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44화 (44/193)

동굴(6)

축구 경기장을 두 개 정도 합친 크기의 공터는 고약한 냄새로 가득 찼다. 그제야 전투의 소란도 완전히 잦아들었다.

앨런은 부상자를 수습하는 조원들을 보면서 지팡이에 마력 공급하는 일을 멈췄다. 흑마법사는 잿더미로 변했으니 화형식은 이제 끝이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마스크 필터의 식물이 내뿜는 청량함이 고기 익는 냄새 대신 코와 폐를 가득 채웠다.

앨런이 가만히 서 있으니 프랑수아가 휴식을 권했다.

“마력을 굉장히 많이 소모했을 텐데 괜찮나? 힘들면 수습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앉아서 쉬어도 된다.”

“휴식이 필요한 정도는 아닙니다.”

앨런은 과열된 마나하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체내 마력회로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마력과다증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라 무섭지도 않았다.

프랑수아가 흑마법사의 생사를 확인하는 사이, 앨런은 호흡부터 진정시켰다.

‘이번 일로 실력을 과신하면 안 돼.’

앨런은 흑마법사를 자신의 실력으로 쓰러트렸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불을 지르려는 순간, 적은 프랑수아에게 당해서 다진 고기와 비슷하게 변한 후였다.

‘열광선도 정면이었다면 통하지 않았겠지.’

그래도 낙담하진 않았다. 하루하루 노력하면 언젠가 같은 높이에 다다를 테니까. 미궁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굉장한 격차가 존재했다.

몸을 돌리니 강화외골격에서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전투 과정에서 약간 휘어진 부품끼리 마찰했다.

앨런은 공구 벨트에서 히팅펜치를 꺼내 응급 수리하며 수레에서 발사된 키키를 찾았다.

그는 구멍이 숭숭 뚫린 지하인 옆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니 망가진 고블린 로봇 같기도 했다.

“미리 뛰어내리든지, 아니면 꽉 잡고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제 말을 못 들었습니까? 아니면 청각 기관에 고장이라도?”

“으윽···. 동료가 다쳐서 누워있는데 첫마디가 추궁이라니. 너무 차갑지 않아?”

“엄살은 안 통합니다. 제일 불안한 수랭 파이프가 멀쩡하니 다른 곳도 괜찮겠죠.”

앨런의 말에 키키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중소기업에서 만든 인조 피부로 알고 있는데 꽤 정교했다.

“그걸 눈으로만 보고 어떻게 알아? 그런 비싼 매직웨어는 대저택을 눈깔에 박고 다니는 거랑 똑같다고. 네 눈이 그렇게 비싸? 아니면 대기업 제품이야?”

“그건 아닙니다.”

앨런이 고개를 저으니, 왼쪽 눈의 푸르스름한 빛이 좌우로 움직이며 궤적을 남겼다.

키키는 그 장면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왠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청년이라면 최고급품 없이도 가능할 것 같았다.

대충 봐도 평범한 마법공학자가 아니었다. 강화외골격은 도주가 아니라 전투가 목적이었고, 손수 제작한 표범도 강하고, 실시간으로 룬문자를 조합하는 속도도 굉장했다. 슬픈 말이지만 자신과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움직임은 이상하게 어설픈 감이 있지만, 어차피 그런 단점쯤은 장점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키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다가,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질척함의 원인을 응시했다. 자신이 처치한 지하인이 흘린 피를 보니, 갑자기 자신감이 상승했다.

“딱딱한 말은 그만하고 이걸 봐. 나도 한다면 하는 고블린이야.”

“네, 훌륭합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좀 더 찬양해도 돼.”

“시간 낭비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우리는 전투가 끝나도 다른 전장이 기다립니다.”

“좀 쉬었다가. 하···.”

키키는 앨런과 눈이 마주쳤다.

등 뒤에서 타오르는 불 때문에 얼굴에 드리운 짙은 음영, 코와 턱을 가리는 방독마스크,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심한 눈.

여러 특징이 합쳐지니 위압감이 굉장했다. 승리의 기쁨에 도취한 자신감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려고 했는데 그러면 안 되겠지.”

전형적인 고블린의 특징이었다. 사고가 단순해서 감정이 마구 날뛰었다. 우쭐했던 마음도 앨런을 보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앨런과 키키는 조원들이 뭉친 장소로 다가갔다. 부상자가 부상자를 치료하는 묘한 광경이었다. 전투가 워낙 격해서 멀쩡한 사람이 안 보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앨런은 자신을 향해 엄지를 세우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의도적으로 느릿하게 걸으며 칭찬을 만끽하는 키키의 뒷목을 잡고.

“조원들의 장비를 먼저 봐주세요.”

“너는?”

“수집가의 시체폭발로 수레가 전부 망가져서 부상자를 옮길 수단이 없으니 만들어야죠.”

키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수를 툭툭 건드렸다. 피 묻은 송곳이 사라지고 마법공학용 공구가 튀어나왔다.

앨런은 먼저 오토마톤을 수리했다. 이곳은 아직 미궁이었고, 조원들은 호송이 아닌 전투와 경계에 집중해야 했다.

‘전투 능력은 필요 없으니 이동만 남기자.’

그나마 멀쩡하게 부서진 오토마톤의 영혼석을 꺼내서 별문자를 빠르게 조작했다.

영혼석 몇 개를 챙긴 앨런은 표범을 불렀다.

“입 열어.”

명령대로 주둥이가 열리자 철판을 그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물어.”

표범의 드릴 송곳니가 회전하며 철판에 구멍을 뚫었다. 그런 식으로 나사가 들어갈 구멍을 만든 앨런은 수레가 아니라 썰매를 만들었다.

‘미궁에서 바퀴를 어떻게 구하겠어.’

완충 장치가 엉망이라 승차감이 최악이지만 행군보다는 백 배 나으리라. 담요를 깔아서 최대한 푹신푹신하게 만들고 그 위에 부상자를 눕혔다.

썰매 하나에 두 명씩, 총 네 명을 눕혔다. 앨런은 오토마톤의 동력원과 연결된 케이블을 쭉 빼서 가져왔다.

“마나하트가 있는 분이···.”

거동은 불편해도 오토마톤에 마력 공급은 할 수 있었다. 대중화된 마력수련법, 미궁탐험가 등의 요소가 교집합을 이루니 네 명 중에 두 명이나 있었다.

앨런은 고민 없이 가져온 케이블을 수레에 누운 조원의 손에 쥐여줬다. 물론 당사자는 깜짝 놀랐다.

“대답도 안 했는데 마나하트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그럴 것 같았습니다. 동굴을 노릴 정도의 실력이라면 마나하트는 있겠죠.”

“그래? 감이 좋네.”

‘감’은 적절한 단어였다. 마나하트가 클수록 사람을 감싼 뿌연 안개가 짙은 느낌이 들었다.

“마력 공급 케이블은 효율을 높이기 위해 만든 거니 힘들면 손을 떼도 됩니다. 어차피 주동력원은 소형 마력로나 마석이니까요.”

다시 멀어지는 앨런을 보며 조원들이 쑥덕거렸다.

“든든하네.”

“저런 공돌이는 얼마나 줘야 함께 다닐 수 있냐?”

“쟤가 우리랑? 아서라. 마법공학자는 실력만 있으면 동굴보다 아래로도 모셔가는데, 우리랑 파티 맺으려고 하겠어?”

“하긴, 직속 탐험가가 될 수도 있겠지.”

“그래, 애초에 브레이커가 교습을 왜 하겠어? 정규 교육기관이 아닌 야생에 쓸만한 유망주가 있으면 데려가려는 의도잖아.”

“저기 봐.”

“내 말대로지?”

그들의 속삭임처럼 프랑수아가 앨런에게 접근 중이었다.

“이제야 시간이 좀 나는군.”

“지금은 좀 바쁩니다.”

“너무 솔직한데···.”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키키와 함께 오토마톤을 뒤집었다. 배 쪽의 약한 장갑을 해체하고 내부의 부품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덕분에 사망자 없이 놈을 끝낼 수 있었다.”

“흑마법사 상대로 아슬아슬했는데 마침 잘 끼어들었지 않습니까? 열광선으로 길을 뚫고, 수레를 타고 돌진해서 파바박···.”

신난 키키가 호랑이 등에 탄 여우처럼 어깨를 우쭐거리자, 프랑수아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슬아슬? 내가 놈을 압도하고 있었다. 숨통을 완전히 끊는 것도 결국 시간 문제였···. 너무 흥분했군.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앨런은 이해했다. 키키의 발언은 자존심을 묘하게 건드렸고, 그의 간사한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짜증을 유발하는 효과가 배로 늘어났다.

호흡을 가다듬은 프랑수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덕분에 사망자 없이 수집가의 노예를 끝장냈군.”

“아까 흑마법사가 본인 입으로 스승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수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어떤 스승이 제자의 머리에 정신지배용 기생충을 심겠나. 말로는 제자라고 불러도 본심은 아니라는 증거지.”

“이해했습니다. 비슷한 경우를 본 적 있어서요.”

노박도 조수 중에 특출난 이들을 아끼며 제자처럼 대했지만,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은 제물로 쓸 조수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편하지. 게다가 수집가의 노예는 얼마나 많은지 파악도 힘들다. 워낙 발이 넓으니 바다 건너 대륙에도 꽤 있을 거고.”

말을 마친 프랑수아가 몸을 돌려서 멀어지자, 키키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나는 감사 인사라길래 선물이라도 주는 줄 알았네. 쪼잔하긴.”

“어···.”

프랑수아처럼 강력한 마력사용자가 귓속말을 못 들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발걸음을 멈춘 프랑수아가 다시 돌아왔다. 동상처럼 굳은 키키를 무시하며 앨런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이 맞군. 내 생각이 짧았다. 필요한 물건이나 도와줄 일이 있나?”

지금까지 봐온 프랑수아는 자긍심이 굉장히 높았다. 키키가 실력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니 금방 성을 냈지 않은가. 어쨌든 이런 타입의 사람은 마음의 빚이 생기면 갚고자 노력했다.

앨런은 바로 무언가를 떠올렸다. 바로 마력수련법. 마력과다증을 통제할 가장 좋은 수단은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요화의 피살이꽃이나, 종합병원에서 받는 마력 투석은 일시적으로 병세를 억누를 뿐 본질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주진 않았다.

노박이 알려준 수련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가 노예에게 좋은 걸 줬을 리가 만무했다.

생각을 정리한 앨런은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본론을 말했다.

“마력수련법이 필요합니다. 마나하트의 크기를 키우는 것보다는 통제력과 뇌 강화에 집중한 물건이 좋습니다.”

프랑수아는 한참 동안 코를 긁었다.

“곤란하면 다리만 연결해줘도 충분합니다.”

“지금 당장은 확답을 주기 어려우니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 차일피일하면서 약속을 어기려는 수작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마력수련법은 뚝딱 나오는 물건이 아니다. 귀중할수록, 성능이 뛰어날수록 구하기 힘들었다.

돈보다는 영향력이나 인맥의 문제였다. 더욱이 앨런이 판매자의 사고를 마비시킬만한 거금을 소유한 것도 아니니까.

앨런의 협상이 좋게 끝나자, 키키도 뭔가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하프오크는 서늘하게 쏘아보며 자리를 떠났다.

앨런은 인생이 끝난 표정을 지은 키키를 위로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줄게요.”

“그래?”

키키는 표범을 힐끔 쳐다봤다. 든든한 오토마톤이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다. 물론 유지비를 감당하려면 머리가 좀 아프겠지만.

정리를 마친 6조는 다시 지상으로 향했다. 수집가의 노예를 처치했지만, 사태는 종결되지 않았다.

노예 흑마법사 혼자서도 이만한 피해를 줬는데, 본인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끔찍한 결과만이 있으리라.

그래도 지금까지 마법이 안 날라오는 걸 생각하면 그도 마셜 회장과 마주쳤으리라 예상되었다.

기존의 법칙을 깨고 층을 넘어 간섭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어마어마한 준비가 필요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도달한 10층. 오르막길의 검은 안개를 통과하니 미궁 이명증이 다시 앨런을 괴롭혔다.

“왔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벽에 기댄 시온이 있었다. 프랑수아가 앞으로 나섰다.

“왜 혼자 있지? 조원들은?”

“전부 올려보냈어. 나는 여기에서 인원을 파악하는 중. 가말이랑 오마르도 올라갔어. 6조가 제일 마지막.”

말을 마친 시온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데도 주변이 멀쩡히 보이는지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간다.”

프랑수아는 조원들에게 통보를 마쳤다. 그의 옆에 있던 앨런이 질문을 던졌다.

“멀쩡한 눈을 감고 다니는 건 수련의 일종입니까?”

프랑수아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마침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앨런 혼자였다.

“맹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말해줘도 상관없으려나···.”

프랑수아는 주먹은 꽉 쥐었다. 어떤 감정을 억누르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소리도 굉장히 낮아졌다.

“세상에 더러움이 너무 많아서 일부러 감고 다닌다더군. 다른 이유도 있는데 내 생각에는 그게 가장 커.”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진짜였군요.”

랑카, 노박 클리닉, 로만 컴퍼니 그리고 흑마법사까지 떠올린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공감되네요.”

“음···.”

프랑수아가 코를 찡그리며 앨런과 불을 뿜던 지팡이를 쳐다봤다.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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