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루라기(2)
하얀 블라인드 너머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얄팍한 모양새를 보니 엘프 감정사가 분명했다.
앨런은 계속 창문을 주시했고, 마침내 블라인드를 살짝 걷어낸 감정사와 눈이 마주쳤다.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자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블라인드를 아예 걷고 아래를 구경했다.
‘감정사가 요원을 불렀나? 어째서?’
정황상 감정사 말고는 없었다. 심지어 오크 요원은 데니스가 호루라기를 내던지려 하자 막아섰다.
앨런은 감정사와의 무의미한 눈싸움을 중지하고 요원을 쳐다봤다. 시온과 똑같은 옷을 입은 오크는 언뜻 보기에도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데니스는 붙잡힌 손목이 꽤 아팠는지, 인상을 쓰며 오크를 노려봤다.
“당신이 누군지는 알겠는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왜 그러는 겁니까?”
“그전에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주겠나?”
오크의 물음은 통보에 가까웠다. 말을 마치자마자 위를 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저기 있군.”
오크의 시선은 건물 사이, 배관이 복잡하게 얽힌 장소에 멈췄다. 거기에 앉아있는 참새 형태의 골렘이 목적이었다.
참새를 응시하는 오크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30초 정도 지나자, 용의자인 앨런과 데니스를 감시하던 참새 두 마리가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방향으로 판단컨대 미궁의 문 옆에 있는 경찰서. 그러니 오크는 그 짧은 시간에 경찰과 대화를 마친 것이다.
데니스는 그 장면에 압도된 듯했다. 메이즈시티에 존재하는 권력의 단면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이상하진 않았다.
앨런은 그의 팔을 툭툭 두드리고, 이제는 아예 차까지 가져와서 마시는 감정사를 가리켰다.
“저건 무슨···.”
정신을 차린 데니스는 감정사와 오크를 번갈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호루라기가 필요해서? 지금 같은 소속이라고 짜고 거짓말을 한 겁니까?”
“그랬으면 적당한 가격에 구매했겠지. 흠, 눈동자에 두려움이 보이는군.”
“···.”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쪽이 생각하는 일이었다면 더 비밀스럽게 처리했겠지. 뭐, 지금도 그렇긴 하다만.”
앨런은 그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서 있는 장소는 감정소 근처. 당연히 탐험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건물이라, 꽤 많은 눈이 이쪽을 봐야 정상이지만.
‘아무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아.’
감정사 말고는 목격자가 없었다.
“인식방해 마법입니까? 굉장히 강력하군요.”
앨런의 말에 오크가 품을 두드렸다. 그런 작용을 하는 마도구가 그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감정사는 왜 요원에게 연락한 겁니까?”
“단도직입적이군. 그리고 요원이라는 별명도 괜찮군. 일단 속인 건 아니다. 호루라기에는 아무런 능력도 남아 있지 않고, 저분은 우리의 부탁대로 소식을 전했을 뿐이니 너무 책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한 오크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할까? 내 이름은 프랑수아. 그쪽 둘은 알고 있으니 소개할 필요 없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일단 상대는 정중했고, 다른 방법이 필요하면 번거롭게 나타날 필요가 없었다.
총알도 튕겨내는 시온과 비슷한 실력이라면, 앨런과 데니스가 혼자 있을 때 처리하면 됐으니까.
“좋습니다.”
수락하니 인식방해 마법으로 추정되는 마력의 막이 한층 짙어졌다.
프랑수아를 따라 좁은 길을 나가니, 시온과 함께 탔던 항공 차량이 착륙한 건물이 보였다.
브레이커의 본사를 지나고, 뒤에 마련된 공원을 통과해서 멈춘 곳에는 10층 건물이 있었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 데니스가 프랑수아를 불러세웠다.
“잠시 통화 좀 하겠습니다. 동료에게서 온 통신이라서···.”
프랑수아는 제지하지 않았고, 데니스도 멈출 생각은 없었는지 바로 대화를 시작했다.
“카크다는 어떻게 됐어? 입원? 증상은···. 아···. 우리는 지금 브레이커의 직원과 이야기 중이야. ···알았어, 이만 끊을게. ···갑시다.”
감시카메라가 머리를 쭉 빼서 프랑수아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더니 문을 열어줬다. 건물의 크기치고는 내부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프랑수아는 앨런과 데니스를 1층 구석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응접실 역할을 하는지 한쪽 벽에 투명 냉장고와 각종 다과가 있었다.
“고문실이라도 끌고 올 줄 알았나? 원하는 음식이 있으면 마음껏 가져오면 된다.”
“저는 입맛이 없어서···.”
“잠깐만요.”
앨런은 빵을 몇 개 집어왔다. 가난을 겪어보니 거절은 사치였다. 게다가 합성 식품도 아니고 천연원료를 사용한 빵이었다.
저급한 광고로 시선을 끌거나, 뭘 넣었는지 모를 싸구려 음식이 아니었다. 앨런이 처음 보는 브랜드였는데, 아마도 특별한 손님만 취급하는 기업 같았다.
앨런이 자리에 앉자 프랑수아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호루라기를 구매하고 싶군.”
“왜죠? 빈 깡통이 맞다면서 필요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속이고 빼앗는 건 우리의 신조가 아니니 설명을 좀 해주지. 대신···.”
프랑수아는 책상 밑을 뒤적이더니 종이 두 장을 꺼냈다. 비밀유지서약서였다.
앨런과 데니스는 필요한 부분을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마력을 흡수하는 특수 재질만 남겨놨다. 그곳에 손도장을 찍기 전에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프랑수아는 코를 긁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수집가가 누군지는 알겠지?”
“왜 그 이름이 나옵니까?”
“···.”
데니스와 달리 앨런은 눈만 깜빡거렸다. 프랑수아가 그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삼라만상이 안 되는 동네에서 왔나?”
“듣자 하니 범죄자 같은데 그쪽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앨런은 마법공학이나 마력과다증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앨런의 삼라만상 검색 페이지에 ‘수집’까지 작성하면 수집가가 아니라 ‘수집한 영혼석 보관 방법’이 자동 완성될 정도니까.
“잠깐 설명이 필요하겠군.”
코를 찡긋거린 프랑수아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수집가는 악명이 자자한 흑마법사지. 그의 힘은 진짜라서 나라 간의 전쟁에 고용되거나, 음지의 부호 혹은 대기업들이 일을 맡기기도 해.”
“대기업도 고용한다고요?”
“그들이 그랬다는 증거는 없지만, 사고가 터지고 나면 이익을 얻는 기업이 있어서 그렇게 추론할 뿐이다.”
프랑수아는 애매하게 답변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온갖 마법적인 수단으로 물증을 조작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어떨 때는 심증이 강력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초인들의 의심은 꽤 잘 맞기도 했고.
데니스가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지금 비리가 중요합니까? 말을 들어보니 수집가와 우리가 얽혔다는 내용 같은데···.”
“수집가가 뿌린 물건 중에 그 호루라기가 있을 뿐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놈이 메이즈시티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아는데,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지. 분명 은신처는 미궁일 테고.”
“그럼 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탐험가들의 진입을 막아야죠.”
“패권국인 솔도스 연방이 메이즈시티에 자치 권한을 줄 정도로 미궁은 거대한 흐름이다. 그런데 막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프랑수아의 단호한 대답에 데니스는 입을 오물거렸다.
그와 별개로 앨런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미궁 탐험이 멈추면 그곳에서의 자원 수집이 멈추게 되고. 수급하는 자재, 특히 마정석과 영혼석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앨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데니스를 쳐다봤다.
자신은 랑카와 노박 클리닉의 가혹한 노동 환경을 겪었기에 생각이 다른 것이다. 어차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니.
잠시 머뭇거리던 데니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수집가는···.”
“극악무도한 흑마법사지. 굉장히 위험하고, 매우 강하긴 하다만···.”
프랑수아는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기에 수집가의 무력을 깎아내리진 않았다.
“수집가 하나 견제하겠다고 미궁을 막을 수는 없지. 브레이커에 그럴 힘도 없고.”
“시청이나 대기업들은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
앨런의 말에 프랑수아가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 사이 앨런은 머릿속에서 생각을 조합했다. 브레이커가 왜 수집가의 물건을 찾고 있을까. 분명 겪었던 사건과 비슷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겠지.
“수집가가 만든 물건을 모아서 마법이나 주술로 그의 위치를 찾으려는 생각입니까? 최종적으로는 척살하거나 미궁 밖으로 쫓아내려 하겠군요.”
“혹시 누가 말해줬나? 아까는 수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듯 행동하더니···.”
오크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인공 안구가 작동하는 현상이었다.
“앨런. 베가의 국경을 넘어왔으리라 추정. 출신지 불명. 배경이 좀 수상한데···.”
정보를 훑어보는지 눈이 계속 빛났다. 그러다가 앨런을 한동안 주시했다. 굳었던 표정도 살짝 풀어졌다.
“이 애가 감은 좋지. 불법체류자가 한두 명도 아니고, 하층 노동자 대부분이 그런 부류니 나도 딱히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기회의 땅이라는 환상에 홀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특히 메이즈시티는 그 정도가 심했는데, 덕분에 사람이 오토마톤보다 쌌다.
프랑수아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압박감이 사라졌다.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라도 있습니까?”
“내 생각이니 내 마음이지 않을까?”
왜 갑자기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혼자만 알고 있으니 궁금하긴 했다.
어쨌든 거래는 진행되었고, 데니스가 나섰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욕심부리지 마라. 대신에 보상은 섭섭지 않게 처리해줄 테니 받고 입이나 다물면 된다.”
“동료의 마나하트가 다쳐서 치료비가 많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데니스의 진심 어린 말에 프랑수아가 굳은 표정을 풀었다.
“돈에 눈이 먼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군. 그 점은 사과하지. 앞으로는 말을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 오해할 뻔했잖나. 어디 병원에 입원했지?”
“넘치는사랑병원입니다. 환자의 이름은 카크다입니다.”
만물의 어머니를 모시는 종교인들이 설립한 상급종합병원인 통칭 ‘사랑병원’은 살인적인 병원비를 자랑하는 솔도스 연방에서 가장 양심적인 가격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다고 무시는 금물이었다. 그들은 타고난 치료술사기에 병원은 문전성시였다.
웬만한 질병이 아니고서는 입원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수용할 공간이 모자라서.
의사들의 마력을 옛날에는 신이 내려주는 기적이라며 신성력이라 칭했지만, 지금은 그들 특유의 수련법으로 마력의 성질을 변형했다고 판명 난 지 오래였다.
그래도 그들 앞에서는 신성력이라고 칭하는 편이 좋았다. 괜히 신실하게 활동하는 의료진의 마음을 긁을 필요는 없으니까.
“이번에는 안다는 얼굴이군,”
“검색하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마력과다증의 해결책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머리에 담아둔 내용이었다.
앨런이 뭐 하는 인간인가 하고 쳐다보던 프랑수아의 눈이 빛났다. 통화 내용을 알려주기 싫은지 아예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카크다, 리자드맨. 마나하트가 살짝 깨졌군. 치료비는 1억 5천. 좋아, 그 정도는 내주지.”
데니스는 프랑수아가 부르는 금액이 최대치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앨런을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같은 파티원들은 알고 지낸 기간이 길고 부상에 대해 어느 정도 보태는 게 맞지만, 앨런은 함께한 시간을 전부 더하면 일주일도 안 됐다.
앨런은 데니스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카크다가 얼른 건강해졌으면 좋겠네요.”
“고마워······. 어떻게든 갚을게.”
훈훈한 분위기 속, 앨런은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프랑수아가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으니까. 혈육도 아닌데 자신의 몫을 양보하는 사람이 있다니. 사람이 너무 좋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면 바보거나.”
“···.”
“조롱이 아니라 충고다. 제 몫을 주장하지 않으면 호구로 보거나 머저리로 평가하는 게 보통이야. 그렇기에 너희 같은 부류는 찾기 힘들지.”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강단은 좋군.”
데니스가 병원 문제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앨런은 경찰서에 갔던 문제를 꺼냈다.
“로만 컴퍼니도 관련이 있을까요?”
“작은 이슈로 단번에 무너트리기엔 너무 커. 탐험가 등록을 아무나 받아주는 만큼 고객도 많지.”
“쓰다 버릴 패로 삼기 좋겠군요.”
프랑수아는 앨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들은 벌써 꼬리 자르기를 시작했겠지. 생김새를 전송해 주겠나?”
“뇌 확장 시술을 안 받아서···.”
“마법공학자라며? 뇌 확장 시술 없이 연산과 제어가 감당되나?”
프랑수아의 의심이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도중, 통화를 마친 데니스가 적들의 정보를 전달했다.
“이렇게 생긴 놈들이군.”
잠깐 시간이 흐르고, 프랑수아의 안광이 허공에 넓게 퍼졌다. 수배 전단지가 줄줄이 떠올랐다. 앨런과 데니스 일행이 해치웠던 놈들이었다.
“벌써 수배지를 만들었군. 이들의 현상금을 모두 합치면 1500만 코인을 살짝 넘는 정도고.”
“네가 가져.”
“파티원들은요?”
“그건 내가 알아서 잘 말할게. 그 친구들도 흔쾌히 수락할 거야.”
프랑수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손뼉을 약하게 세 번 쳤다.
“윈윈이군. 보기 드문 훈훈한 광경이긴 한데, 슬슬 마무리하지.”
서약서에 손바닥을 올린 앨런은 마력을 흘러 넣었다. 마력이 흘러간 길이 마친 거미줄처럼 특정 부분에 남았다.
“유지 기간이 고작 한 달인데 이렇게 짧아도 됩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
앨런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창고를 대여했다. 말만 창고고 내부는 개조가 되어있어서 숙소의 기능도 있었다. 그야말로 원룸이자 작업실이었다.
무거워서 작업대 아래에 놓은 표범을 수리 및 개선했다. 강화외골격의 성능도 향상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신경 쓴 부분은 바로 눈.
지금은 해킹 능력이 미약해서 적의 매직웨어에 잠시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멈추게 할 뿐이지만, 앨런은 영혼석에 간섭하는 재주인 만큼 활용 영역과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흐르고, 프랑수아와 만난 지 보름이 지날 무렵.
삼라만상에 접속한 앨런은 브레이커의 홈페이지에서 특이한 공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11~20층에 해당하는 동굴의 대규모 원정에 관심 있는 신청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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