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41화 (41/193)

동굴(3)

미궁의 재밌는 점은 언제 내려가든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입인 미로에서도 앨런이 만났던 기사나 검은 수문장 같은 신기한 발견이 이어졌다.

또한,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도 있는데, 그건 바로 사람의 몸은 의외로 튼튼하며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헥스테크 탐험대와 마주친 후, 프랑수아는 공격적인 기세로 하강했다. 다섯씩 두 조로 나눠서 차례대로 전투 훈련을 시켰다.

좀 위험하다 싶은 숫자가 등장하면 프랑수아가 손을 써서 적당하게 줄이고, 생명이 위협을 받으면 나서주니 일단 죽을 위험은 없었다.

현재 앨런이 있는 곳은 지하 13층의 공터. 6조의 조원들이 시체 같은 얼굴로 끙끙 앓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새는 것 같아. 이러다가 죽겠어.”

키키는 수레에 올라탈 힘도 없는지 공터 바닥에 그냥 널브러졌다. 이곳은 울퉁불퉁한 돌바닥임에도 일단 누웠다는 행위 자체에 만족하는 듯했다.

“출혈은 없는데, 팔꿈치 관절에서 윤활유가 스며 나오고 있긴 합니다.”

“뭐? 고쳐줘···.”

앨런이 고개를 저으니 키키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낑낑댔다.

“설마 우리 사이에 수리비를 요구하는 거야? 내가 너 힘내라고 특제 수프도 해줬는데.”

“그건 수프가 아니라 그냥 잡탕 죽 아닙니까? 그리고 유출은 내부 부품의 마모가 문제라서 교체하기 전에는 계속 흘러나올 겁니다. 큰 문제도 아니니 지상으로 복귀할 때까지는 괜찮겠죠.”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믿어야지.”

키키는 그대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피곤해서 목을 움직일 힘도 모자랐던 탓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공 안구는 앨런을 계속 관찰했다. 분명 고단할 텐데도 영혼석의 별문자를 만지고, 조원들의 수리 부탁도 들어주고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개조한 티가 나는 오토마톤을 끌고 다니기에 자금의 힘으로 미궁을 내려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마나소드 출력이 갑자기 이상해졌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까?”

“잠시만요. ······. 혹시 손잡이 부분으로 타격한 적 있습니까?”

“어떻게 알았어?”

“그쪽에 마나팩과 마력회로가 밀집되어 있는데 찌그러져 있어서요. 펴 주면 되니, 이 자리에서 충분히 고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문제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해결하지 않는가. 저기 엎드린 표범도 순수히 자신의 실력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표범은 전투력보다 전투지능이 놀라웠다. 보통의 오토마톤은 단순한 별문자 구조를 지녔기에,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을 믿고 돌진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런데 앨런이 만든 표범은 외장갑을 [강화]와 [경화]로 도배했음에도, 진짜 맹수처럼 유연하게 적의 공격을 피하고, 은밀하게 기습을 가했다.

저 살벌한 드릴 송곳니에 경동맥과 목뼈가 동시에 꿰뚫린 지하인의 수는 열을 넘은 지 오래였다.

키키는 조심스럽게 관찰한다고 했지만,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우연인지 표범의 시각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목덜미에 서늘함을 느낀 키키는 바닥을 기어서 앨런의 옆으로 움직였다. 표범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뭐 하세요?”

“여기 난로가 따뜻해서.”

“난로는 꺼져있습니다.”

“···.”

키키는 말없이 회전식 스위치로 손을 뻗었다. 난로에 적용되는 룬문자는 [발열]. 스위치를 많이 돌릴수록 룬문자에 들어가는 마력량이 많아지고, 그에 비례해서 온도도 상승했다.

훈훈한 기운이 밀려드니 차가운 돌바닥도 돌침대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찰나.

“일어나세요.”

앨런이 키키를 흔들었다.

“왜···. 제발 가만히 놔둬. 5분만···.”

앨런은 키키의 투정에도 팔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터로 들어오는 통로 중 하나를 주시했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수아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암흑을.

‘아무 이유 없이 저러진 않겠지.’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던 프랑수아가 심심해서 통로를 관찰할 리는 없었다.

앨런의 예상이 맞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 암흑 속에서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굽이 단단한 신발이 돌과 마찰하면 저런 소리를 발생시키리라.

마침내 검은 안개 속에서 수척한 인상의 탐험가 다섯이 나타났다. 그들의 장비에는 전투의 흔적이 역력했다. 특히 등에 많았다.

“멈춰라.”

프랑수아의 굵은 목소리가 맹수의 으르렁거림처럼 퍼져나갔다. 앨런의 몸도 잠시 굳을 정도니, 그 대상이 된 탐험가들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입술마저 못 움직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난 프랑수아가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이 공터는 우리가 선점했다. 그걸 알고도 다가오는 이유가 뭐지?”

“저, 저도 이번 원정의 참가자입니다.”

“···.”

“집결지에서 얼굴을 본 기억이 있어서···. 아, 저는 15조입니다.”

프랑수아는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부조장들에게 물었다.

“15조면 가말이 담당자 맞지?”

“맞습니다. 우리보다 늦게 진입했지만, 시간을 따지면 같은 층에 있어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얼굴 확인했습니다. 15조 참가자와 일치합니다.”

부조장이 단말기 화면을 프랑수아에게 보여줬다. 그는 화면과 부상자들을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는 우리 조원들 한곳에 모으고, 너는 구급상자에서 회복약 꺼내서 치료해줘.”

명령을 마친 프랑수아는 부상자들을 공터 구석에 모았다. 소리를 차단했는지 입은 쉴새 없이 움직이는데 안쪽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앨런은 부조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그쪽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다른 조의 갑작스러운 등장, 그것도 부상 상태로 나타나서 충격이 컸는지 조원들의 잠기운은 멀리 달아났다. 그들은 부조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일단 조장님이 조사하고 있어서 내가 함부로 말을 하긴 어렵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정론이었다. 상급자가 멀쩡히 있는데 하급자가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

조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앨런의 왼쪽 눈은 시야를 확대해서 프랑수아와 부상자들을 지켜봤다.

목소리를 듣진 못해도 입 모양을 보면 대충 무슨 단어를 사용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부상, 지하인, 요새, 증원···.’

정확하진 않아도 몇몇 단어는 알아낼 수 있었다.

‘요새를 발견했는데 지원 병력이 많이 들이닥쳐서 흩어졌다는 뜻인가?’

동굴에는 앨런과 조원들이 쉬는 공터가 여럿 있었고, 개중에는 지하인들이 요새처럼 꾸며놓은 장소도 있었다.

요새라고 표현을 했지만, 미궁의 문을 감싼 거대한 녀석이 아니라 좀 커다란 검문소나 작은 방어기지 정도로 생각하면 됐다.

지금 앨런이 있는 공터도 방어기지였던 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하인들은 탐험가들의 마도구를 사용할 정도로 지능이 높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예 지하에 사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야 했다.

의외의 상황에 각성 상태가 되었던 뇌가 다시 고단함을 호소하려는 순간, 대화를 마친 프랑수아가 조원들 앞에 나타났다.

“다른 조에 문제가 생겨서 뿔뿔이 흩어진 것 같군. 우리는 그쪽으로 움직여야겠다.”

“우리만 갑니까?”

“근처에 다른 조도 있을 테니 함께 간다.”

부상자 중 가장 멀쩡한 사람은 프랑수아와 함께 선두에서 걸었고, 거동이 불편한 탐험가는 수레 신세를 졌다. 표범이 끄는 앨런의 수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드워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머리를 다쳤는지, 아니면 붕대가 턱을 압박해서 그러는지 말을 더듬었다.

“고, 고맙다.”

“천만에요. 전 앨런입니다.”

“나? 나는···. 윽!”

갑자기 드워프가 머리를 붙잡았다.

“기, 기억이 안 나···.”

“이 아저씨 완전히 맛이 갔는데.”

“···.”

“아니,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내가 말실수했네.”

앨런이 노려본 적은 없었다. 평소처럼 무심히 쳐다봤을 뿐인데, 내심 켕기는 게 있는 키키가 지레짐작했다.

스패너를 들고 있던 키키가 수레에 내려놓더니 드워프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여기 뒤통수 보이지?”

“그쪽을 다치면서 매직웨어도 망가졌군요.”

“뇌 확장 시술을 하면 매직웨어와 뇌를 연결하잖아. 아무래도 고장의 충격이 뇌까지 덮친 모양이야. 기억상실 비슷한 문제긴 한데 매직웨어를 갈아 끼우면 회복하겠지.”

미궁에서는 고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2차 감염의 위험성도 있었다.

드워프는 이름을 잊었을 뿐, 다른 대화는 가능했다.

“가, 갑짜기 놈들이 나타나써. 수가 너무 마나서 버티지 모태써.”

“오버플로인가?”

“그게 마즐걸. 내 생가게 지원은 아니어써.”

키키의 질문에 드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버플로는 미궁의 괴물들이 갑자기 많이 튀어나오는 현상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금방 흩어지지만, 하필 그곳에 탐험가가 있었다면 재앙을 맞닥트린 것과 똑같았다.

“배고푼데 혹시 머글거 좀···.”

“인심 썼다. 천천히 꼭꼭 씹어 드셔.”

키키가 비스킷을 드워프의 입에 물려줬다. 영양소만 뭉쳐 만든 에너지바로 진짜 비스킷도 아니었다.

“아픈 사람한테 그런 음식을 줘도 됩니까?”

“오히려 부상자니까 필수 영양소가 잔뜩 들어있는 음식을 먹어야지. 병원 밥을 떠올려봐.”

“···.”

“그치? 내 말 맞지?”

드워프는 어찌나 배가 고팠는지 키키가 건넨 비스킷을 벌써 먹어치웠다. 오히려 모자라다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마시따. 혹시 남으면···.”

“이런 사람은 처음 보네.”

키키는 웃으며 비스킷을 더 건네줬다. 앨런은 저 비스킷을 챙기면서 저걸 맛있다고 하는 탐험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했다.

동굴 바닥은 누가 일부러 길을 낸 것처럼 평평했기에 수레에 탑승한 드워프는 제법 편안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길 몇 시간, 프랑수아의 말대로 다른 조를 만날 수 있었다.

조장인 회색 머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마법봉을 들고 있었는데, 둔기로도 사용하는 물건인지 끝부분이 유독 새빨갰다.

“너도 부상자를 데리고 있었구나?”

“그쪽의 부상자도 혹시 15조인가?”

“맞아. 숫자는 셋.”

“가말이랑 부조장들이 감당하기에도 벅찬 숫자라 했었다.”

“내가 들은 말이랑 똑같네. 그런데 걔 실력에 벅찰 리가 없잖아.”

“조원들을 지키지 못했으니 벅찬 게 맞다.”

“그럼 너는?”

“나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능력이 모자라서겠지. 예외는 없다.”

“엄격하긴.”

그렇게 두 개의 조가 함께 움직였다. 전투 인원은 26명,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34명이라 와글와글했다.

앞길을 막으려던 지하인과 오토마톤은 불쌍할 정도로 빠르게 없어졌다.

그렇게 도착한 방어기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중앙에 떠오른 불빛은 깨끗한 공터의 모습만 비췄다.

지하인의 머리를 몇 개나 깨버린 마법봉을 휘휘 저은 남자가 프랑수아에게 눈짓했다.

“내 말 맞지? 가말이면 벅찰 리가 없다고 했잖아. 정리 끝내고 조원들 찾으러 나섰나 보네.”

“···.”

“그렇게 인상 쓸 필요 있어? 무슨 걱정 하는지는 알겠는데, 회장님도 있고, 헥스테크 애들이 우리보다 앞서 내려갔으니 매를 맞아도 먼저···.”

“그만.”

프랑수아가 쏘아보자 남자가 두 손을 들며 멋쩍게 웃었다.

“알았어. 입 조심할 테니 성질 좀 그만···.”

말을 하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조장 둘이 이야기하는 장소로 부상자들이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부상자의 말은 어눌했다. 그리고 모습도 이상했다. 멀쩡했던 피부가 갑자기 요동치고, 관절도 기이한 각도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앨런의 수레에 앉아있던 드워프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벌린 입에서 갑자기 침이 줄줄 흘러나오고,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앨런은 수집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흑마법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 찾아본 적이 있었다. 하필 지금, ‘시체폭발’이 떠오른 이유는 왜일까.

키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드워프를 붙잡고 있었다.

“키키!”

자신의 부름에도 멍하니 있는 키키를 홱 잡아당긴 앨런은 자신이 개조한 방어막 생성기를 드워프의 몸에 던졌다. 동시에.

콰앙!

폭음이 고막을 울렸다. 부상자였다고 생각한 폭탄 여덟 개가 같이 폭발했다. 화염 대신 붉은 증기가 솟구치고, 쇳조각 대신 뼛조각이 사방을 관통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마법사 조장이 펼쳤으리라 짐작되는 방어막이 모든 탐험가를 개별적으로 감싸고 있었다.

탐험가들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당황하면서도 공터의 벽에 바짝 붙었다. 일단 멀리서 사태를 파악하려는 본능적인 행위였다.

폭심에 서 있던 프랑수아와 남자는 멀쩡했다. 그들의 주위로 살점과 피가 모여들었다.

피 웅덩이에서 고기로 만든 꽃봉오리가 머리를 내밀더니, 곧 활짝 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듣는 행위만으로도 귀에서 고름이 나올 것만 같은, 질척하고 어두운 목소리였다.

프랑수아가 재빨리 다가가서 꽃을 짓밟았다. 그래도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피 웅덩이가 이번에는 얼굴 형상으로 변하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열등한 것들이 의견을 모아봐야 하찮기 짝이 없지.]

“분명 20층에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손을 뻗었지? 층과 층은 마법으로도 간섭할 수 없는데.”

마법사 조장이 앞으로 나섰지만, 웅덩이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지 웃기만 했다.

프랑수아가 마법사를 뒤로 당겼다.

“시간 낭비다.”

[내가 근처에 있다면?]

“그랬으면 벌써 나타났겠지. 입으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프랑수아가 피 웅덩이로 손을 뻗으니 소용돌이가 생기며 수위가 점점 낮아졌다. 웅덩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프랑수아가 물었다.

“우리가 아무 상관없는 탐험가면 어쩌려고 그랬지?”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말을 끝으로 웅덩이는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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