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2)
창고 안, 유일하게 불이 켜진 장소는 식탁. 앨런과 테일러는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앨런의 무심한 눈은 평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전등 아래에 앉아있는데도 앨런의 주변만 훨씬 어둡게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먹었던 식사는 저승으로 가기 전에 먹는 제삿밥입니까?”
“말이 좀 심하다···.”
처음 만났을 때라면 오히려 욕을 했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니 지갑을 열라고 말했을 테일러가 말꼬리를 흐렸다.
약한 모습을 확인한 앨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말이 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테일러는 여전히 어색함을 느꼈다. 메이즈시티에서 사람 죽는 일이 대수인가. 그것도 만난 지 이제 일주일 지났는데?
성향이 악독하거나 모진 사람이 테일러의 유언을 들었다면, 차라리 재활용하기 편하게 지상에서 죽으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놈들도 은근히 바라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봤나?’
어쩌면 몸의 병이 마음마저 잠식하고 있으리라. 아니, 분명 그러고 있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했다.
테일러는 앨런의 말을 곱씹었다. 어조가 굉장히 세고, 거칠었다.
일주일 동안 함께 생활했던 테일러는 앨런의 목소리에도 고저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래서 차이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화났구나.”
“함께 사는 사람이 갑자기 죽겠다고 하는 소릴 들으니 당연하죠.”
“난 그런 말 안 했다. 네가 추측한···.”
테일러는 공허해지는 앨런의 눈빛을 보며 말을 멈췄다.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역효과였다.
“미궁탐험가에게 죽음은 친숙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익숙해지기 싫습니다.”
특이현상이 발생했을 때, 일면식도 없는 토끼 수인을 왜 수레에 태웠겠는가.
데니스, 카크다가 수문장을 상대할 때 왜 홀로 말벌 무리를 막았겠는가.
앨런은 신이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까지 외면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게 처음 본 사람이라도.
테일러는 떠받들어 모실 스승님은 아니라도 선생 정도는 됐다. 그런데 죽겠다는 계획을 품고 있으니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앨런이 팔짱을 끼자, 테일러가 변명을 쏟아냈다.
“내가 함께 가면서 알고 있던 노하우를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넌 머리가 비상하니 한 번만 알려줘도 잊지 않겠지.”
“그만 하세요. 내려가면 제가 잘 때 사라질 생각이었죠?”
“···내가 죄인이다.”
테일러도 못 할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병은 심연에 처박힌 불쾌한 망상들도 수면 위로 낚아 올리고, 사람을 극단적으로 만든다.
“언제부터 불쾌한 끝을 계획하셨습니까?”
“불쾌라니···. 원래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유일하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마력수련법을 가르치니 문득 떠오르더라고. 어차피 몸 상태도 네가 봤듯이 최악이라 간신히 연명하느니 차라리 예전의 감각을 떠올리고 싶더라.”
테일러는 말문이 막혔는지 뒷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앨런은 그의 컵에 물을 따라주고 조용히 기다렸다.
“미궁탐험가로 활동했는데 살아서 은퇴했으니 운이 좋았지. 그런데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지 지금까지 아래를 탐험하는 꿈을 꾸곤 해.”
앨런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알려준다면 왠지 편하게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솟은 것이다. 기왕이면 저 아래에서.
“그리고요?”
“솔직히 말하면 머리가 언제 맛 갈지 몰라서 무서웠다. 분명 나인데 내가 아니게 되잖아. 그나마 마력을 운용해서 의도적으로 치매 발생 시간을 조절하는데, 그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잔소리 몇 개를 장전해놨던 앨런은 약해진 노인을 보며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병원은 가보셨겠죠? 가능성은 있답니까?”
테일러는 말없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힘들다는 이유가 뭡니까?”
“금액이 문제야. 대충 계산해보니까 하루에 500만씩 내라더라. 초기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상태가 더 좆돼서 가격도 천장을 뚫었겠지.”
“마셜 회장님과 입사 동기에다가 요원이었으니 잘 설득해서 자금을 융통 받을 방법은 없습니까?”
“요원? 나 때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선발대나 시범 운용 부서 같은 느낌이었어. 그리고 은퇴한 후에 욕심내다가 이 꼬라지가 됐으니 거기에서 무언가를 해줄 의리는 없어. 탐험가조합은 가족 놀이터가 아니라 기업이야.”
사회와 돈의 논리. 앨런 또한 이해하는 냉혹한 이치였다.
“그래도 프랑수아···.”
“그만해. 내가 교관으로 잠깐 가르치긴 했는데 나랑 실력 자체가 달라. 걔들은···.”
테일러의 턱이 누가 짓누르듯 닫혔다. 브레이커의 비밀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평범한 일도 퍼지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거나.
“그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고, 일단 이걸 보세요.”
앨런은 대화하는 동안 사람의 몸을 그리고 문제가 있는 부분에 색을 칠했다.
“없는 부분이 없네. 내가 봐도 심각한데.”
“편히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야, 아까는 추측만으로도 화내더니···.”
“집중하세요.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말해도 돼.”
집중하는 테일러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헛됨을 알아도 희망을 접한 사람은 놀라울 정도의 변화를 보이기 마련이니까.
앨런은 종이 위에 ‘병원’이라고 적었다.
“첫 번째는 병원에 가는 겁니다. 이건 돈 때문에 당연히 안 되죠.”
“복권 하나 살까? 1등 되면 반절은 내가 쓰고 나머지는 너 줄 수도 있는데. 아니, 줄게. 남 일을 이렇게 걱정해주는 호구는 처음이라 감동적이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장난치지 마세요.”
앨런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온 테일러를 다그치고, 이번에는 ‘매직웨어’라고 적었다.
“두 번째는 몸을 전부 매직웨어로 바꾸는 겁니다.”
“매직웨어 사용하다가 망했는데 또?”
“그럴 때는 매직웨어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지 고민해야죠. 어차피 회복할 수 없다면 대체하면 됩니다.”
“마법공학자가 아니라 미친공학자였잖아.”
계획을 들은 테일러가 학을 떼든 말든, 앨런은 또박또박 말했다.
“매직웨어로 대체한 부분은 얼려놨다가 나중에 돈이 모이면 재생치료를 받으면 될 겁니다.”
“독을 독으로 제압한다라···. 정신 나간 계획이야. 그래서 개조는 얼마나 하려고?”
“저번에 화상통화로 본 키키 정도면 될 겁니다.”
“걔는 완전 로봇이잖아.”
“야매 개조로 거기까지 도달했으니 예술의 영역이죠. 물론 성능은 별로지만요.”
키키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불안해졌는지 테일러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아예 칠성이나 헥스테크에서 운영하는 시술소를 찾아갈까?”
“돈은요? 연금을 몽땅 부어도 한참 부족할 텐데요. 된다는 확신도 없고요.”
“사실 연금은···.”
“쓰레기통에서 마권을 볼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쏟아부은 겁니까?”
앨런의 목소리가 다시 차가워지자 테일러가 손사래를 쳤다.
“진짜 아냐. 그게 아니라 치료하려고 미리 땡겨 써서 그래.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내가 그 정도로 막장은 아냐.”
“미래가 굉장히 어두웠군요. 제가 방문 안 했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근데 왔잖아.”
테일러가 징그럽게 윙크했다. 앨런의 눈이 저절로 가늘어졌다.
“오, 너 방금 미간 찌푸려졌어. 그것도 처음 보니 신기한데. 거울 한번 볼래?”
“무의미한 말은 그만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죠. 치료만큼은 아니지만, 전신 개조도 비싸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운 좋게도?”
“제가 마법공학자입니다.”
“믿어도 되는 거야?”
“어차피 죽으려고 했다면서요. 그럴 마음가짐이면 두려움도 없겠죠.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생각할 테니 아저씨도 그러세요.”
“야, 이ㅆ···.”
거친 발음을 내뱉다 멈춘 테일러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농담이지?”
“불안정한 매직웨어는 해킹으로 성능을 제어해볼 테니 마음의 준비는 해두세요.”
“해킹? 뭐라고? 내 귀가 이상하나?”
“독도 잘 쓰면 약이 됩니다. 지금은 매직웨어를 살 자금을 모아야 하니 잠시 잊어도 됩니다.”
*
어두운 공간, 잘 다듬어진 석재로 만들어진 천장과 바닥, 벽 속에서 들리는 유체의 소리, 헤드램프를 켜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탐험가, 맨홀 앞에서 입만 벌리고 대기하는 사람.
테일러는 방금 미궁의 문으로 들어왔다. 몇 년 동안 잊고 살던 장소에 들어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말랑말랑한 감상도 잠시, 옆에서 걷는 앨런을 쳐다봤다.
“돌고 돌아 미궁?”
“여기보다 빨리 돈 벌 장소가 있나요?”
“카지노? 아, 알았어. 처음에는 착했는데 갈수록 사나워지냐.”
“한참 어른이 왜 이리 애처럼 굽니까?”
“내가 젊다고 계속 세뇌해야 진짜로 그렇게 돼. 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면 젊은 친구 같다는 뜻이니 성공 아닐까?”
“아뇨. 그걸 보통 철없다고 하죠. 절대 칭찬 아니니까 곡해해서 듣지 마세요.”
꿍얼대던 테일러는 인적이 드문 통로에 들어서자 휠체어를 확인했다. 예전의 얄팍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1인용 소파처럼 두꺼운 형태로 탈바꿈했다.
“방향 전환 레버 옆의 버튼은 뭐야?”
“샷건입니다. 그 옆을 누르면 마탄 발사기로 전환되는데, [폭발]을 2 중첩 해놨으니 적이 멀리 있을 때만 쏘세요.”
휠체어에 이상이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을 한 앨런은 테일러에게 물었다.
“일단 함께 내려가게 되었으니 자기객관화가 필요합니다. 실력이 어느 수준이라고 생각하세요?”
“한창때는 심도 4였지. 오토마톤들이 나만 보면 어찌나 벌벌 떨던지.”
“오토마톤은 감정이 없습니다.”
“재미없긴. 지금은 아프니 3?”
“물음표는 떼세요. 거짓말도 하지 마세요.”
“기껏해야 1.5 정도 되겠다. 네가 만들어준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가정하에.”
“그럼 바로 동굴로 내려갑시다.”
앨런이 가져온 수레는 세 개였고, 평소와 달리 탐험물자가 가득 실려있었다. 둘이서 사용하기엔 과한 느낌이 있었다.
“어디 전쟁 나가? 보급품 장사해도 되겠다.”
“충분한 자금을 벌어야만 복귀할 겁니다. 알고 있는 경험과 비밀을 이번 기회에 활용하시면 됩니다. 혹시 그런 것도 금제가 걸려있나요?”
“동굴까지는 문제없고, 다음 단계부터는 조금씩.”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일러의 지식은 브레이커의 비밀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그들이 선호하는 루트, 수원, 좋은 사냥감이 나타나는 장소, 안전한 야영지 등 미궁 탐험에 필수적인 정보를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테일러가 거기까지 직접 가는 건 예외였다.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면, 앨런이 보고 따라 하면 됐다.
“혹시 금제가 발설 말고 행동도 막습니까?”
“아직 그런 낌새는 없는데, 왠지 안 될 것 같네. 그래도 유용한 정보는 많이 알고 있으니 나만 믿어. 마침, 내 실력이 녹슬었는지 확인할 순간이 왔군.”
현재 있는 장소는 5층. 검은 안개 너머에서 오토마톤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멧돼지를 닮은 놈들이 튀어나왔다.
“휠체어 성능 테스트를 해볼까.”
“저것들은 멀쩡하게 잡을 생각이니 일단 앉아 계세요.”
앨런은 그렇게 말하고도 이렇다 할 대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응시하니 달려오던 멧돼지는 무릎 꿇은 자세로 미끄러졌다. 마취제를 잔뜩 맞은 동물과 비슷했다.
“해킹 속도가 굉장히··· 빠르네. 뭐 하려고 멀쩡히 잡았어?”
“짐꾼으로 쓰려고 합니다. 원활한 전투를 하려면 표범이 자유로워야 하니까요.”
“표범 말고 돼지까지 운용하면 마석 소모가···. 혹시 어릴 때 영약을 밥 대신 퍼먹었냐?”
“그냥 체질입니다.”
앨런은 예전과 달리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테일러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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