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49화 (49/193)

현장학습(3)

얼음으로 만든 족쇄는 지하인과 오토마톤의 발을 훌륭하게 묶었다. 설령 회피하더라도 앞에서 길을 막아버리니 진형이 복잡하게 꼬였다.

‘일단 지켜볼까.’

앨런은 총구를 내리고 마탄만 장전해뒀다.

마탄이 속박 장판을 만들어서 굳이 눈의 능력으로 오토마톤을 해킹할 필요가 없었다. 해킹은 심력과 마력을 왕창 잡아먹기에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보류하는 편이 좋기도 했고.

“조정간을 단발에 놓고···.”

“그냥 연사로 갈겨. 움직이지도 않잖아. 누가 무릎 관절 많이 맞추나 시합해볼까?”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한 괴물들이 얼어버리니, 동공에 지진이 생겼던 대학생들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거리에 따라 심리적 압박이 달라지는데,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심지어 묶여있으니 긴장이 풀린 것이다.

학생들은 사격장의 과녁이 되어버린 적들에게 사격을 시작했다. 안전해지니 공격도 점점 과감해져서, 총 말고 다른 무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둔기나 날붙이 같은 근접 무기는 아니고, 원거리 무기이긴 했지만.

“기억수정에 접속, 마력만 불어넣으면···.”

중얼거리던 학생 앞에 단단한 대지의 파편이 떠올랐다. 인공두뇌, 에비는 마력만 불어넣으면 마법을 완성해주는 도구.

그 편의성 때문에 소유자가 매우 많았다. 대학에 다니면 재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니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마법을 완성한 학생이 손을 앞으로 뻗으니, 파랗게 변한 팔찌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돌덩이들이 쏘아졌다.

탐험가들은 뇌와 가까이하려고 헬멧 형태를 선호하는데, 이들은 성능보다 디자인을 선택했는지 팔찌, 장갑, 드론 등 형태가 다양했다.

성능이 좀 뒤처지긴 해도 열 명 이상이 퍼붓는 마법이라면 마냥 약하다고만 할 수 없었다. 숫자 또한 위력이니까.

학생들은 앨런의 요구를 기억하고 다리를 주로 공격, 속박된 모든 지하인과 오토마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로스는 어느새 얼음 파편을 주워와서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얼음은 따뜻한 손에 있음에도 쉽게 녹지 않았다.

“마탄의 효과 지속시간이 굉장히 길어요. 이곳에서 사용하기엔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요컨대 더 아래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의미.

칭찬은 감사하나 앨런은 무표정이었다. 성공이나 좋은 평가보다 불발된 마탄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물을 뿌리려고 쏜 세 발 중의 하나가 그냥 바닥에 처박혔다.

앨런이 조용히 있으니 오로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유지시간을 생각하면 2급 마석을 사용했으리라 짐작되는군요. 내 말이 맞나요?”

“···네, 쪼개서 사용했습니다.”

사실 앨런의 마탄은 십만 코인에 불과한 1급 마석을 핵으로 삼고, 마나를 잔뜩 불어넣은 물건이었다.

2급 마석은 백만 코인 이상의 값어치를 지녔기에, 아무리 앨런이 돈에 욕심이 없어도 2급 마석으로 마탄을 뻥뻥 쏘면 통장이 버티지 못했다.

마력과다증은 신체의 불편함과 수명의 문제를 안겨줬지만, 이럴 때는 남부럽지 않은 효용을 자랑했다.

‘30대 중반이었나···.’

마력과다증 말고 진짜 심한 절맥증은 20대 초반에 주인을 끝장내니, 그나마 앨런은 시간이 좀 남은 편이긴 했다.

요화의 피살이꽃 덕분에 더 긴 유예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 문제는 자신의 것이라 마냥 마음 편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죽으면 책을 못 보잖아. 마도구도 못 만들고.’

앨런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 앞을 바라봤다. 슬슬 정리가 끝나는 듯한 상황 속에서 대학생들은 긴장을 놓아도, 오로스 교수나 호위들은 정면을 노려봤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형체 두 개가 고철로 쌓은 철책 뒤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의 키는 3m를 넘었고, 무기는 망치와 비슷한 둔기를 사용하며, 머리에는 새빨간 외눈이 달려있었다.

“수문장?”

“14층에서도 수문장이 일반 오토마톤처럼 나오긴 하지만 저건 다릅니다.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보일 겁니다.”

무심코 내뱉은 앨런의 말에 오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19층 아래에서나 나오는 중갑병이 13층에서도 나오는군요. 역시.”

“‘역시’라는 말은 예상하셨다는 뜻입니까?”

앨런의 물음에 오로스는 살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사이 호위들은 대학생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태풍론을 아시나요?”

“처음 들어봤습니다.”

“태풍은 사람이 일군 문명에는 재앙이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수자원의 이동, 에너지 균등분배, 대기 정화 등 이점도 있어요. 비슷한 맥락으로 미궁에서 사고가 터지거나, 큰 힘이 부딪치면 특이현상의 발생빈도가 높아져요.”

“자극에 반응하는 생물 같습니다.”

“요점을 잘 파악하는군요. 최근 마셜 회장과 수집가가 동굴에서 지상까지 움직이며 싸운 일이 있습니다. 태풍처럼 미궁을 뒤집어놨단 의미죠.”

오로스의 말은 특이현상이 발생하면 연구하기 좋으니, 일부러 지금 현장학습을 계획했다는 뜻이었다.

‘지식의 탐구자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앨런이 동의한다는 눈빛을 보내니, 오로스는 어깨에 두툼한 손을 살포시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 앨런과 오로스, 질린 표정으로 둘을 지켜보는 칼슨.

앨런은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봤다.

중갑병은 강화복을 입은 지하인. 완전 기계인 수문장보다 관절 가동범위는 좁으나, 조종자가 있어서 더 교묘하게 움직였다. 그러니 관찰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우리는 앞으로 가볼까요?”

오로스는 아예 앨런을 데리고 호위 옆에 섰다.

“호위 분들은 오른쪽 중갑병을 맡아주세요.”

사람이 좌우로 나뉘니, 앨런은 자연스럽게 왼쪽의 중갑병과 눈이 마주쳤다. 방어기지, 그러니까 공터 안쪽에 들어온 상태였기에 움직일 공간은 많았다.

앨런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마탄 발사기를 겨눴다.

통!

살벌하면서도 부드러운 발사음이 들리고, 소리가 공터 벽에 부딪혀서 메아리치기도 전에 중갑병의 몸이 흔들거렸다.

그게 끝이었다. 수문장의 팔을 앗아갔던 [관통]과 [폭발]의 마탄은 푸른 방어막에 막혔다. 원래 19층부터 등장하는 중갑병은 확실히 달랐다.

잠깐 비틀거리던 녀석은 자세를 바로잡더니 앨런을 노려봤다. 단순한 응시가 아니었다. 외눈이 뿜어내는 광량이 점점 증가했다.

‘수문장은 예열시간이 필요하더니···.’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앨런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가슴이 약간 뜨거워지긴 했어도, 그건 전투의 열기가 아니라 중갑병을 쓰러트리고 얻을 지식에 대한 갈망이었다.

중갑병이 사용하는 방어막은 결국 마나의 작용. 앨런이 준비한 마탄에는 그러한 과정을 방해하는 종류도 있었다.

달칵!

마법공학자의 손이 지녀야 할 덕목 중 하나는 속도. 앨런은 마탄을 빠르게 장전하고 탄창을 끼웠다.

“위험해 보이는데 내가 나설까요? 중갑병은 수문장과 완전 다르니, 수문장에 맞춰서 마탄을 준비했다면 안 통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마탄에 담긴 룬문자는 [혼란]과 [침투]. 마나펄스 수류탄과 비슷한 효과를 지녔다.

장전된 마탄은 두 발. 앨런이 손잡이에 마력을 불어넣자 마탄이 차례대로 날아갔다.

역시나 방어막이 빠르게 반응했지만, 첫 번째 마탄의 착탄 지점에 스파크가 튀더니 구멍이 뻥 뚫렸다. 두 번째 마탄은 그 안으로 쏙 들어가며 중갑병의 외눈을 강타했다.

콰앙!

마력회로를 전문으로 파괴하는 마탄이라도 파괴력이 담겨있긴 해서 중갑병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는 외눈의 빛이 꺼진 상태였다.

“오!”

오로스의 짧은 감탄을 추임새 삼아 다른 마탄을 장전한 앨런은 달려오려는 중갑병을 겨눴다.

통!

방어막도 깨졌겠다. 이번에는 막을 수 없겠지 하고 쏘아낸 마탄은.

쾅!

중갑병이 휘두른 손에 맞아 바닥에 떨어진 후 폭발했다.

앨런의 마탄과 발사기는 시제품이라 좀 느리긴 해도, 저러한 장면을 목격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굴욕은 금방 상승 욕구로 치환되었다.

‘발사속도를 조정할 필요가 있겠어. 이번에는 과부하를 걸어서 작은 충격에도 터지게 해볼까.’

앨런이 다시 발사기를 겨누려는 순간, 큰 덩치가 앞을 가렸다.

정면을 막은 오로스는 총구에 손을 올리더니 발사구가 아래로 향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나에게 맡기세요.”

앞에 선 오로스는 마치 성벽 같았다. 양팔을 좌우로 벌리자, 안 그래도 거대한 덩치가 한층 커졌다.

“지식은 뇌에 저장됩니다.”

오로스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안 중요한 신체 기관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특히 중요하죠. 그러니 지식의 저장소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면 육체가 튼튼해야 합니다.”

동시에 무언가 뜯어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풀린 실밥과 벌어진 옷감 사이로 녹색 근육이 흉악하게 꿈틀거렸다.

쿵쿵쿵!

코앞까지 다가온 3.5m의 중갑병.

그 앞을 막은 2.1m의 늙은 오크.

오크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안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었다. 오직 힘과 자신감만이 담겨있었다.

콰앙!

사람의 살과 뼈, 중갑병의 외장갑이 충돌해서 만들어졌다고 믿기 힘은 폭음이 공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표정 변화 없는 앨런도 미간을 살짝 찌푸릴 정도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단 한 방에 중갑병은 침묵했다. 몸통에 뚫린 구멍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앨런 탐험가가 방어막을 없애고 마력을 소모해준 덕분이에요.”

과연 진짜 그럴까. 앨런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오로스 교수는 중갑병을 일권에 침묵시킬 힘을 지녔다.

겁먹은 학생들이 교수의 근육을 보고 진정하는 이유가 있었다.

마침 호위 쪽의 중갑병도 정리가 끝나서, 학생들이 공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반짝였다. 전리품 때문인지, 아니면 학습에 대한 열망이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옷이 찢어졌군요.”

오로스 교수의 탐험복은 엉망이었다.

‘저게 찢고 싶다고 찢을 수 있는 옷이었나? 그것도 근육만으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근육은 노인의 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

오로스는 앨런을 보며 씩 웃었다.

“미궁학과는 문무를 겸비해야 해요. 앨런 탐험가는 내가 쭉 보니 적절한 인재라는 생각이···.”

갑자기 오로스의 말이 뚝 끊겼다. 앨런이 그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처음 보는 조형물이 있었다.

고철과 잡동사니를 엮어서 만든 해골이었는데, 크기는 드럼통과 비슷했다. 안구에 박힌 수정이 붉은빛을 뿜기도 했다.

지금까지 느긋한 신사처럼 행동하던 오로스는 냉큼 달려가서 해골 앞에 섰다.

“이걸 지키고 있었군요. 현장학습에서 이걸 보게 될 줄 몰랐는데, 우리 학생들은 운이 정말 좋군요.”

“이건 뭡니까?”

“우리가 유독성 마력 폐기물을 봉인하는 것처럼 지하인도 자신들이 꺼리는 물건을 이런 식으로 보관해요.”

앨런의 옆으로 학생들이 서자, 오로스가 양손으로 해골의 위턱과 아래턱을 잡았다.

“흡!”

탐험복이 다시 한번 찢어질 듯 부풀어 오르고, 동시에 해골의 입이 끼익 소리를 내며 강제로 벌려졌다.

오로스는 엉망이 된 해골 속으로 팔을 쑥 집어넣어서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 혹은 수정으로 만든 듯한 투명한 구체 안에는 무중력 상태처럼 바늘이 둥둥 떠 있었다.

오로스는 그 물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찾은 물건은 나침반이군요. 처음 보는 학생도, 이미 아는 학생도 있을 거예요. 칼슨 학생은 알고 있겠죠?”

“네.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을 가리키는 오파츠입니다. 미로와 동굴은 문의 위치가 정해져 있어서 쓸모가 없지만, 그 아래부터는 문이 조금씩 이동하기에 굉장히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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