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57화 (57/193)

노병(5)

축 처진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고, 흐릿한 주변의 풍경이 눈동자에 담겼다. 몇 번 깜빡거리니 상이 뚜렷해졌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테일러는 기억을 더듬었다. 평소라면 금방 생각이 났을 텐데, 뇌 확장 장치가 망가져서 그런지 기억이 뿌옜다.

파이프와 조립대, 수리 공구 등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이곳이 비밀통로에 숨겨진 공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후각이 어떤 향기를 감지했다.

‘고기 굽는 냄새?’

테일러의 정신이 번쩍 깨어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앨런을 찾았다.

“이 녀석. 내가 자는 사이에 고기를 구워?”

“주무시는 동안 물만 마셨습니다.”

목소리는 근처에서 들렸고, 거기에는 오토마톤을 분해하는 앨런이 있었다.

테일러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깨달았지만, 의심스러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직 후각은 안 망가졌다. 분명 여길 청소할 때 불을 안 썼는데 고기 태우는 냄새가 난다는 뜻은 네가 구라를 친다는 얘기지.”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면 저기 있는 냄새 쫓는 골렘은 뭐냐?”

수십 년에 달하는 미궁탐험가 경력이 허풍이 아니라는 듯, 수레에서 삐죽 튀어나온 외견만 보고도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결국, 앨런은 그린블러드의 갱단원이 뒤를 쫓았고, 자신이 모두 격퇴했노라고 이실직고했다.

“짐승 새끼들. 나쁜 버릇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만. 다친 데는 없냐?”

“원거리에서 정리했습니다. 진짜예요.”

앨런이 양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니, 그제야 테일러의 사나운 눈빛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보조기억장치나 기억수정은 확인해 봤니?”

“안전하게 처리하려고 마탄의 화력을 높였더니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그래, 뒤를 캐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이지. 늙어빠진 환자랑 애랑 같이 다녀서 털어보려고 했나?”

“애 아닙니다.”

“그 단어에 발끈한다는 자체가 애라는 증거다. 오히려 그때가 좋을 때니 많이 즐겨라. 시간은 절대 너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앨런 옆으로 다가온 테일러는 조립대 위에 올려진 작은 부품들을 수레로 옮겼다.

“내가 젊을 때는 절대 안 참았어. 습격을 당하면 지상에서도 본때를 보여줬지. 그러고 보니 그린블러드는 제이크가 한 번 들쑤신 거로 아는데 그새 재건했나?”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절대 안 됩니다.”

“뭐가 안 되는데?”

“지금 습격, 아니 복수할 계획 세우고 있잖아요.”

“내 머리에 해킹 장치 심었니···가 아니라. 맞고 병신처럼 가만히 있을 거야?”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때렸습니다.”

앨런의 말대로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오크들은 좁은 통로에서 피할 곳도 없이 불벼락을 뒤집어썼고, 겨우 살아서 통로를 탈출한 것들도 빈사 상태였다.

앨런이 들인 수고라고는 마탄 발사기 장전과 적들의 장비 수거뿐이었다.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음에도 테일러는 좀처럼 인상을 풀지 않았다. 얼굴 주름 사이사이마다 분노가 가득했다.

“원래 은혜는 2배, 원한은 10배가 국룰이다.”

“국룰이요?”

“몰라? 이런 단어도 모르면···. 아, 그럴 만해. 맨날 마법공학 책에 적힌 꼬부랑글자만 보고 있으니 그렇지. 암묵적인 규칙이란 뜻이다. 그래서 언제 갈 거냐?”

앨런은 제 일처럼 화내는 테일러를 달래며 먼저 처리할 문제가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 복수는 좀 나중으로 미루세요.”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앨런의 손가락 끝에 자신이 있음을 깨달은 테일러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내 가치가 높긴 하지. 부끄럽네.”

“···수리해야죠.”

“언제는 치료라고 말하라며.”

“평가가 좀 내려갔습니다.”

테일러까지 정리에 손을 보태니 복귀 준비도 조금이나마 빨라졌다. 전리품이 워낙 많아서 마지막에 달려들었던 들소까지 일으켜 세웠다.

앨런이 썰매와 들소를 연결하니, 옆에 있던 테일러가 툭 내뱉었다.

“네크로맨서가 여기에 있었네.”

“갑자기 사령술사요?”

“오토마톤은 고장 나도 네가 몇 번 주무르면 다시 일어나잖아. 올라가면 들소는 어떻게 할 거냐?”

“당연히 처분해야죠. 최대한 멀쩡하게 제압해서 가격도 높을 겁니다.”

“소들이 고생이 많아. 살아서는 사람이 할 노동을 대신 해주고, 죽은 후에는 맛있지···.”

“요즘은 전부 기계가 하잖아요. 농사도, 운반도 말이죠.”

“애가 낭만이 없어.”

테일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그건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인데 테일러와 함께 있으면 계속 입이 열렸다.

“소고기 먹고 싶단 뜻이죠?”

“난 그런 얘기는 안 했는데···. 네가 원하면 어울려 주마. 그런데 안주머니는 뭐가 들었기에 그리 불룩해?”

“마정석, 오파츠 영혼석도 있더군요.”

“뭐? 오파츠도 감정할 줄 알아?”

“마도구인지 오파츠인지 구별할 정도는 됩니다. 어쨌든 이건 제가 사용할 겁니다.”

“그래. 너도 고생했으니 사리사욕은 채워야지. 사람은 보상이 있어야 더 열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저번에 해킹을 사용한다고 했잖아요. 능력을 향상하려면 오파츠 영혼석이 필요합니다.”

앨런의 눈은 새겨진 별문자에 따라 가동했다. 능력을 확장하려면 구름 같은 입력창의 크기를 키우거나 배드섹터를 지워야 했다.

일반적으로 입력창의 크기는 고정되어있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그중 하나가 앨런의 눈이나 오파츠 영혼석이었다.

저번에 새 형태의 오토마톤 영혼석을 흡수했더니 배드섹터가 지워졌지 않은가.

같은 방식으로 지금 얻은 영혼석으로 별문자의 영역을 확대하고, 능력을 강화하면 훨씬 안정적인 수술이 가능했다.

눈의 기능도 당연히 강화되지만, 앨런은 그걸 덤이라고 생각하고 수술에 집중했다.

*

앨런의 눈이 빔프로젝터처럼 허공에 화면을 띄웠다. 구매를 확정한 매직웨어 목록이 주르륵 나타났다. 옆에 앉은 테일러가 하나하나 이름을 읊었다.

“뇌 확장 장치, 고통 조절기, 리플렉스 액셀 그리고 인공 마력회로, 마나하트 구성품, 폐, 신경 다발, 근육 섬유, 피부···. 이렇게 많이?”

“그만큼 몸이 안 좋다는 의미입니다. 저 정도는 바꿔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겠죠.”

“비싸면서도 싸네. 하긴,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쓸모있는 법이니까. 괜히 마법공학자가 전문직 중 최상위에 있는 게 아니구나.”

매직웨어 구입에만 5천만 코인이 들었다. 평이 괜찮은 물건 중에서 그나마 가격이 낮은 것만 골랐는데도 이랬다. 나중에는 눈 하나에만 억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으니 놀라긴 일렀다.

“5천만이면 병원이나 시술소를 가는 편이···. 안 되겠구나.”

정식 시술소나 병원은 훨씬 비싸고 할부도 불가능했다. 미궁탐험가가 수입이 많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 있지만, 그만큼 위험한 직업이라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테일러에겐 시간이 모자랐다. 앨런을 처음 봤을 때는 하루에 2시간 정도 자신을 잊어버렸는데, 요즘은 4시간으로 늘어났다.

운이 좋아서 내려갈 때마다 저번처럼 공장을 발견하면 모를까. 차라리 그럴 운이면 복권을 사서 1등에 당첨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의료 시설은?”

앨런의 창고는 오직 마법공학을 위한 공간이라 생명유지장치나 수술 도구는 일절 없었다. 테일러가 그 점을 꼬집자, 앨런은 태연하게 답변했다.

“롤프 씨에게 부탁해서 구해놨습니다. 의사도 섭외했고요.”

“야매지?”

“경력 15년 차라 했으니 야매라고 칭할 단계는 넘어갔습니다. 애초에 이 바닥에서 실력 없거나 돌팔이면 돈 대신 납탄이 머리에 박히니까요.”

테일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야매라도 오래 버텼다면 무시할 수 없었다. 정식 자격증만 없을 뿐, 전문의라고 생각해도 됐다.

“그 사람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용케 네가 끼는 걸 허락했다?”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렸는데 몸 상태를 알려주니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다른 사람 고용할 수고를 덜었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수술 날짜는 언젠데?”

“오늘입니다.”

“뭐? 혼자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려줘야지.”

“어제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주무셔서 나중에 말하려고 생각했다가 잊었습니다. 매직웨어는 그쪽으로 배달했으니 몸만 가면 됩니다.”

테일러는 입을 다물었다. 잤다는 이야기는 정신을 놨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업보이니 어쩌겠는가.

롤프가 소개해준 시술소는 그의 술집 근처에 있었다. 깔끔한 2층 건물 전체가 불법 시술소였다.

“울파라고 불러요.”

형광색의 빨간 머리카락, 작은 키와 단단한 몸의 여자 드워프가 둘을 맞이했다.

“동생을 소개해준 건가? 남매 취향이 똑같구먼.”

“똑같다고 하지 말고 오빠 놈이 절 따라 했다고 합시다. 긴말할 거 없이 바로 누우세요. 화장실은 갔다 오셨죠?”

“수술동의서는? 당연히 없겠지?”

“영감님. 정식 의료원에서나 작성하는 문서를 이런 데서 바라면 안 되죠. 보기완 다르게 젊을 때는 좀 사셨던 모양이네. 그럼 마취 시작합니다.”

산소 호흡기를 비롯한 생명유지장치를 부착시킨 울파는 바로 마취를 시작했다.

“입으로 10까지 세보세요.”

“일, ㅇㅣ, ㅅ······.”

마취 효과는 확실했다. 바이탈 사인을 확인한 울파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장비를 착용했다.

수술용 정밀 보조 의수인 히포크라테스를 멀쩡한 팔 위에 덮어씌웠다.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기계 손가락들도 똑같이 움직였다.

앨런은 노박 클리닉 때가 생각나서 히포크라테스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래? 아, 이게 신기해서? 마법공학자면 이게 뭔지는 알고 있잖아.”

“사용해보기도 했죠.”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시체에서 매직웨어를 빼냈고, 지금은 사람을 살리려고 매직웨어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바로 시작하자. 자신은 있는 거야?”

“확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해야만 하죠.”

앨런은 눈두덩을 매만졌다. 오늘을 위해 해킹 관련 부분에 별문자를 채우느라 오토마톤은 손도 안 댔다.

마력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사이, 테일러의 다리를 확인한 울파가 인상을 찌푸렸다.

“먼저 다리부터 바꿀까? 직접 보니 더 끔찍하네. 괴사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 영감님은 어떻게 버틴 거야?”

정답은 마력통제력. 테일러 수련법의 통제력만큼은 정말 뛰어났다. 앨런이 더 큰 세상을 경험하면 순위가 바뀌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1위였다.

“연결 부위가 망가지고 생체조직이 덕지덕지 붙어서 이거 떼자마자 마나하트가 이상 반응 보일 거 같은데.”

“마나하트를 해킹해서 다리가 달린 것처럼 거짓 피드백을 보낼 겁니다. 말단부터 순서대로 교체하면 될 겁니다.”

“수술할 동안 버틸 수 있겠어? 내가 해킹은 잘 몰라도 마나를 엄청나게 소모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돈 주는 사람 말을 믿어야지 어쩌겠어.”

앨런의 눈이 테일러의 인공 마나하트를 해킹, 망가진 마력회로를 겨우 달래며 다리에서 보내는 신호를 조작했다.

흐름 안정화를 끝내고 그 표시로 어깨를 두드리자, 울파 역시 말없이 뼈 절단 톱을 작동했다.

가가각!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소리가 수술실을 가득 채웠다. 보는 광경 역시 잔인했지만, 앨런은 절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바다에서는 아무리 눈을 떠도 찾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

눈을 뜬 테일러는 산소 호흡기를 떼버렸다. 몸에 힘이 넘쳐서 이런 장치 따위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머리만 슬쩍 들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앨런과 울파는 벽에 기대서 자고 있었다.

확인이 끝나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수술대 위에 동그란 거울이 달려있었다.

‘깨어나면 확인하라고 붙여놓은 건가.’

다리와 팔 그리고 몸통의 피부는 팽팽했고, 쩍쩍 갈라진 근육의 형태가 보였다.

‘인공 근육에 인조 피부까지.’

꽉 말아쥔 주먹에서는 젊은 시절의 활력마저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게 정말 진심인 사람이 있을까. 전부 상황 때문에 스스로를 세뇌한 것이다.

거울에 주름진 얼굴과 살짝 올라간 입매가 보였다. 예전 얼굴 그대로였다.

‘이게 적당하지. 주름은 내가 겪은 세월의 흔적이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

거울을 치우자, 작은 메모지가 떨어졌다.

[그냥 일어나도 됩니다. 어디 나가진 말고요.]

처음 보는 필체니 의사가 썼으리라. 몸에 부착된 케이블을 떼어낸 테일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두 발로 섰음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에 휠체어 없이 걷고 있는데도 어색함은 거의 없었다.

테일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앨런에게 향했다.

‘가르쳐줄 게 정말 많아.’

기왕이면 천천히 배웠으면 좋겠지만, 앨런의 지적 능력을 생각하면 그럴 리 없었다. 스펀지도 놀랄 정도의 속도로 빨아들이겠지.

앨런은 무섭게 성장할 것이다.

‘그 잠깐의 시간을 무사히 넘길 우산이 되어주마.’

내가 원래 이리 감상적인 사람이 아닌데. 테일러는 말끝을 흐렸다. 그것도 잠시, 냉철한 눈빛으로 앨런을 바라봤다.

‘2기? 아냐, 3기쯤은 되어야 그나마 따라가겠어. 어디에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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