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56화 (56/193)

노병(4)

같은 지하인에게 질책을 받은 지하인은 사자 머리를 알맞은 몸통에 끼우기 시작했다.

뭐라 설명하기 오묘한 장면이 앨런의 시선을 빼앗았다.

“저들도 실수를 하는군요. 항상 공격적인 모습만 봤는데, 지금은 인간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들? 저것이라 불러라. 어차피 처리해야 할 적이고, 미궁을 내려가다 보면 생명을 수없이 쳐 죽여야 할 테니, 벌써 동정 같은 괜한 감상으로 힘 빼지 마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준비하시죠.”

앨런은 수레로 다시 돌아와서 장비를 챙겼다. 마탄 발사기를 꺼내 드니 테일러가 만류했다.

“그건 봉인하자. 사용하면 편하긴 한데 마석이고 영혼석이고 전부 박살 날 거다. 불바다는 덤이겠지.”

“혹시 모르니 가지고 가겠습니다.”

앨런은 발사기를 강화외골격 허벅지 부분에 끼웠다. 홈이 딱 맞아서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려고?”

“이럴 때를 위해 지팡이가 있습니다.”

길쭉한 지팡이를 가볍게 흔든 앨런은 룬펜으로 끄트머리에 룬문자를 즉석에서 새겼다.

“음···. 난 지렁이 같은 룬문자만 보면 울렁증이 생기더라. 죄다 똑같이 생겼는데 공돌이들은 어떻게 알아보나 몰라.”

“이건 [척력]을 중첩한 겁니다.”

“그러면 쓸만해?”

“복합적인 결과를 원한다면 다른 룬문자를 서로 연결하는 편도 좋지만, 중첩도 단순하고 효과적입니다. 최근에 배운 마력수련법 덕분에 중첩이 가능해졌습니다.”

“‘테일러’ 수련법 덕분이라고? ‘테일러’ 수련법이 대단하긴 하지.”

자신의 이름을 강조하는 테일러. 앨런은 모른 척하며 지팡이를 붕붕 휘둘렀다.

“지팡이로 타격하면 그 대상은 멀리 날아갈 겁니다.”

“직접 보면 알겠지. 근데 자세가 영 엉성하네. 나중에 내 몸 수리하면 자세 좀 봐주마. 난생처음 야구빠따 잡아보는 아기 같은 꼴은 고쳐야지.”

고마운 마음이 샘솟으려 하면 꼭 사족을 붙였다. 앨런은 자신이 몸치인 사실을 잘 알기에 그저 어깨만 으쓱거렸다.

“차라리 그 시간을 마법공학 연마에 쏟겠습니다.”

“모르는 소리. 한 번이라도 움직여봐야 나중에 생각나는 법이다. 노가리 그만 까고 가자.”

테일러는 한 손으로 반자동 샷건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레버를 조작했다. 휠체어에 샷건을 달아줬는데 직접 사격 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다시 통로 끝에 도착한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간다.”

신호탄은 테일러가 쏘아 올렸다. 목표는 근처 선반에 부품을 챙기러 온 지하인.

전투 모드로 기어를 바꾸고 레버를 풀로 당기니 휠체어가 질주했다. 시속 50km로 달리는 개조 휠체어는 자체가 흉기라서, 그대로 밀어버린다면 지하인의 육체는 부서지고도 남았다.

지하인은 갑자기 바닥을 긁는 소리에 의욕 없이 고개를 돌리다가 휠체어를 보고 얼어버렸다.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동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지하인이라면 주저 없이 공격하거나 괴성을 질렀을 것이다.

테일러에겐 전부 똑같은 괴물이었다. 잠깐 레버에서 손을 떼고, 양손으로 샷건을 겨누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일하다가 더웠는지 얇은 민소매 옷만 걸친 지하인의 몸에 납 구슬이 틀어박히고, 숨이 끊어진 몸은 선반에 처박혔다.

테일러는 다음 목표를 찾아 움직였다. 적들이 무장하거나, 경비 오토마톤이 전면에 나서기 전에 최대한 많은 숫자를 줄일 계획이었다.

앨런은 왼쪽을 쳐다봤다. 지하인 하나가 컨베이어 벨트를 뛰어넘어 달려들고 있었다. 손에 잡힌 커다란 스패너가 위협적인 빛을 뿜었다.

앨런 역시 그쪽을 향해 이동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서로의 동공에 서로의 모습이 비쳤다.

스패너가 아무리 길어봐야 지팡이의 리치를 이길 순 없는 법. 앨런이 엉성한 자세로 휘두른 지팡이가 지하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강화외골격으로 하체를 단단히 고정했는데도 상체가 흐물거렸다.

‘강화외골격을 상체까지 확장해야겠어.’

타고난 고질병은 테일러에게 배운다고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니 장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과는 좋았다. [척력] 제곱에 얻어맞은 지하인은 휭 날아가더니 동료를 덮치며 함께 쓰러졌다.

힘겹게 일어나려던 둘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고, 차가운 앞발 그리고 칼날 같은 발톱이 그들을 덮쳤다. 타격만으로도 갈비뼈가 주저앉은 시체에 깊게 할퀸 자국이 남았다.

표범의 카메라 아이가 무심히 움직이며 다음 목표를 물색했다. 그 상대는 사자 오토마톤. 방금 조립대에서 내려온 놈은 결합을 잘못했는지 머리가 덜렁거렸다.

힘도 속도도 표범이 우위인데 그런 하자까지 있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표범이 그냥 몸으로 들이박으니 떨어져 나온 머리가 데굴데굴 구르고, 조립대 뒤에 숨은 지하인은 냉혹한 이빨을 마주했다.

감정 없는 전투병기가 다음 차례를 물색하는 순간, 공장 끄트머리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장을 마친 지하인들과 경비 오토마톤이 조립대를 부수며 접근했다.

“나타났습니다.”

“나도 봤어!”

테일러는 앨런이 있는 장소로 휠체어를 모는 도중, 레버를 고정하고 반자동 샷건을 장전했다.

휠체어 뒤에는 스피드로더를 담은 통이 마치 화살통처럼 달려있었는데, 그 안에서 길쭉한 스피드로더를 꺼내서 샷건의 약실에 밀어 넣었다.

능숙한 손놀림과 신속함을 보면 과연 베테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씨발! 걸렸잖아!”

마지막 말만 아니라면.

합류한 테일러는 샷건 몸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앨런은 휠체어 손잡이 부근을 조작했다.

우웅!

푸른 방어막이 앞에 펼쳐지자 테일러가 정면을 주시하며 말했다.

“오, 이런 기능도 있으면 처음부터 알려주지.”

“그랬으면 방어막 믿고 그대로 들이받을까 봐 그랬습니다. 휠체어가 튼튼해 보여도 속은 여린 아이라 조심히 다루셔야 합니다.”

“이렇게 튼튼한 녀석이? 자식새끼 보는 부모의 심정인가···. 잠깐, 왜 뒤에만 있어? 설마 내가 방패니?”

“적에게 집중합시다.”

“나, 환자야···.”

말만 그렇게 할 뿐, 이미 전투태세였다.

달려오는 오토마톤과 뒤에 숨어서 사선을 피하는 지하인. 거친 몸동작 하나하나에서 공장을 습격당한 분노가 절절 흘러내렸다.

앨런은 마탄 발사기를 앞으로 겨눴다. 그 안에 장전한 마탄은 파괴력 대신 특수 효과에 집중한 물건이었다.

“폭발은 자제···.”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테일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마탄이 결과물을 풀어놨다.

[혼란], [침투]의 룬문자가 새겨진 마탄이 사방으로 푸른 빛줄기를 뿜어내고, 노출된 오토마톤의 몸체에는 이상이 발생했다.

이번에 배운 마력수련법으로 한층 강화된 룬문자의 효과는 적들의 마력회로를 타고 독처럼 온몸을 잠식했다.

“마나펄스 수류탄은 명함도 못 내밀겠구나. 혼자 다닌다고 해서 머리가 살짝 아픈 애인 줄 알았더니 이유가 있었어.”

혀를 내두른 테일러는 근처까지 접근한 대형견 크기의 전갈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납탄이 두들길 때마다 금속 몸체가 사정없이 우그러들었다.

테일러가 작은 몸체와 빠른 속도로 마나펄스를 피한 적들을 막아내는 사이, 앨런은 뒤에서 달려오는 들소에 집중했다.

어깨높이만 2m에 달하는 놈은 트럭보다 더한 심리적 압박을 선사했다.

‘저지하려면 당연히 막대한 파괴력이 필요할 테고···.’

그러면 공장이나 전리품들이 상당 부분 박살 난다. 미궁 탐험가의 딜레마였다. 적이 너무 강해서 최선을 다하면 나중에 건질 물건이 없어지는.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친 앨런은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갑작스럽게 폭증한 시각 정보에도 뇌는 평온했다. 이 정도는 준비운동도 아니었다.

‘조립대, 파이프, 크레인···.’

단서를 포착하고 계획을 세우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초. 장갑에 [인력]을 새기자 3초. 위로 손을 뻗으니 1초.

총 5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들소가 가까이 접근했다. 묵직한 발굽이 뿜어내는 울림이 앨런의 다리뼈를 타고 흘렀다.

테일러는 들소의 돌진에도 자리를 지키며 작은 오토마톤을 상대했다. 그리고 앨런은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크레인 갈고리가 쭉 내려오더니 돌진하던 들소의 옆구리 외장갑에 걸렸다. 낚싯줄처럼 쇠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들소의 운동량과 쇠줄의 장력 중 승리자는 후자. 균형을 잃은 황소가 우당탕대며 넘어지고, 뒤에 바짝 붙은 적들도 함께 휩쓸려 아비규환을 자아냈다.

골칫거리들이 단번에 정리되자 테일러가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믿고 있었다.”

“바지가 축축해 보여요.”

“큰일 날 소리를! 이건 땀이야!”

소리 지른 테일러가 휠체어를 조종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뒤엉킨 표적들은 납탄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후 오랜만에 뛰었더니 빡세구나. 젊을 때는 어떻게 매번 내려왔나 몰라.”

“아직 마무리가 남아있습니다. 전리품을 거둬들여야 완벽한 끝이죠.”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슬슬 반응이 온다.”

끔뻑거리는 눈꺼풀, 점점 흐려지는 눈동자. 팽팽하던 테일러의 등판이 앞으로 점점 수그러들었다.

“설마 귀찮아서 지금 발동하는 거 아니죠?”

“···.”

테일러의 입이 조용히 벌어졌다. 아픈 사람에게 너무 심한 발언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앨런은 분명 떨리는 동공을 목격했다.

어쨌든 환자는 환자니 이해하며 병아리 턱받이를 목에 묶어줬다.

끈을 동여맬 때 손에 힘이 살짝 과하게 들어간 것 같지만, 그건 전투 후에 찾아오는 탈력 비슷한 증상. 목을 조르려는 의도가 있었냐고 하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게 맞았다.

‘함께 있으면 왠지 나도 유치해지는 기분이야.’

그래서 나쁘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앨런은 휠체어를 그나마 깨끗한 장소에 두고 수레를 가져왔다.

‘생각보다 많은데.’

바리바리 준비한 탐험 물자가 무색하게, 그냥 복귀해도 될 만큼의 전리품이 있었다.

마석과 영혼석을 수레에 담다 보니 손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강한 녀석으로 강화외골격에 달아볼까.’

앨런이 원하는 녀석은 정밀성과 힘을 동시에 갖춰야 하기에 제작에는 오랜 시일이 소요될 예정이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실패하든지 새로운 발견을 하든지 과정 하나하나가 전부 즐거움이니까.

‘마정석도 있네.’

고순도의 에너지가 담긴 돌은 누구나 원하고, 어디에나 사용할 수 있어서 구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팔 생각이 없었다.

다음은 책이었다. 아까 지하인이 힐끔힐끔 보면서 사자를 조립했으니 조립설명서로 추측되었다.

다만 안쪽에는 글 없이 그림만 잔뜩 있었다.

‘어린애들 보라고 만든 설명서 같은데. 지하인들은 지능이 낮나?’

복잡한 오토마톤과 영혼석이 있기에 속단은 일렀다. 그러나 무언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수준 차이가 너무 크다고나 할까.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도중, 앨런의 왼쪽 눈이 통로를 향해 홱 돌아갔다. 오른쪽 눈은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점점 예리해지는 감각이 무언가 수상함을 포착했다. 안개 없는 비밀통로의 풍경이 왠지 흐릿하게 보였다.

‘뭔가 어색한데.’

마력을 더 불어넣으니 시야가 확대되고, 강화된 투시가 무언가를 꿰뚫어 봤다.

‘투명화···.’

눈은 그 안의 존재까지 인식했다.

<분석>

이름 : 불명

종족 : 오크

특징 : 그린블러드, 대머리, 문신

9층에서 봤던 갱단원이었다. 놈들 앞에서 구르는 구체는.

‘냄새추적 골렘인가? 발자국 탐지보다 그쪽이 신빙성 있겠지.’

미궁은 탐험가가 주변에 없다면 30분~1시간 사이에 모든 흔적을 먹어치우며, 그건 체취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놈들은 농도를 확인하며 따라왔단 의미였다.

저들의 목적을 확인하는 것도 좋지만 이쪽에는 환자가 있었다. 다치면 곤란하니 확실하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으면 신문하면 되고, 아니라면.

‘보조 기억장치를 열어봐야겠지.’

생각을 마친 앨런은 마탄 발사기를 손질하는 척하며 마탄을 장전했다. 공장을 청소하며 사용했던 종류와 달리 파괴력이 가득 담긴 마탄을.

테일러가 호구라고 놀리지만, 앨런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의는 베풀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투명화, 미행, 추적 골렘.

셋 중 하나만 따져도 벌써 레드카드였다.

앨런의 단호함을 담은 마탄이 통로로 쏙 들어갔다. 예전에 사용했던 카드라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놈들도 마탄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통로는 좁았고, 덩치를 한껏 부풀린 화염이 그곳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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