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43화 (43/193)

동굴(5)

미궁의 괴물을 생명체라 할 수 있을까.

놈들도 무언가를 먹고, 체온이 있고, 피를 흘리고, 탐험가의 마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상황에 적응하고, 가만히 놔두면 성장하기도 한다.

미궁이 탄생시키고 거두어가니 생식 능력은 없지만, 그것만 빼면 생물이라 부를 순 있었다. 지하인이라는 지성체도 존재하고.

그러나 마법을 사용해도 말이 통하지 않고, 억지로 생포해서 미궁 밖으로 데려가려고 시도하면, 동굴에서 미로로 발을 디디는 순간에 불명의 이유로 죽어버렸다.

산적한 걸림돌 때문에 수많은 학자가 그들과 대화를 해보려고 미궁으로 내려왔지만, 돌아온 건 살의뿐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미궁탐험가를 적대하며,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이 죽더라도 미궁의 불순물에 이빨을 박아넣으려고 했다.

“크아!”

“빌어먹을. 짐승 새끼도 아니고!”

전위 하나가 마나 피스톨로 자신을 향해 괴성을 지르는 지하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앨런의 집단해킹 덕분에 돌격의 기세는 한풀 꺾였고, 오토마톤 위에 앉아있다가 머리부터 떨어진 지하인은 불우한 결말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다리가 부러지고도 두 팔로 아득바득 기어오는 꼬락서니를 보면, 사람인 이상 저절로 소름이 돋기 마련이었다.

인상을 쓴 전위는 팔뚝을 앞으로 내밀었다. 냄비 뚜껑 크기만 한 방패는 반투명한 마력장을 뿜어내며 지하인의 원거리 공격을 차단했다.

적들의 마력 탄환이 역장 방패를 두드리는 충격이 뼈를 타고 전해졌다. 그래도 전위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오토마톤이 제 발에 걸려서 넘어졌겠는가. 당연히 아군 중의 누군가가 제 능력을 발휘한 것이고, 자신의 방어가 안정적인 능력 방출에 이바지했음을 알고 있었다.

“좋아. 오토마톤이 역으로 걸림돌이 돼서 돌격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지금 최대한 수를 줄여!”

부조장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전위 몇이 품속에서 마나 펄스 수류탄을 꺼냈다. 동굴의 오토마톤은 마법저항력이 상당해서 큰 재미는 못 보겠지만, 마력회로를 망가트려서 출력을 깎을 수는 있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수류탄들이 공중에서 폭발했다. 순간 푸른 정전기가 그물의 형태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앨런의 해킹을 버텨냈던 오토마톤은 추가 공격에 무릎을 꿇었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던 지하인은 말을 듣지 않는 오토마톤에게 성질을 부렸다.

꽃게와 비슷한 오토마톤의 위에 탑승한 지하인이 괴성을 질렀다.

“카키키켜!”

단순한 분노 표출이 아니었다. 탐험가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였다.

괴성 직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지하인을 보면 고함의 의미는 대충 ‘병신들아 자리를 지켜라!’가 될 것이다.

‘아니면 다시 돌진하라고 재촉했던지.’

앨런의 예상이 맞았는지, 오토마톤 기수들은 쓰러진 아군의 틈을 비집고 돌진하거나, 훌쩍 뛰어넘으며 탐험가의 진형으로 내달렸다.

쿵쿵!

전위 하나가 진짜로 골렘의 팔을 부착한 것처럼 굵은 주먹을 맞부딪쳤다. 일단 자신 있게 나섰지만, 통통 튀며 돌진하는 사슴을 보니 의구심이 들었다.

‘막을 수 있나?’

그래도 막아야지 어쩌겠는가. 자신이 뚫리면 뒤에까지 피해가 가고, 기껏 버티는 방어 진형이 엉망이 된다. 그렇게 되면 뒤따르는 결말은 죽음뿐이다.

다소 부상을 감내하더라도 무조건 막아야 했다. 탐험가는 동료를 의심하면 안 됐다. 의지할 사람이 서로밖에 없는 미궁에서는 신뢰가 기본이었다.

사슴은 거리가 좁혀지니 고개를 숙여서 칼날 같은 뿔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처 입은 자에게 고통을 주려는 악의가 잔뜩 담겨 있었다.

“와라! 넘어갈 수 없다!”

그러나 전위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사슴의 앞다리 두 개가 뻣뻣해지더니 자연스럽게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건 우연일까. 기회를 잡은 전위는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주먹을 내리쳐서 사슴의 목에 움푹 팬 상처를 남기고, 낙하의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지하인의 목을 짓밟았다.

지하인의 목이 크게 꺾였다. ‘뿌득!’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리며 사지가 마비됐는데도, 놈은 치아를 딱딱거리며 발목을 노렸다.

노력은 가상하나 될 리가 없었다. 설령 문다 해도 전투화 때문에 아무 소용없었다.

전위는 사커킥으로 놈의 머리를 걷어차고, 쓰러진 오토마톤을 바리케이드로 사용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행동했기에 방어 진형은 한층 단단해졌다.

그러나 오버플로는 만만한 현상이 아니었다. 적들의 숫자는 최소로 잡아도 6조보다 두 배 이상 많았고, 무엇보다 지하인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크악!”

누군가의 비명, 금속이 부딪치는 소음 등 전장의 혼란 속에서도 괴성은 뚜렷했다. 적들은 장애물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 오토마톤을 앞세우며 천천히 전진했다.

운동에너지로 깔아뭉개려는 시도는 저지했지만, 이번에는 숫자의 폭력을 감당해야 했다.

“온다! 온다!”

새된 비명을 지른 키키가 앨런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혹시 이번에도 해킹할 수 있어?”

“지금 당장은 과부하가 걸려서 힘듭니다. 적들을 막다 보면 괜찮아지겠죠.”

“과부하구나. 어쩐지 안광이 약하더라. 어쩔 수 없지···. 나는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나이라고.”

키키는 훨씬 작은 몸으로 앨런의 앞을 막아섰다. 어차피 적들에게 포위당한 형국이라 정면만 막으면 보호라는 의미가 좀 퇴색되긴 하지만.

앨런은 키키의 발치에 널브러진 애벌레를 쳐다봤다. 전위의 다리 사이로 침투한 녀석을 팔의 송곳으로 처치한 것이다.

나름 제 역할을 하는 그를 뒤로하고 표범을 불렀다.

“앞으로.”

전위들은 갑자기 쑥 튀어나온 표범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덩치와 룬문자를 보니 굉장히 든든해졌다.

그리고 충돌.

표범이 앞으로 튀어 나가서 기계 황소의 목을 깨물었다. 드릴 송곳니가 철판을 뚫어내며 불똥을 흩날렸다. 마치 폭죽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황소의 머리를 기어코 뜯어낸 표범은 기수, 그러니까 지하인을 노렸다. 앨런이 쏘아낸 레이저는 정확히 지하인의 가슴에 닿았고.

뻥!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인의 상체가 짓이겨졌다. 움푹 팬 상처의 크기는 표범의 앞발과 일치했다.

표범이 적들의 진형에 침투해서 종횡무진 휩쓸고 다니자, 전위들도 한층 힘을 냈다.

“나도 하나 운용할까?”

“돈은?”

“수익은 많이 줄겠지만, 안정성이 올라가잖아.”

“마법공학자도 아닌데 수리비 감당할 수 있겠어?”

“그래도···.”

“그만 징징대고 방패나 똑바로 들어!”

잠깐 잡담을 하긴 했으나 그들이 맡은 역할은 똑바로 수행했다. 역장 방패로 잠깐 시간을 벌면 마법사용자들이 지원하거나, 실력이 월등한 부조장들이 오토마톤을 침묵시켰다.

그래도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방어진이 뚫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면 다치거나 약한 녀석을 일부러 흘렸거나.

“끼욧!”

그럴 때면 키키가 나섰다. 팔을 열심히 움직여서 송곳을 내질렀다. 굉장히 어설픈 움직임이지만, 마법공학자라 무기술을 단련하지 않았을 테니 차라리 저러는 편이 나았다.

“끄악! 살려줘!”

고블린의 신체적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나약한 정신머리 때문인지, 매직웨어로 몸을 도배하다시피하고도 밀리긴 했다.

뚜벅뚜벅 다가간 앨런은 지팡이를 위로 올리고, 골프 치듯이 늑대 오토마톤의 머리를 강타했다.

오토마톤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고, 자유를 얻은 키키는 늑대 위에 올라타서 송곳으로 열심히 찔렀다. 앨런이 송곳이라 표현했어도 사실은 창날에 가까운 물건이긴 했다.

전투는 점점 질척거렸다. 에비의 마나팩이 다 떨어지자, 마법사용자들도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탐험가마다 역할이 정해져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분야에 영 젬병이진 않았다. 물론 익숙한 일은 아니라서 상처가 빠르게 늘어났다.

혼란의 중심에 있는 앨런은 표범을 복귀시켰다. 슬슬 마력로가 텅 빌 시간이고, 적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서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부조장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정규직이라는 명함은 장식이 아니라는 듯, 다소 상처가 생기더라도 적들을 빠르게 처리했다.

앨런은 슬슬 정상으로 돌아온 왼쪽 눈으로 표범을 정비했다. 예상대로 마력이 간당간당했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

“없습니다.”

앨런의 단호한 대답에 쭈그러든 키키는 어딘가에서 천을 꺼내더니 표범의 입가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표범의 목구멍 안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거 뭐야? 수문장의 눈? 너, 생각보다 무서운 친구였구나.”

키키는 마법공학자라는 직함이 거짓이 아닌지 부품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만 닦아도 됩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그럴 시간이 아닙니다.”

앨런은 표범을 정비하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지하인의 시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앨런의 생각이 옳다면 흑마법 중 하나인 ‘시체소생’이 분명했다.

앨런은 표범의 턱을 두드려서 입을 벌리게 하고 키키를 불렀다.

“조원들에게 말 좀 전해주세요.”

“뭐라고?”

“표범 앞에 있지 말라고요.”

“광선 사용하게? 동력을 전부 소모한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어서요.”

키키는 날카로운 면이 있어서 이상함을 알아차렸지만, 앨런의 재촉에 몸을 돌렸다.

앨런은 표범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서 지금까지 예열한 마력로로 교체했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넘치는 마력이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자기 자신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행위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정비하느라 바쁜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왜 우리를 불렀지? 흑마법이 완성되면 곤란한데. 일반 좀비가 아니라 독 같은 유독물질도 잔뜩 뿌릴 거다.”

다가온 부조장 중 하나가 물었다. 원래라면 앨런의 요구는 들은 척도 안 하겠지만, 그는 오토마톤의 진격을 멈춘 사람이 누군지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다.

미궁에서 힘은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기에 앨런의 실력은 부조장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시체소생은 술사를 막는 게 가장 좋지만, 차선책으로 시체를 없애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떻게?”

앨런은 대답 대신 표범의 목구멍 안쪽을 보여줬다. 그들이 지겹도록 봐온 수문장의 외눈이 있었다.

“아, 그렇군. 모두 뒤로!”

충전은 이미 완료된 상황, 조원들이 표범 뒤로 이동하자마자 앨런은 광선을 발사했다. 목표는 다가오는 좀비들. 부조장의 말대로 녹색 안개 같은 물질이 몸을 뒤덮고 있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어찌나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지 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저번보다 여유가 있어서 힘이 쭉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열의 붉은 광선이 지나갈 때마다 지하인의 시체가 새까맣게 타버렸다. 설령 시체소생 때문에 회복하더라도 신체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서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신나게 좀비들을 불태우던 앨런은 좀비들의 틈으로 흑마법사를 포착했다.

‘마력이 좀 남아.’

생각을 마친 앨런은 그쪽에 서 있는 전위에게 말했다.

“비키세요.”

동시에 목을 돌리는 표범, 붉은 선이 수평으로 움직였다.

*

프랑수아는 온몸이 피로 젖은 살벌한 모습으로 흑마법사를 몰아붙였다. 아니, 그런 표현은 틀렸다. 방어막은 부서지는 순간 재생하며 쌍도끼를 계속 막아냈다.

“이래서 무식한 전사들은 안 됩니다.”

“···.”

“어차피 당신은 제 방어를 뚫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흑마법사가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주문이 완성되자 사이한 기운이 동그랗게 퍼져나갔다.

프랑수아는 자신을 노린 주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원들이 있는 곳에서 시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독과 부패를 뿌리는 좀비 그리고 시체폭발. 당신이 뛰어난 마법사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넌 여기에서 무조건 죽는다.”

“어딜 가시려고요. 저랑 놀아···.”

흑마법사가 검은 촉수로 프랑수아의 앞길을 막으려는 순간.

콰앙!

붉은 광선이 갑자기 방어막 옆구리를 강타했다. 정면만 강화했던 방어막은 속절없이 깨지고, 새빨간 광선이 흑마법사를 지졌다.

프랑수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흑마법사의 집중이 흔들리자 방어막도 약해졌다. 검붉은 도끼가 방어막을 깨부수고 마침내 놈의 목을 쳐버렸다.

“끄윽!”

흑마법사의 괴이한 회복력은 머리만 남았음에도 비명을 지를 수 있게 해줬다. 그는 끝없이 재생했다.

그래도 프랑수아는 단념하지 않았다. 어떤 현상이든 대가가 따른다. 요컨대 치료마법도 마력이나 귀한 재료를 소모해서 상처를 없앤다는 뜻이었다.

베고, 자르고, 부수다 보면 밑천이 드러날 터.

그런 일념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마법사는 까다롭지만, 육체 강화를 업으로 삼는 전사에게 거리를 허락하면 상황은 역전됐다. 비웃음 가득한 얼굴도 핏물에 잠겨서 허우적댔다.

‘비웃음?’

프랑수아는 묵직한 기척을 느꼈다. 꽃게를 닮은 거대한 녀석이 집게발을 딱딱거리면서 접근했다.

그 위에 탑승한 지하인은 유탄발사기 비슷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마석을 과부하시켜서 발사하기에 실제로 위력도 비슷했다.

쾅!

정작 폭음은 다른 곳에서 들렸다. 여기까지 달려온 표범이 미끄러지더니, 달고 있는 수레로 오토마톤을 강타했다.

“끼야아!”

고블린은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위로 솟구쳤다. 운 좋게도 지하인이 고블린의 쿠션이 됐다.

표범은 자신보다 덩치가 커다란 게를 압도했다. 앞발로 외장갑을 박살 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온 탐험가.

“저도 돕겠습니다.”

앨런은 룬문자를 새긴 철판이 가득 붙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건 뭐지?”

화르륵!

거센 화염에 놀란 프랑수아가 도끼질을 멈췄다. 흑마법사가 펼쳐놓은 살점과 흘린 핏물이 타면서 고약한 냄새를 흘렸다.

“화염방사기입니다. 생체조직에 효과적이죠.”

“연료는?”

연료탱크는 보이지 않았다. 고작 화염방사기나 쓰자고 무거운 화석연료를 가져오는 탐험가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마법이나 마도구라는 뜻인데, 지팡이에 이런저런 장치가 달려있긴 해도 마석과 마력로는 보이지 않았다.

프랑수아가 물끄러미 바라보는데도 앨런은 방화에만 집중했다.

“끄아아아!”

흑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작열통, 말 그대로 불에 타는 통증은 순위권에 드는 녀석이라 뇌를 개조한 흑마법사라도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앨런은 아무 감정 없이 무표정으로 화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프랑수아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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