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3)
앨런은 9층 출구 야영지 도착하자마자 수레에서 팻말을 꺼냈다. 미로는 사람이 제일 많은 장소이며, 수문장을 노리는 파티가 많아서, 수리로 부가 수입을 노린다면 최적의 위치였다.
“잠시도 안 쉬는구나. 아니, 내 죄가 너무 크다···.”
테일러는 계속 타인의 마도구를 정비하는 앨런을 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원래도 앨런은 여기에 내려올 때마다 일부러 일을 찾았다. 하지만 테일러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 잘 됐다 싶어서 그냥 묵묵히 있었다.
앨런을 기억하는 몇몇 탐험가는 새롭게 추가된 노인을 보며 수군거렸다.
“가끔 보이던 수리기사는 알겠는데···.”
“수리기사?”
“혼자 다니는 마법공학자 말이야. 저기 수레 근처에 있는 흑갈색 머리카락의 탐험가.”
“아, 방독마스크 쓰고 있는 사람?”
“밥 먹을 때, 얼굴을 잠깐 봤는데 되게 어리더라고. 그런데 옆에 있는 노인네는 처음 봤어. 휠체어까지 타고 있네.”
“미궁에 휠체어가 왜 있어? 평범한 물건 같진 않은데, 여기에서 보니까 존나 웃기다. 야, 여기 노려본다. 귀는 밝네.”
마력수련법으로 감각이 예리해진 앨런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주인인 테일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남을 안줏거리 삼는 새끼들 얼굴을 바닥에다 갈아버렸을 텐데.”
“진정하세요. 원래 들릴 거리도 아니고, 저런 말을 한다고 딱히 피해주지도 않잖아요.”
테일러는 음식을 준비하는 앨런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너무 무르다니까. 미궁에서는 절대 얕잡아 보이면 안 돼. 동료 말고는 전부 살인자에 강도라고 생각해라. 어쩌면 파티원도 경우에 따라선 못 믿을 것들이지.”
“아저씨도 그렇게 하실 거예요?”
“어허. 나 같은 인격자를 시정잡배들과 같이 취급하는 거냐? 그러면 섭섭해.”
“누가 들으면 제가 못된 놈인 줄 알겠네요. 그릇이나 받으세요.”
테일러의 숟가락이 김을 내는 수프 속으로 파고들었다. 항상 수프만 먹는 것 같지만, 딱딱한 칼로리 비스킷과 압축 식량을 맛있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였다.
맛을 본 테일러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익히 알고 있는 대중적인 맛이야.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미궁 요리를 보여주마. 원래 가게까지 내려고 했는데, 본업 때문에 참았지. 혹시 먹어보고 매일 해달라고 졸라대면 곤란해.”
“진실과 허풍 비율이 얼마나 되나요?”
“사람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면 쓰나.”
“미궁 요리는 말로만 들어봤어요. 자주 드셨나요?”
“탐험이 언제나 의도처럼만 흘러가진 않지. 전투 중에 보급품이 망가지기도 하고, 미궁은 너무 깊고 넓어서 식량만 챙기다가 수레가 꽉 차는 경우도 있어. 그래서 동굴보다 멀리 가는 탐험대는 무조건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앨런은 브레이커의 교습 때, 프랑수아가 다른 탐험가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진짜 지하인 피도 마시나요?”
“그랬다는 사람 이야기는 들어봤다. 사람 피 맛이랑 똑같다고 했을걸. 요즘은 장비 수준도 올라가고, 손가락만 한 압축 식량으로도 배가 차서 그러진 않을 거다. 미궁 탐험 초기였다면 몰라도. 그런데···, 하필 밥 먹는데 그 얘기를 해야 해?”
“그럼 다른 요리 이야기를 하죠.”
“동굴을 벗어나면 야생의 땅, 보통 원시림이라 부르는 구역이지. 짐승들이 정말 많고, 신기한 식물도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자연 식단을 계획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산지 직송이라 지상에서 파는 싸구려 음식과 달리 중금속, 플라스틱 오염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물론 여기는 미궁이고, 사람에게 해로운 물질이 있을 수 있으니 조사는 철저히 해야 한다. 어제 먹었던 동물이라고 방심하면 영영 자버릴 수도 있어.”
“거기에도 지하인이 있나요?”
“없다. 미로와 동굴은 유사점이 있는데, 원시림은 아예 달라. 문명의 흔적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동네야. 물론 예외는 언제나 있지만.”
“수련법을 거기에서 찾으셨다고 했었죠?”
“그래. 테일러 수련법이 돌로 쌓은 사원 비슷한 건물에 있었지. 나중에 또 주워 먹을 거 있나 해서 다시 방문했을 때는 흔적조차 없었다.”
“다 드셨으면 그릇 주세요.”
앨런은 그릇을 치우며 원시림에 대해 생각했다. 그곳은 미로나 동굴과 달리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 힘들었다. 바퀴를 계속 쳐다보자 테일러가 낌새를 눈치챘다.
“벌써 거기 내려갈 생각으로 가득하구나. 그때쯤이면 개조가 끝나서 휠체어랑 이별할 테니 상관없겠지.”
“치료라고 해주세요. 그래야 마음가짐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어깨 으쓱거리던 테일러가 주변을 구경하다가 보기 드문 진지한 눈빛으로 한 곳을 쏘아봤다. 머리카락을 전부 없애고 두피 문신한 오크들과 눈싸움을 벌였다.
테일러가 시선을 고정한 채 속삭였다.
“아까 내가 얕보이면 안 된다고 했지? 저놈들 관상을 보니 범죄자가 분명해.”
“오크는 외모가 원래 험악하잖아요. 그것도 인간 기준이지, 저들은 무섭게 생길수록 미남이고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저 문신 보이지? ‘그린블러드’라는 갱단 놈들이야. 아직도 안 망했나? 참 오래도 해 먹네.”
“용케 출입했네요.”
“이것만 있으면 다 돼.”
엄지와 검지를 동글게 만 테일러가 추가 설명을 보탰다.
“방위군 간부에게 돈을 처먹였거나, 아니면 아무나 받아주는 탐험가조합에 가입해서 새 신분증을 만들었거나.”
“로만 컴퍼니처럼요?”
“아, 그 새끼들도 있었지. 거기는 연합으로 만들어진 조합이라 덩치만 따지면 브레이커보다도 크다.”
테일러와 오크들 사이로 지나가는 탐험대가 있어서 눈싸움은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둘은 10층을 탈 없이 통과했다. 수문장은 안타깝게도 얼굴을 비춰주지 않았다. 11층 동굴에 도착하자, 테일러는 옛 향수가 떠오르는지 벽에 손바닥을 댔다.
“확실히 지하인의 손길이 느껴져. 천장이나 벽은 동굴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바닥은 콘크리트 도로 같잖아.”
“창조자의 솜씨 아닐까요?”
“지하인에게 채찍질해서 만들었든지, 아니면 저 아래에서 잘살고 있는 지하 왕국을 뚝 떼와서 여기에 박제했든지. 여러모로 대단한 양반이야. ···뭔가 온다.”
동굴은 외부인을 위한 환영 인사를 준비했다. 꿈틀거리는 벽 너머에서 보이는 실루엣은 셋. 휠체어 성능을 시험하기 좋은 숫자였다.
“베테랑의 솜씨를 보여줄 테니 잘 봐라.”
테일러가 앞으로 나서자, 지하인 하나와 오토마톤 둘이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오토마톤이 끄는 전차에 지하인이 탑승한 형태였다.
“나도 저렇게 만들어주면 안 될까?”
“휠체어 졸업하신다면서요. 그보다 집중이나 하세요.”
앨런의 타박에도 테일러는 느긋하게 행동했다. 휠체어 레버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고 있다가, 적들이 돌진하자 버튼 하나만 눌렀다.
금속이 철컥거리며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고, 팔걸이 아래로 마탄 발사기가 튀어나왔다. 테일러는 총구를 조정한 후, 버튼 하나만 눌렀다.
[폭발]을 중첩한 마탄이 튀어나와서 허공을 잠시 유영. 전차를 끄는 오토마톤들의 가운데에서 힘을 해방했다.
콰아앙!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이 한차례 지나가고, 뿌연 먼지마저 흐려진 장소에는 금속 잔해와 살덩이만 남아있었다.
“봤지?”
“마탄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했잖아요.”
“장비도 실력. 다루는 능력도 실력. 내가 탄착 지점을 정확히 지정해서 저런 결과가 나온 거다. 인정하지?”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총알도 다리를 맞추냐, 머리를 꿰뚫냐에 따라서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는 법이었다.
테일러의 사격 솜씨는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좋았고, 휠체어의 무게 덕분에 반동도 거의 없었다.
12층에 도달한 둘에겐 휴식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안전한 공터를 물색해야 했다.
앨런이 지도를 보고 위치를 가늠하는 도중, 갑자기 테일러가 휠체어를 움직이더니 벽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주변을 더듬었다.
“뭐 하세요?”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다리 병신이라 앉아만 있으니 손이 안 닿는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 눌러 봐. 그래, 거기.”
앨런이 그 말에 따르자, 멀쩡해 보였던 벽 일부분이 쑥 들어갔다. 그리고 암석이 종이처럼 접히더니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보물상자 알지?”
“해골을 뜻하는 말이라면요.”
“맞아. 고철 구부려서 만든 해골.”
“나침반처럼 침입자를 막는다는 법칙을 위배하는 오파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궁의 존재 의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들어가자. 여기는 비밀통로라고 불러. 끝에 보물, 쓰레기 혹은 지하인이 있을 수도 있지.”
“좀 이상한데요. 아까 거기는 벽이 얇아서 이럴 공간이 전혀 없을 텐데···.”
“그러니까 미궁이지. 아무도 실체를 모르는 미지의 장소.”
앨런은 주변을 관찰하며 전진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찾으셨어요?”
“경험의 축적. 이건 내 비법이니 혼자만 알고 있을 거다.”
마력수련법을 미련 없이 알려준 사람치고는 속 좁은 말이었으나, 테일러는 이런 식으로라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다.
‘이제 살려고 마음먹었으니 쓸모없는 늙은이 취급은 사양이다.’
앨런에게 알려주면 편하겠지만, 자신은 뒷짐 지고 있어야 하는 그런 상황 자체가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꽝이다.”
탁자 위에는 분해된 오토마톤이 있었다. 특별한 개체도 아니었다.
“뭔가 아쉽네요.”
“처음부터 대박 터지면 더 이상하지. 원래 대박은 노력 없이 욕심만 그득한 놈에게 찾아가지 않아. 예전부터 열심히 하던 사람에게는 몰래 다가가지만.”
앨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테일러를 응시했다. 경박하고 거칠지만, 가끔 마음에 와닿는 말을 했다. 이럴 때면 까마득한 어른이라는 사실이 체감된다고나 할까.
“뭘 그리 노려봐? 헛수고했다고 속으로 내 욕하는 거 아니지?”
“···.”
12층에서 발견한 비밀통로는 새로운 지식이자 경험이었다. 오직 알고 있는 사람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야영지를 찾으면서 자꾸 테일러에게 시선을 보내니.
“밥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눈빛 보내지 마라. 비밀통로가 매번 보이는 줄 알아? 위치도 매번 바뀌니 그냥 운이라고 생각···. 아니, 뭔 날인가?”
테일러가 레버를 조작해서 다시 벽에 붙었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시커먼 통로가 입을 쩍 벌렸다.
비밀통로 내부는 동굴과 달리 검은 안개가 없어서 더 멀리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이곳은 상당히 기네요.”
“전투 준비해.”
앨런이 군말 없이 장비를 챙기자, 테일러가 천장이나 벽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작은 파이프들이 튀어나와 있었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굵어졌다.
“너도 눈이 달렸으니 파이프가 보일 거다. 비밀통로에 들어왔는데 파이프가 저렇게 있으면 적이 있다는 신호다.”
“뭐가 있다고 예상하세요?”
“오토마톤 생산 공장 같은데.”
동굴의 적들은 벽을 뚫고 태어난다는 지식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우리가 마주치는 오토마톤들이 여기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인가요?”
“다음에 다시 오면 비밀통로는 사라지니, 그건 아닐 거다.”
앨런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앞에 닥친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통로의 끝에 도달하기 전에 수레를 멈추고, 천천히 다가가서 공터에 무엇이 있는지 관찰했다.
천장을 수놓은 파이프, 분해된 오토마톤이 놓인 탁자들, 벽에 붙은 선반에 담긴 마석과 영혼석, 마지막으로 분주히 돌아다니는 지하인들.
테일러가 말한 대로 이곳은 공장이었다. 그러나 자동화 설비 같은 건 눈을 씻고 쳐다봐도 없었고, 지하인들이 직접 부품을 가져와서 조립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네요.”
“어떤 점이?”
“저런 형태의 오토마톤은 없잖아요. 왜 말의 몸통에 사자 머리를 달고 있죠?”
그 작업을 진행하던 지하인은 생각대로 안 되자, 옆의 동료에게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동료는 지하인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옆에 있는 사자 몸통을 가리켰다.
신기한 광경에도 테일러는 시큰둥했다.
“그걸 내가 알면 대학교수나 하고 있겠지. 어떻게 처리할지 계획이나 세우자. 마석만 팔아도 제법 짭짤하겠어.”
테일러의 말대로 대박은 대박이었다. 적들을 전부 쓰러트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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