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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58화 (58/193)

그린블러드(1)

어떤 창고의 중앙에는 마법공학용 설비와 오토마톤의 잔해가 가득했다. 누군가의 공방으로 추정되나, 구석에는 이와 어울리지 않게 바벨과 덤벨 등 운동기구가 있었다.

거기에는 보디빌더처럼 큰 덩치가 서 있는데, 피부에 생긴 길쭉한 홈이나 살갗 아래로 가끔 지나가는 푸른빛은 신체가 매직웨어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였다.

얼굴은 팽팽한 몸과 어울리지 않게 백발노인이었다. 그는 누워있는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더 빨리. 더, 조금만, 마지막이다. 진짜 끝. 이번이 최종!”

“끄으으···.”

벤치프레스를 겨우 마친 앨런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팔은 축 늘어져서 실처럼 하늘거렸다.

“운동 좀 열심히 해야겠다. 이거 보이니? 20kg짜리 바벨에 원판도 안 달았어.”

“···.”

앨런은 지쳐서 말할 기운도 없었다. 천장을 보며 한동안 숨을 고르다가 운동기구를 정리하는 테일러에게 물었다.

“효과가 있을까요?”

“마력과다증이라서 항상 몸이 약했겠지. 그래도 해야 해.”

테일러의 인공 안구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요즘 매직웨어는 참 정교하게 만들어서 심리상태를 그대로 표출할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평온을 가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안 했···.”

“어허!”

“마법공학이 이상하진 않잖아요.”

“아주 틈만 나면···. 그래도 효과는 있잖아. 처음에 할 때는 5번도 힘들어했는데 벌써 10개까지 왔다. 명심해라. 미궁탐험가에게 옵션은 하나라도 많아야 한다. 네가 약하다고 괴물들이 너에게 맞춰서 설렁설렁 상대해주진 않으니까!”

정곡이었다. 앨런은 아픈 몸을 핑계로 그동안 운동에 소홀했던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기초체력훈련은 마력이 몸을 다치게 하니, 육체를 단련해서 버텨보자는 의도로 시작됐다. 미궁의 괴물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는 부수적인 이득일 뿐이다.

어쨌든 테일러가 가르쳐주는 대로 근육을 움직이다 보니 잠도 잘 오고, 아침에 일어날 때도 신체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샤워를 마친 앨런은 테일러의 맞은편 식탁에 앉았다.

“몸 상태는 어때요?”

“누군가가 기름칠을 어찌나 잘해줬는지 아주 부드럽게 움직여. 전성기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이 정도면 심도 2~2.5 정도는 되겠다.”

“제한된 예산으로 매직웨어를 구매하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탐험으로 자금을 모아서 상위 라인으로 교체하면 점점 강해지겠죠.”

“말년에 전신 개조를 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몸이 튼튼해지면 나야 좋지.”

“물론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정산할 겁니다.”

“바라던 바다.”

테일러는 흔쾌히 수긍했다. 지금까지 앨런에게 진 빚만 해도 액수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를 지녔는데, 염치없이 계속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돈으로 목숨마저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그런 사회이기에 사람의 진심은 무엇보다 귀중했다.

치매도 나았으니 그 따뜻함을 잊을 일도 없었다. 뇌 확장 장치가 뇌파에 영향을 주며 생긴 악재는 이번에 매직웨어를 대거 교체하며 사라졌다.

아우성치는 위장을 달랜 앨런은 공장에서의 일을 언급했다.

“그린블러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언제 그 얘길 꺼내나 했지. 안 그래도 미궁은 위험한 장소인데, 그런 것들까지 달라붙으면 존나 빡세져. 우연히 따라붙었다면 몰라도, 만약 의도한 행위라면 발 뻗고 자겠어?”

몸을 고쳤어도 걸걸한 말투는 변함없었다. 아파서 공격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디폴트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앞만 신경 쓰기에도 바쁘니 뒤를 깨끗하게 만들자는 뜻이군요.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진정해. 화끈함도 좋은데, 일단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야지. 진짜 우리를 노렸다면 복수는 더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자, 그럼 갈 데가 있으니 일어나자.”

“어딘데요?”

“모르고 가는 편이 두근두근하지 않겠어? 이제부터 겪는 일은 하나하나가 수업이라고 생각해라.”

*

왕복 2차로인 좁은 도로, 어떻게 건축했는지 모를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낮인데도 음영이 가득한 거리, 무언가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브레이커의 회사가 있는 구역보다 훨씬 치안이 안 좋은 장소였다. 마침 누군가가 연발로 갈기는 총성이 신빙성을 더해줬다.

“여기는 어디예요?”

메이즈시티는 아직도 확장 중인 초거대도시. 행정력이 제대로 점유하지 못하는 장소도 엄청 많았다.

테일러는 대답 없이 고철을 구부려서 골목 안으로 던졌다. 그와 동시에 발생한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동방타운. 정확히 말하면 동방 제1 타운. 외국인 근로자의 주거 목적으로 계획했지만, 지금 꼬락서니는 보다시피 이렇지.”

“치안력의 부재 때문인가요?”

“갱단의 난립, 늘어나는 빈민 등 이유가 너무 많아서 설명하기 복잡하구나. 근데 그거 아니? 경찰만 보면 못 죽여서 안달인 새끼들도 상하수도 같은 인프라를 정비할 때는 얌전해. 그래, 지들도 똥은 못 참겠다 이거지. 아주 웃긴 놈들이야.”

“그런데 왜 동방 대륙이라고 부르나요? 솔도스 연방 기준으로 바다 건너 서쪽에 있잖아요.”

잠깐 멈칫한 테일러가 앨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굉장히 신기한 표정으로.

“얼뜨기 공돌이 수십이 달라붙어도 뺨따귀를 후려칠 녀석이 상식도 몰라? 새삼 느끼는데 굉장히 편향된 지식을 지녔네.”

앨런은 고개만 끄덕였다. 마법공학말고는 관심이 없으니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었다.

“원래는 하나의 대륙에서 서방, 동방이라고 칭했어. 그런데 바다를 건너니 다른 대륙이 또 있던 거지. 그런데 명칭이 굳어서 계속 그리 부르는 거다. 생각해보니 자기 나라 수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놈들이 태반이니 이상하지도 않네.”

“재밌네요.”

“재밌기는. 딱 봐도 지겹다는 눈빛이구만. 룬문자, 별문자 아니면 다 별로지? 나중에 여친 생기면 꼭 룬문자로 메시지 보내라.”

앨런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이, 둘은 허름한 아파트에 들어갔다. 앞을 막는 쓰레기를 대충 옆으로 밀어내고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호수는 많으나, 인기척은 극도로 적은 장소였다. 테일러의 발걸음은 녹슨 문 앞에서 멈췄다. 일정한 박자로 노크를 하니,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줄 돈 없어. 꺼져!”

“주문해놓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면 되겠나?”

“무슨 헛소리야? 처맞기 싫으면 꺼져!”

공격적인 언사에 테일러가 눈썹을 찌푸리며 문에서 멀어졌다.

“수업이라면서요?”

“음···. 잠깐만 기다려 봐.”

앓는 소리를 낸 테일러는 아까와 달리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조금만 힘을 더 주면 부서질지도 몰랐다.

“철수! 나야, 테일러! 5년 만이긴 한데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여전히 묵묵부답인 문을 보며 앨런이 물었다.

“철수가 누군가요?”

“삼라만상 다이버. 설마 다이버가 뭔지도 모르진 않지?”

“거짓된 지식의 바다에서 귀중한 정보를 건져내거나, 방화벽을 뚫고 무언가를 탈취하기도 하는 직업이잖아요. 아, 혹시 정보원인가요?”

“예전에 브레이커 방화벽을 건드렸다가 나한테 잡힌 적이 있지. 용서해주는 대신 열심히 부려먹었는데, 암호에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이사했나 보다.”

“부려먹었다고요? 그러니까 모른 척하겠죠.”

“그럴 수도···.”

예상외로 쉽게 수긍하는 테일러. 평소의 모습을 봤을 때 발뺌할 줄 알았는데, 안 그런다는 뜻은 마음에 걸리는 게 많다는 신호였다.

“아니, 그런데 감옥 갈 녀석을 내가 용서해준 건데···.”

“그럼 다른 정보원을 찾아가 볼까요?”

“가성비는 철수가 가장 좋은데 아깝게 됐네. 개인용 번호 데이터도 날아가서 어쩔 수 없다.”

아파트를 나서던 앨런은 마침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을 피해서 옆으로 움직였는데, 그도 따라오며 길을 막았다.

“뭐 하는 놈이냐?”

옆에 있던 테일러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 남자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고 벽으로 밀어버렸다. 남자는 켁켁 거리면서도 두 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앨런!”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테일러의 주먹이 잠깐 멈췄고, 앨런은 남자를 지긋이 쳐다봤다.

<분석>

이름 : 유타

종족 : 수인

특징 : 토끼 귀, 도움!

누군가 했더니 기사의 톱날 대검에 중상을 입었던 탐험가였다. 그때 의료진에게 인계했는데,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을 보니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살아있었군요. 다행입니다.”

“나야말로 고맙지. 저, 영감님. 이제 슬슬 놔주시는 게···. 숨쉬기가 곤란해서요···.”

바닥에 발이 닿은 유타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더니 테일러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지려다가 다시 뒷덜미를 잡혔다.

“할 말 있으면 이 상태로 해라.”

“그냥 놔주셔도 돼요. 위험한 사람 아니에요.”

테일러는 그 말을 순순히 따랐다. 위험하지 않다는 표현은 어떤 방법으로도 해를 끼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호원이야?”

“아뇨. 계속 같이 다니기로 했어요.”

“어딜? 아, 미궁. 넌 여전히 탐험하는구나. 부럽다.”

“유타는요?”

그는 대답 대신 구겨진 상의를 옆으로 젖히며 어깨를 보여줬다. 그날의 흉터가 아직도 짙게 남아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큰일을 겪었잖아. 그래서 겁도 나고, 가족의 반대도 있어서 그만뒀지.”

“이해합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세 명 중에 가장 현명한 사람은 유타일지도 몰랐다. 잠깐 불편한 기류가 지나가고, 유타가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여긴 무슨 일이야? 집이라도 알아보는 거면 별로 추천해주고 싶진 않아.”

“다이버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이사 갔는지 반응이 다르더군요. 만나서 반가웠고 앞으로도···.”

“잠깐, 잠깐. 다이버? 마침 가족이 다이버인데 소개해 줄까? 할아버지한테 배워서 실력도 좋아.”

“조부?”

그 단어에 반응한 테일러가 유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자세히 보니 왠지 모르게 친숙했다.

“혹시 철수의 가족인가? 얼굴이 좀 닮은 듯한데.”

“맞아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할아버지는 쌍둥이 누이에게 작업실을 물려주고 귀향하셨어요.”

“그런데 내가 알기론 철수는 뱀 수인인데···.”

“그것까지 아시네요. 아버지는 똑같이 뱀 수인인데, 어머니는 토끼세요. 누이는 아버지를, 저는 어머니를 닮았죠.”

다시 녹슨 문 앞에 도착하자, 유타가 몸을 돌렸다.

“혹시 ‘구렁이가 담을’이라는 암호 사용하셨나요? 그러셨으면 옛날 암호라서 모른 척했을 거예요.”

유타는 딱히 암호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문 위에 손바닥을 대고 현관 렌즈에 눈을 붙이자 저절로 열렸다.

내부는 밖과 딴판이었다. 쓰레기장이었던 복도와 달리, 최신식 가구가 가득해서 새집을 연상케 했다.

“야! 내가 노크는 하고 들어오라고···.”

소파에 앉아있던, 흑발과 금발이 반반 섞인 여성이 으르렁거리다가 앨런과 테일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소음 제거 헤드폰을 슬그머니 벗기도 했다.

“아까는 남자 목소리던데.”

“변조했겠죠.”

“오래 쉬었더니 나도 감이 물러졌나 보다.”

유타는 대화를 나누는 둘을 놔두고 누이에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멍청이의 목숨을 구해준 분? 생각보다 젊네.”

여성은 앞으로 나와서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키리예요. 아까는 왜 그랬는지 아시죠?”

“앨런입니다.”

“난 테일러다. 그런데 철수 녀석 손녀 이름은 슬기로 알고 있는데···.”

“키리라고 불러주세요. 슬기라는 사람은 여기에 없어요.”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용무를 물었고, 테일러는 분쟁이 생겨서 그린블러드의 정보를 알고 싶다고 했다.

“무식한 것들 말이죠? 일단 위치와 아지트 외형은 알고 있으니 받으세요.”

테일러와 키리의 안구가 동시에 빛나며 정보교환이 이루어졌다.

“나머지 정보는 잠수해서 찾아볼게요. 아, 이번엔 무료 서비스랍니다.”

키리가 한쪽 방으로 들어가고, 둘은 소파에 앉아서 정보를 훑어봤다. 테일러의 눈에서 쏘아진 빛이 탁자에 이미지를 그려냈다.

“구공업지역에 있고, 아지트는 물류창고를 개조했군.”

“여기와 여기에 폭탄을 설치하면 쉽게 무너지겠네요.”

“···?”

테일러가 빤히 쳐다보자, 앨런은 추가로 답변을 요구한다고 이해했다.

“큰 화력으로 단번에 녹이는 법도 좋지만, 효율적으로 하려면 건물 자체의 무게로 무너지게 해야죠. 중심 기둥 몇 개만 날리면 콘크리트와 철근 자체가 놈들의 무덤이···.”

“잠깐. 너, 관심 없는 분야는 까막눈이잖아. 그런데 왜 이리 잘 알아?”

“예전에 실행하려다가 재료의 부족으로 관둔 경험이 있습니다.”

앨런은 노박 클리닉을 생각하며 말했지만, 테일러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혹시 화염과 파괴에 관심 있니? 메이즈시티에서는 함부로 그러면 큰일 나.”

“어차피 갱단 건물이잖아요.”

“그래. 거기로만 만족해라. 알았지? 나랑 약속하는 거다.”

묘하게 대화가 겉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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