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1)
앨런이 테일러의 생계를 맡은 후로 생활비가 대폭 늘었다. 혼자일 때는 대충 챙겨 먹으면 됐는데, 둘이 되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음식이나 대접하기도 곤란하고.’
프랑수아의 소개 덕분이긴 하지만, 그 누가 두 달 동안 돌봐주는 대가로 마력수련법을 알려준다는 말인가.
점점 줄어드는 계좌를 확인한 앨런은 자금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픈 사람과 함께 미궁에 갈 수도 없으니,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
“이 리볼버 고칠 수 있겠어?”
“총신이 아예 휘어졌네요. 이참에 새로 사시죠.”
용병과 프리랜서의 작업을 알선하는 술집이 잠깐의 일터가 되었다.
일반 가정 방문보다는 이쪽이 보수가 좋고 다양한 마도구를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물품에 적용되는 룬문자는 노박 클리닉 시절에 너무 많이 봐서 시시했다.
앨런이 전문수리점보다 싸게 받으니 사람이 몰려서 수입이 괜찮았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실력을 보여주니 금방 잠잠해졌다. 원래부터 편법에 친숙한 사람들이고 치료도 무면허 의사에게 받는데 마도구라고 다를까.
“오늘도 할아버지랑 같이 왔어? 대견하네. 다음엔 친구도 데려올게.”
비슷하게 말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머리가 아픈 할아버지를 돌보는 손자의 정성이 손님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럴 리가 없다.
피와 죽음으로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들에게 말랑한 마음이 남아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자그마한 따뜻함도 가족이나 친구에게만 향했다.
그러니 손님이 모이는 이유는 전부 앨런이 실력 있는 수리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롤프가 카운터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브로커이자 술집 주인인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사자 갈기와 비슷했다. 형광 빨간색으로 염색한 덕분에 눈에 잘 띄기도 했다.
당연히 이 드워프도 아무 조건 없이 앨런을 가게로 들이진 않았다. 하루 수익의 20%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원래는 50%였는데 앨런의 실력을 보고 대폭 깎아줬다.
일종의 자릿세다. 그것마저 없다면 아무나 마법공학자라고 와서 설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여긴 롤프의 가게니까.
바 카운터 앞에 앉은 테일러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한 컵에 코를 킁킁거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술이 아니라 탄산수였다.
테일러는 앨런을 힐끔 보고 롤프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이 기회야. 어서.”
“손자가 술 주면 상납금 퍼센트 깎겠다던데.”
“손자는 개뿔. 그냥 줘도 뭐라 안 할 거야.”
“이 양반, 치매 걸려서 자기 손자도 못 알아보네.”
“내 손자 아니라니까···.”
“쟤가 성인이라도 돼? 피붙이도 거리낌 없이 내버리는 시대에 아무나 데리고 다닐까? 그것도 골골거려서 오늘내일하는 노인네를?”
“오늘내일이라니. 말이 좀 심하네.”
“그건 인정.”
테일러는 분명 주름 많은 노인인데 상체 근육은 튼튼한 젊은이 같았다. 이곳은 신비가 넘치는 세상이라 나이로 판단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노인이 위험하기도 했다. 이 바닥에서 생활했는데 그 나이를 먹을 때까지 멀쩡하다면, 무언가 재주가 있다는 의미니까.
롤프는 수염을 손질하다가 슬쩍 말했다.
“근데 빨리 가는 게 손자에게 도움 되는 방법···.”
“쓰읍! 확 불 질러 버릴까 보다.”
눈을 부라리던 테일러는 금방 순해졌다. 이유는 롤프가 몰래 건넨 위스키 잔 때문이었다. 후다닥 마시고 앨런이 뭘 하나 보는데 하필 눈이 마주쳤다.
표정과 눈빛에 변화가 없어서 무슨 생각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그나마 추측 가능했는데 이제는 힘들었다.
‘저러니 더 무섭네.’
테일러가 최대한 밝은 미소를 보이고, 앨런은 잠깐 쳐다보다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롤프는 테일러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웃다가 카운터로 다가온 앨런을 맞이했다.
“오늘 장사는 벌써 끝이야?”
“네, 갈 곳이 있어서요. 오늘 자릿세입니다.”
카운터 위에 놓은 현금다발이 좀 얇았다. 지폐 계수기만큼 돈을 세본 롤프는 바로 알아차렸다.
“좀 적은데? 오늘 벌이도 꽤 좋았잖아.”
“술 드리면 깎는다고 약속했잖아요.”
“술값은? 저래 봬도 비싼 녀석이야.”
“원래 5%만 주려고 했는데 포함해서 10%입니다.”
“빈틈없긴.”
롤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금을 챙겼다. 그의 눈에 술집을 나가는 앨런과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묵직한 휠체어가 보였다. 누가 봐도 조손의 모습이었다.
모노레일에 탑승한 테일러는 봉인했던 입을 해방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어디 가려고?”
“웨스턴스카이요.”
“정원을 예쁘게 꾸며놨다는 제약 공방? 거긴 처음이네.”
“한 번도 안 가셨어요?”
“브레이커의 자회사가 있어서 귀찮게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었어. 넌 왜 가는데?”
“저번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약을 잊고 가서요.”
“무슨 약?”
“···.”
대화가 끊겼다. 테일러는 머리를 긁다가 휠체어를 매만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휠체어의 모습이 또 바뀌어 있었다.
이동 방향을 지정하는 레버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니, 두꺼운 손잡이 아래쪽이 열리며 샷건 총구가 튀어나왔다.
“미친.”
따가운 시선을 느낀 테일러가 얼른 휠체어를 원래대로 되돌리자 무기에 익숙한 시민들도 관심을 껐다. 변신 의자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만 빼고.
모노레일에서 내린 앨런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테일러도 말없이 가니 심심했는지 계속 이유를 물었다.
“우리 사이에 비밀을 남기려고?”
“만난 지 이제 일주일 지났어요.”
“깐깐하긴.”
웨스턴스카이에 들어가자 무성한 수풀이 손님을 반겼다. 회색으로 가득한 밖과 달리, 이곳은 어딜 봐도 녹색이 있었다.
앨런은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벗었고, 테일러도 감탄했다.
“공기와 마력도 완전 다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와 볼 걸 그랬다.”
“구경꾼은 쫓아내요. 머물고 싶으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도 오려는 사람 많겠는데?”
“페어리의 장난을 웃으며 받아줄 수 있으면요.”
요화가 있는 구역까지 도착한 앨런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중요한 손님과 대화할 때나 보이던 덩굴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이러면 방해하기 곤란했다. 좀 기다리려고 마땅한 자리를 찾는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보, 멍청이, 건망증!”
전부 앨런과 거리가 먼 단어뿐이었다. 앨런이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이, 페어리는 자신의 행위만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잔뜩 놀려서 만족한 페어리는 작은 대나무 통을 던져주고 도망쳤다. 그 안에는 피살이꽃 씨앗이 들어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
앨런은 말을 멈췄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테일러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 끝에는 검고 비단 같은 머리가 있었다.
꽃을 보며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은 많다. 꽃의 요정인 요화의 외모도 비슷했다. 덩굴 틈으로 봐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앨런은 테일러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를 말했다.
“할아버지. 이제 집으로 가요.”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애도 없는데 무슨 할아버지야.”
“히힛!”
테일러가 진절머리 치는 사이, 큰 나무 위에서 페어리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걸 뭐라고 하지?”
“양심 가출!”
“출타 아냐?”
“몰라!”
테일러가 노려보니,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남겼다.
“악덕 사장이 좋은가 봐.”
확실히 생김새만 보면 범죄긴 했다. 저기는 피부가 탱글탱글한 아가씨고, 이쪽은 쭈글쭈글한 할아버지니까.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테일러는 정확한 나이를 몰라도 연금을 운운했으니 60대고, 요화는 예전에 70대 할머니가 언니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앨런은 뭉그적거리는 테일러를 보다가 휠체어를 수동으로 바꾸고 뒤에서 밀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구매한 식료품으로 상을 차리고 식탁에 앉으니,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미궁은 안 가냐?”
“···.”
앨런은 묵묵히 테일러와 휠체어를 번갈아 쳐다봤다. 환자를 데리고 어떻게 내려가냐는 의미였다.
“집이랑 일터만 전전하니까 심심하잖아. 아냐?”
“마도구 수리는 매 순간 재미있어요. 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고요.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살피는 것도 즐거워요.”
“···말을 말자. 겉만 보면 늙어빠진 노인이라도 미로쯤은 거뜬해. 팔뚝 봐, 근육 보이지?”
첫 만남에 보여준 휠체어 드리프트의 근원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큼지막한 알통이다.
앨런의 머릿속에서 미로는 괜찮고 동굴도 할 만하다는 계산이 끝났지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미궁의 경험이 시간이 지나 추억으로 미화됐는지 생각해보세요. 아니면 요화 사장님 때문에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전신 성형이 좀 비싸긴 하죠. 전부 인조 피부로 바꿔야 할 테니, 미궁을 하루 이틀 다녀서는 의사 상담도 못 받을걸요.”
“아니. 그런 생각 아니라니까.”
“금액이 줄긴 하지만 연금을 당겨 받는 방법도 있잖아요.”
“···.”
“농담입니다.”
“무표정으로 말하니 진심 같아. 비싼 밥 먹는다고 구박하는 거 아니지? 후, 서러울 뻔했네.”
식사 도중, 테일러는 자신과 함께 내려가면 어떤 이점을 얻을 수 있는지 설명했다. 지름길, 적의 약점, 숨겨진 장소 등 앨런이 혹할 만한 정보가 많았다.
“위험하게 굳이 내려갈 필요 있어요? 그냥 말로 설명해주면 되죠.”
“대가리를 직접 들이밀어 봐야 오래 남지, 귓가에 떠들어봐야 기억이나 하겠냐?”
“오늘 좀 이상한데요. 마력수련법도 알려줘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았다면서요.”
“그거야 그렇지···.”
그 후로도 테일러가 부연 설명을 했지만, 앨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력수련법의 구절에 빈틈이 있나? 아냐. 보강할 부분은 없어.’
앨런의 뇌는 테일러 수련법의 전부를 알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뭔가 이상한데.’
너무 계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호의를 쉽게 잊는 동물이라 기왕 베풀려면 여러 차례 나눠서 전달해야 했다.
마력수련법을 예로 들면 마지막 구절을 연금이 나오기 전날에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테일러는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모두 불러줬다. 너무 빨리 배워서 재수 없는데 가르치는 재미는 있다고 포장하며.
‘제일 중요한 부분은 나중에 알려준다고 하긴 했지만···.’
앨런은 왼쪽 눈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새로운 마력수련법을 배우고 나서, 투시와 영혼석 간섭 능력이 더 강해졌다.
웬만하면 아는 사람에겐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번엔 예외였다.
“잠깐 뭐 하는 짓이야!”
앨런의 이마에 희미한 원이 생기자, 테일러가 무릎 담요로 가슴을 가렸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감탄했다.
‘빛 조절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어쨌든 테일러의 대처는 늦었다. 눈으로 확인한 장면이 앨런의 뇌 속에 저장됐다.
관념과 달리 심장은 가슴 중앙에서 왼쪽으로 아주 살짝 치우쳐있다.
그와 달리 마나하트는 아예 왼쪽에 있고, 인공 마나하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앨런이 눈으로 본 테일러의 인공 마나하트는 불안정했다. 당연히 거기에 연결된 인공 마력회로 또한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마력회로가 이상하니 몸속에 박아넣은 매직웨어는 어떻겠는가. 뇌 확장 장치, 반사신경을 강화하는 리플렉스 액셀, 고통 조절기 등이 엉망이었다.
앨런이 보기에는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있는 행위와 같았다. 멀쩡해 보였던 모습은 전부 테일러의 연기였다.
잠깐 유지되던 침묵이 깨졌다.
“미궁을 무덤으로 삼으려고요?”
테일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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