 움켜쥐고 있었다.
“기회가 올 겁니다. 분명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잔잔한 어조와 흔들림 없는 표정은 일행에게 믿음을 줬다. 데니스도 별말 하지 않고 방패에 마력을 보탰다.
앨런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있었다. 자신의 눈과 표범에게 부착한 수문장의 외눈이었다.
이번에 지상으로 올라가면 부족한 부분을 확실히 보충할 생각이었는데 벌써 무리하게 시도할 줄은 몰랐다.
일단 광선을 쏘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외눈은 탐욕스럽게 마력을 집어삼켰고, 예열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두두두!
“크으윽!”
적의 마법에 의해 이쪽의 마력이 벗겨지고, 간편하고 위력적인 탄환이 방패의 약한 부위를 뚫기 시작했다.
총알에 허벅지가 꿰뚫린 사람은 이를 악물며 전투자극제가 들어있는 주사를 심장 근처에 꽂았다. 미궁탐험가에 걸맞은 정신력이었다.
방패에는 점점 구멍이 생겼고, 안쪽에 있는 앨런이 적을 볼 수 있는 시야도 넓어졌다.
왼쪽 눈에 마력이 몰려들었다. 몸이 그만하라고 비명을 지르고, 눈꺼풀도 제멋대로 닫히려 하는데도 버텼다.
해킹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오토마톤은 마법저항력이 약해서 바로 됐는데, 역시 기업들이 만든 매직웨어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성공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앨런은 그 방법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다.
왼쪽 눈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앨런은 자유로운 손으로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벌렸다.
왼쪽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눈가의 핏줄이 터진 것일 뿐, 해킹을 시도하는 안구에는 이상이 없었다.
데니스를 비롯한 전위들도 흠칫 놀랄만한 빛이 앨런의 안구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앨런의 눈은 무수히 많은 은하수를 관측했다. 전부 적들이 사용하는 마도구에 담긴 영혼석이었다.
스킨헤드는 팔짱을 끼고 방해자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즐겁게 관람했다.
“금방 끝나겠는데. 너무 싱겁잖아.”
“수문장을 상대하고도 멀쩡할 리가 없죠. 그런데 대장.”
“말해?”
“호루라기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닥쳐. 죽기 싫으면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 다른 새끼들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이상함을 느낀 스킨헤드는 말을 멈췄다. 적들을 공격하던 부하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들이 방패로 세운 수문장의 몸뚱이는 이미 너덜너덜했다. 조금만 공격을 가하면 되는데 왜 멈춘단 말인가.
스킨헤드는 부하들을 향해 버럭 성을 냈다.
“뭐 하는 짓거리야? 누가 멈추래?”
“대장. 팔이 안 움직입니다.”
두 팔을 의수로 대체한 부하는 팔을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다리가 말을 안 듣습니다.”
다른 부하는 주저앉아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 모습에 스킨헤드가 정면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해커가 있어?”
해커는 두 종류로 나뉜다. 마법을 연마해서 능력을 손에 넣은 마법사, 특별한 장치를 이용해서 능력을 빌려오는 자.
적 중에 진짜배기 마법사가 있을 리는 없었다. 현대에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진짜 중의 진짜라 녹아내리는 건 자신들이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특별한 장치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진짜 해킹이었다면 부하들의 매직웨어를 지배해서 상잔시켰을 터.
혼란한 와중에도 스킨헤드는 상황을 살폈다. 잠깐 오작동을 일으켰던 부하들의 매직웨어는 다시 작동을 시작했고, 적들의 방패 아래로는 시뻘건 물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뇌와 연결된 매직웨어는 못 건드는 것 같군. 멀쩡한 놈들은 따라와.”
스킨헤드가 지목한 부하들은 팔다리를 교체하지 않았기에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은 역장 방패를 펼치고 천천히 전진했다.
적이 숨겨놓은 비장의 한 수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해결됐다.
“잠깐 오작동 일으키는 건 수법이라고 하기도 부끄럽지.”
“맞습니다.”
뇌를 익히거나, 매직웨어로 폭발을 일으키는 해킹에 비하면 귀여운 정도였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적들이 방패를 옆으로 슬그머니 치우자 스킨헤드가 외쳤다.
“항복하려면 처음부터···.”
항복이 아니었다. 방패가 사라진 장소에는 고양이과 맹수를 닮은 오토마톤이 있었다.
오토마톤이 입을 쩍 벌렸다. 목구멍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수문장의 외눈이 존재했다. 조리개가 확 열리는 순간 빛이 번쩍였다.
붉은빛은 스킨헤드의 최후였다.
쿵 소리를 내며 표범이 주저앉았다. 힘이 빠진 앨런도 주저앉으려다가 아직 남은 적을 보며 수레를 잡고 버텼다.
마력을 몽땅 사용하니 오히려 개운했지만, 그러한 감상은 짧았다. 메마른 강이 범람하듯이 마나하트와 마력회로에서 튀어나온 물이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난폭한 움직임이라 미약한 통증이 뒤따랐다.
앨런은 정면을 응시했다. 붉은 광선이 적들을 단숨에 쓸어버렸고, 그나마 살아남은 적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양 떼 속으로 데니스가 뛰어들자, 아직도 다리가 이상한 양들은 늑대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금방 정리를 끝낸 데니스는 광선에서도 멀쩡한 호루라기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검은 안개로 빚어낸 모양새더니, 지금은 뼈를 깎아 만든 것처럼 하얗고 꺼끌꺼끌하기만 했다.
앨런은 흥미가 솟았음에도 일단 앞에 누운 전위의 응급치료에 집중했다. 지혈초의 씨앗을 상처에 뿌리자 넝쿨이 출혈을 막았다.
“괜찮아?”
“장기는 멀쩡한 것 같아요. 문제는 카크다죠. 그리고···.”
앨런의 시선이 붉게 칠해진 벽으로 향했다. 신원을 증명할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저 흔적도 앨런이 떠나면 곧 사라지겠지.
“처음부터 광선을 쐈으면 두 분이 살았을까요?”
“결과는 비슷했을 거야. 수문장은 얼음창에 의해 전투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자마자 망치를 던졌어. 광선으로 몸이 망가졌어도 마찬가지겠지. 아니면 광선을 쏘기 전에 흘러나오는 강한 마력을 감지해서 바로 너한테 던졌거나.”
미궁 탐험은 위험한 일이다. 죽음은 불쑥 찾아오며, 그럴 때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데니스는 그 사실을 잘았고, 앨런은 책임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세주였다.
데니스는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리고, 그나마 멀쩡한 시체들을 수레에 실었다. 사로잡은 포로들은 묶인 채 질질 끌려왔다.
상승하는 도중에도 오토마톤을 만났지만, 수문장과 구더기들을 처리한 경험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굉장히 쉬웠다.
앨런은 오토마톤을 최대한 멀쩡하게 사로잡아서 수레를 끌게 했다. 그래도 3층에 도착하기까지 하루가 걸렸다.
1~3층은 여전히 탐험가들이 많았다. 그들은 앨런 일행의 모습과 질질 끌려오는 포로들을 보고도 문제 삼지 않았다.
“저거 뭐냐?”
“한 판 붙었나 보네. 신경 끄고 맨홀이나 감시해.”
숲에 있는 나무를 보는듯했다. 너무 익숙해서 신기하지도 않거나, 아니면 관심을 쏟아서 낭비할 칼로리도 아깝거나.
미궁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전위들은 카크다를 챙겨서 응급진료소로 향했고, 앨런과 데니스는 포로와 시체를 챙겨서 방위군을 방문했다.
“미궁 내 범죄는 우리 소관이 아닌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경찰서에 방문하세요. 요새 반대편에 있으니 좀만 걸으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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